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88)

 

욥의 세 친구를 위한 변명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은, 욥이 이 모든 재앙을 만나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욥을 달래고 위로하려고, 저마다 집을 떠나서 욥에게로 왔다. 그들이 멀리서 욥을 보았으나, 그가 욥인 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한참 뒤에야 그가 바로 욥인 줄을 알고,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또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으면서도, 욥이 겪는 고통이 너무도 처참하여, 입을 열어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욥기 2:11-13)

 

욥의 세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 이들은 욥과의 논쟁에서 맡은 역할 때문에 어느 정도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우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욥이 큰 시련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주저 없이 달려왔다. 욥을 외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쁘다거나, 거리가 멀다거나, 비용이 많이 든다거나, 가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멀리서 욥을 보았지만 처음에는 욥인 줄 알아보지도 못했다. 한참 뒤에야 그가 바로 욥인 줄을 알고는,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또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썼다. 마치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친구의 불행을 아파한 것이다.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서 지냈다. 편안한 집을 놔두고 사서 고생을 한 것이다. 단 하루도 고통 속에 있는 친구 곁에 머물기 어려워하는 우리로서는 감히 그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없다. 너무 기가 막혀 말이 끊긴 자리에서 그저 친구와 더불어 있는 그들의 모습은 가슴 찡한 감동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뜨거운 우정의 사람들이었다. 미국의 교육학자인 파커 파머는 한 때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꺼리면서 단절감은 더욱 깊어졌다. 그런데 친구 빌은 매일 그의 집을 찾아와서 30분 동안 발 마사지를 해주었다. 그때의 경험을 파머는 이렇게 전한다. 

 

“누군가 나를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소멸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을 경험하는 이에게는 생명을 주는 일이다.”(파커 파머,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116-7) 욥의 세 친구는 바로 그런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욥이 자신이 태어난 날을 원망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들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그들 속에 연민의 마음이 있을 때 그들은 하나였다. 하지만 종교와 신념과 사상이 끼어들자 그들의 관계는 파괴되었다. 벗이 겪는 고통의 가장자리에 가만히 있어줄 때 그들은 우정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해석의 욕망이 작동하는 순간 그들은 판관이 되었다. 판관이 있는 곳에서 우정은 망가지게 마련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가 늘 명심해야 할 한 말씀을 들려준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고린도전서 8:1c) 

 

그들은 인습적인 사고에 젖어 세상을 죄와 벌 혹은 원인과 결과의 도식으로 바라보았다. 욥의 세 친구는 악인도 아니고 위선자도 아니다. 무지했을 뿐이다. 세상에는 설명되지 않는 어둠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종교와 신념과 사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겪는 이들과의 깊은 연대감이 아닐까?

 

*기도*

 

하나님, 예기치 않은 시련에 직면한 이들을 만나면 할 말이 없습니다. 위로의 말이 어떤 때는 부질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과의 만남을 꺼립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욥의 친구들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불원천리하고 고통을 겪는 친구를 찾아왔고, 그의 곁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해석하려는 욕망이 끼어들 때 그들의 우정은 흔들렸습니다. 주님, 우리의 굳은 신념이나 믿음이 사람들 사이의 우정어린 결속을 깨뜨리는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아멘.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김기석의 새로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룩한 삶을 향한 열망  (0) 2019.06.03
길을 찾는 사람  (0) 2019.06.02
욥의 세 친구를 위한 변명  (0) 2019.06.01
우리가 초대해야 할 손님  (0) 2019.05.31
눈은 몸의 등불  (0) 2019.05.30
사회적 모성  (0) 2019.05.29
posted by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50)

 

하마터면  
 

오늘 아침에는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한 뻔했다. 새벽기도를 마친 후 목양실 책상에 앉아 있다가 창문을 통해 할머니 두 분이 예배당 마당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한 할머니의 손에 검정색 비닐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나는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 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대하기 얼마 전, 할머니 두 분이 예배당 마당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두 사람은 예배당 앞 화단 쪽으로 갔다. 할머니들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예배당 화단에 심어 놓은 꽃을 누군가가 캐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귀한 꽃을 골라 캐간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싶었고,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고심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검은 비닐봉투를 들고 예배당 마당으로 들어서는 이가 있으니 어찌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유심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파고라 아래 벤치에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할머니들은 이야기를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리고는 다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할머니들의 나중 모습만 보았다면, 마당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돌아서는 한 할머니의 손에 검정 비닐봉투가 들려 있는 모습만 보았다면,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을 것이다.

 

달려 나가 할머니를 만나 봉투 속에 꽃이 담겨 있을 것이라 지레짐작을 하며 비닐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여쭸을 것이었다. 아무리 점잖게 이야기를 한다 할지라도 교회의 담임목사가 그렇게 생각하고 묻는다는 것은 할머니들께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될 일, 온 동네에 소문이 날 일, 치명적인 실수를 할 뻔 한 것이었다.

 

‘도둑을 맞으면 어미 품도 들춰 본다’는 속담이 있다. 도둑을 맞은 사람 눈에는 모든 이들이 다 도둑처럼 보인다. 모두가 수상쩍기 마련이다. 세상은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법이어서 선한 마음으로 보면 믿지 못할 사람이 없고, 의심하는 마음으로 보면 믿을 사람이 없는 법이다.

 

오늘 아침, 하마터면 나는 어미 품을 들춰볼 뻔 했다.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답장  (0) 2019.06.03
하나님의 천칭  (0) 2019.06.02
하마터면  (0) 2019.06.01
어느날의 기도  (0) 2019.05.31
짐승 같은 이들이 발견한 아름다운 슬픔  (0) 2019.05.30
그래서 어렵다  (0) 2019.05.29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