김기석의 새로봄(71)

 

본이 된 사람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뒤에, 옷을 입으시고 식탁에 다시 앉으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가 사실로 그러하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복음 13:12-15)

 

김흥호 목사는 스승을 산과 같은 존재라 말한다. “사람은 산을 보다가, 산을 걷다가, 산이 됩니다.” 놀라운 말이다. 한국의 한 등반가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것을 보고 쓴 글 속에 그가 생각하는 스승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다.

 

“세계의 정상 히말라야 정상에 태극기가 휘날렸다. 무서운 빙벽과 고요한 빙호(氷湖)와 넘치는 빙하가 8,848m 에베레스트의 모습이다. 옛 사람은 이 산을 설산(雪山)이라 했고, 이 설산은 가끔 스승에 비유되었다. 위대한 스승에게는 빙벽과 같은 의와 불의를 판가름하는 무서운 정의감이 감돌고 있다. 그리고 얼음같이 차가운 참과 거짓을 판가름하는 고요한 진리감이 깃들어야 하고, 빙호같이 넘치는 삶과 죽음을 판가름하는 자비감이 흘러내려야 한다. 무서운 정의와 고요한 진리와 넘치는 자비가 하나가 될 때 위대한 스승은 이루어진다.”(설교 ‘스승의 특징’ 중에서)

 

무서운 정의, 고요한 진리, 넘치는 자비가 한 존재 속에 구현될 수 있을까? 예수는 바로 그런 분이었다. 권력 앞에 당당하여 ‘예’와 ‘아니오’가 분명했고, 진리를 구현할 뿐 드러내려 하지 않았고, 세상의 모든 슬픔을 품어 안으셨다. 예수님을 스승이라 하면 어떤 이들은 모욕감을 느낀다며 항변한다. 세상의 구원자이신 주님을 스승으로 격하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스승이 아니고는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스승은 길이 된 사람이고, 참 생명이 된 사람이고, 진리의 화신이다. 

 

 

 

유월절을 앞두고 예수님은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다. 베드로가 이건 예법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항변했지만 주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요한복음 13:8)고 말씀하신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무릎을 꿇은 채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는 모습은,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적시던 여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런 사랑의 행위는 모든 계층화된 질서의 전복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심지어 당신을 배신할 유다의 발까지 닦아주셨다. 영혼의 깊은 어둠 속을 방황하던 제자의 번민까지도 용납하고 품어 안으신 거룩한 사랑이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주신 후 예수님은 옷을 입으시고 식탁에 앉으셨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요한복음 13:14). 발을 씻겨 준다는 것, 그것은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연약함과 슬픔, 못남과 허물까지도 사랑으로 수용하는 것, 바로 그것이 제자의 길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세상은 이러한 비상한 실천을 통해 열린다. 주님은 말로 가르치는 분인 동시에 삶으로 본을 보이신 분이다. 본받을 이가 없는 인생은 쓸쓸하고 적막하다. 예수를 본받을 때 삶이 맑아진다.

 

*기도*

 

하나님, 아름다운 삶을 살려고 애써보지만 우리는 번번이 습관의 폭력 앞에서 무너지곤 합니다. 주님을 따라 살겠다는 우리의 의지는 작은 타격을 받는 순간 무너지곤 합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건축자는 다름 아닌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못났다 책망하지 않으시고 끝없이 용납하시는 그 사랑을 감당할 길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를 사랑으로 전복시키십니다. 이제 우리도 그 사랑을 품고 누군가의 발을 닦아줄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 속에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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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5)

 

맞은편에서 보면

 

경북북지방 연합성회에 다녀왔다. 안동과 영주를 중심으로 구성된 경북북지방은 4개 시(市)와 6개 군(郡)으로 이루어진 지방이었다. 한 개 도시에도 여러 개의 지방으로 나누어져 있는 도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한 지방의 이 쪽 끝에서 저 쪽 끝까지 가는데 차로 3시간이 걸린다니, 29개 교회가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집회는 영주에 있는 영주성민교회에서 열렸는데,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두 시간 가량을 오가는 교회도 있었다. 두 시간 가령을 달려와 말씀을 듣고 다시 밤길 두 시간을 달려 돌아가야 하니 지극한 마음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싶었다.


대부분은 오지에 있는 작은 교회들, 모두가 또 하나의 단강이라 여겨졌다. 그래서 그랬을까, 말씀을 나누는 마음이 남달랐다. 그야말로 우리들의 이야기로 여겨졌다. 그것은 말씀을 듣는 이들도 그랬고, 말씀을 전하는 나도 그랬다.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의 경계가 사라진, 드문 경험을 한 셈이었다.

 

지역을 중심으로 식사를 하게 되어 한 시간 이상을 달려 점심을 먹기도 했다.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사랑하는 목회자들이 많아 배울 것이 많았다. 듣는 이야기마다 범상치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마지막 날은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농암 이현보 선생의 집인 농암종택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목이기도 했거니와 강사에게 잘 어울리는 곳일 것 같다며 지방 목회자들이 꼭 보여주고 싶어 하던 곳이기도 했다.


첩첩산중, 들어가는 길 자체가 너무도 아름다웠다.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드라마를 촬영한 곳이기도 했단다. 퇴계 이황이 거닐었던 길이 ‘예던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어, 언제 한 번 찬찬히 걷고 싶다는 바람을 아름다운 풍광을 담듯 설레는 마음으로 담아두기도 했다.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있는 농암종택은 원래의 자리가 아니었다. 본래 있던 곳은 분천마을, 1976년 안동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면서 안동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던 종택과 사당, 긍구당(肯構堂)을 영천이씨 문중의 종손 이성원 씨가 한 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

 

새롭게 농암종택이 들어선 ‘가송리’는 그냥 생긴 이름이 아니었다. ‘佳松’, 아름다운 소나무의 마을이었다. 가송리의 협곡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은 낙동강 700리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라 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강물을 따라 병풍처럼 둘러선 단애(斷崖), 푸른 빛 가득한 소나무와 은빛 모래가 빛나는 강변, 감탄이 아깝지 않은 절경 속에 절경을 거스르지 않는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모든 것이 아름답다며 감탄을 하자 동행을 했던 호대원 목사님이 내게 말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지역 곳곳에 서린 정신적인 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목사님이었다.


“이곳도 아름답지만 실은 옮기기 전의 본래 자리가 훨씬 더 아름다웠다고 해요.”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 어디 있을까 싶은데, 호 목사님은 강 건너편 산 중턱쯤을 가리키며 한 마디를 더 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도 아름답지만, 저곳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더 아름다워요.”

 

맞은편에서 바라보면 더 아름다운, 우리가 평생 꿈꿔야 할 삶이 그 한 마디 속에 다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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