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108)

 

우리가 인간의 대표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약1:26-27)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 수는 없다.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침묵이 아니라 과잉된 말이다. 사도는 그래서 혀에 재갈을 물리라고 말한다. 누군가를 교정하려는 욕망에서 발화된 말은 상대의 가슴에 상처를 내기 일쑤다. 자기기만은 영적 천박함의 뿌리이다. 떳떳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슬픈 자기 위안에 집착한다. 혀에 재갈을 물리고 자기기만을 경계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내적 태도라면, 다른 이들과 섞여 살아가는 삶에서는 경건이 어떻게 표현되어야 할까? 야고보는 그것을 매우 세속적인 방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야고보서 1:27)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과 동일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라는 명제가 성립된다. 섬김과 돌봄이 어떻게 일치될 수 있을까? 재미있는 사실은 ‘섬길 사事’가 ‘일 사事’와 같은 글자라는 사실이다. 섬기면 섬기는 대상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보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연약해진 생명을 북돋워 일으키고, 일그러진 생명을 온전케 하는 것 말이다. 세상의 모든 아픔에 개입할 수는 없더라도 지금 내 앞에 있는 이들의 요구에 응답할 수는 있지 않을까?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참 난해하다. 이 희곡은 누군지도 모르고, 언제 온다는 기약조차 없는 고도(Godot)를 기다리는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막연히 기다린다.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지루해서 쓸데없는 말장난을 해보기도 하고, 신을 벗으려고 애를 써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나무에 목을 맬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 순간 “살려달라”는 외침을 듣는다. 앞을 못 보는 포조라는 인물의 외침인데, 그 소리를 듣고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인 블라디미르는 고민 끝에 에스트라공에게 말한다.

 

“공연한 얘기로 시간만 허비하겠다. (사이. 열띤 소리로) 자, 기회가 왔으니 그 동안에 무엇이든 하자. 우리 같은 놈들을 필요로 하는 일이 항상 있는 건 아니니까. 솔직히 지금 꼭 우리보고 해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다른 놈들이라도 우리만큼은 해낼 수 있을 테니까. 우리보다 더 잘할 수도 있을걸. 방금 들은 살려달라는 소리는 인류 전체에게 한 말일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우리들뿐이니 싫건 좋건 그 인간이 우리란 말이다.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그 기회를 이용해야 해. 불행히도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이번 한 번만이라도 의젓하게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가 돼보자는 거다.”

 

살려달라는 포조의 외침은 특정한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둘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싫건 좋건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베케트는 삶의 무의미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누군가를 돌보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누구를 돌보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을 때이다.

 

*기도*

 

하나님, 남을 속이기는 어려워도 자기를 속이기는 참 쉽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들 수 없는 핑계는 차고도 넘칩니다. 자기 연민에 빠진 영혼은 값싼 위안을 구할 뿐, 공적인 책임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지 않습니다. 복잡한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감각과 무관심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들의 삶의 자리에 다가서지 못합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아픔에 반응할 줄 아는 따뜻한 심성을 우리 속에 창조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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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73)

 

그끄저께와 그글피

 

김중식의 시를 읽다가 ‘그끄저께’라는 말을 만났다. 그끄저께라는 말은 마치 광 속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가 우연히 나타난 것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먼지를 닦아내듯 생각을 가다듬자 이내 익숙한 표정을 지었다. 어릴 적 어렵지 않게 쓰던 말이었다.


사전에서는 그끄저께를 ‘그저께의 전날. 오늘로부터 사흘 전을 이른다.’고 설명한다. 재재작일(再再昨日), 삼작일(三昨日)이라는 유의어도 있는데, 한문이라 그런지 영 낯설다.


손가락을 꼽듯 ‘오늘’부터 하루씩을 거꾸로 불러본다. 오늘-어제-그끄제(그제)-그끄저께(그끄제), 마치 신나게 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새로운 놀이를 위해 줄을 서듯 아무 혼란도 없이 시간이 한 줄로 늘어선다.

 

 

 

 


재미있다 싶어 이번엔 하루씩 앞으로 가보기로 한다. 오늘-내일-모레-글피-그글피, 오늘 앞으로도 제법 줄이 길다. 맞다, 우리가 하던 말 중에는 그글피도 있었다. 그글피는 글피의 다음날, 오늘로부터 나흘 후를 이르는 말로, 어릴 적 우리들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글피로 정해지기도 했다.

 

‘오늘’을 중심으로 하루씩을 앞뒤로 부르고 나니 각각의 하루가 빙긋 웃는 듯하다. 오랜만에 나를 부르네, 하는 투다. 그끄제, 그끄저께, 글피, 그글피, 오랜만에 되뇌는 말들은 입 안과 기억 속을 정겹게 구른다. 마치 고향의 뒷산 잔디가 곱게 자란 경사진 산소를 데굴데굴 굴러 내리는 것 같다.


이어지는 생각이 있다. 하필이면 ‘내일’이라는 우리말이 없는 것일까? 설마 희망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 터, 본디 없지는 않았을 터, 언제부터 왜 잃어버린 것일까? 있었다면 당연히 그 말을 찾아내든지, 혹시라도 없었다면 지금이라도 살려내든지 해야 할 것 아닌가.


요즘은 왜 그끄저께나 그글피와 같은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3일 전이나 4일 후처럼 시간을 숫자로 대신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기억이나 꿈의 한계가, 시간에 대한 인식의 범위가 좁혀진 탓일까…

 

그러고 보니 그끄저께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떠오르질 않는다. 그글피에 어떤 약속이 있는지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우리는 그끄저께와 그글피를 잃어버린 채 좁다란 시간 속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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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71)

 

 어느 예배당이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지 않을까만

 

환우들의 회복을 위한 특별새벽기도회를 마치는 날, 중풍병자를 고치신 말씀을 나눴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과, 병을 고치시기 전 죄 사함을 먼저 선포하심으로 병의 근원을 고치신 은총을 생각했다.


몸과 마음의 병을 깨끗하게 고쳐주시든, 바울처럼 몸의 가시를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주셔서 내가 약할 때가 곧 강할 때임을 일러주시든, 더 이상 병이 나를 짓누르지 못하도록, 병의 사슬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은총 내리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비록 우리의 기도가 요단강에서의 한 번의 목욕에 해당할지라도 하나님의 시간을 신뢰하며 나머지 기도를 간절함으로 이어가자고 권면을 했다.


예배를 마치고 기도를 드리는 시간, 환우들을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아래 제단에 기도대를 놓고 환우들이 나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앞에 섰고, 좌우에 두 부목사가 섰다. 평소 새벽기도회와는 달리 모두 가운을 입었고, 신을 벗었다. 우리의 부족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주님의 사랑과 긍휼과 능력을 허락해 달라 기도를 드리고 교우의 머리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무릎이 아파 무릎을 꿇을 수 없는 교우들은 기도대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기도를 이어갈 때였다. 대부분의 교우들은 말없이 기도를 받았는데, 권사님 한 분이 울먹이며 이야기를 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용기를 내어 나왔다며 자신을 보고 아픈 이를 고쳐주시기를 구했다. 몸이 아파 장기간 요양 중인 권사님 이름을 말하며, 기도는 자신이 받되 은총은 그 권사님께 임하기를 구했다. 마음이 뭉클했다. 드리는 기도가 더욱 간절했다. 많은 교우들이 기도를 받았고, 어느새 온몸은 땀으로 젖었다. 교우들을 위해 간절함으로 드리는 기도, 마른 막대기가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시간이었으니 감사한 시간이었다.

 

제단에 남아 기도를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려는데, 예배당 뒤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었다. 그는 예배당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기도를 청했다. 주님은 아시리라, 지금까지 걸어온 눈물어린 걸음과 지금의 형편과 사정을. 예배당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받는 이도, 손을 얹어 기도를 드리는 이도 모두 눈물에 젖었다.

 

어느 예배당이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지 않을까만 간절함이 더욱 가득한 아침, 기도를 들으시고 눈물을 보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아픔을 가없는 사랑의 품으로 품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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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70)

 

그리움이 담긴 다리

 

영주에서 말씀을 나누던 둘째 날 점심을 안동에서 먹었다. 경북북지방은 네 개의 시와 여섯 개의 군이 모여 이루어져 있어 굉장히 광범위했다. 마침 우리가 찾은 곳이 월영교 앞, 점심을 먹고는 월영교 주변을 산책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월영교(月映橋)는 2003년에 개통된 387m 길이의 다리로, 국내에서는 가장 긴 목책 인도교이다.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월영대를 옮겨온 사연과, 월곡면(음달골)이라는 지명을 참고로 해서 시민들이 지은 이름이란다. 달빛이 비치는 다리라니, 다리의 모양도 이름도 시적이다 싶었다. 다리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월영정(月映亭)은 강물과 바람과 햇살이 맘껏 어울리는 곳, 난간에 둘러앉아 정담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게 정겨워 보일 수가 없었다. 밤에 그곳을 찾아 달과 강물이 어울리는 모습을 바라보면 얼마나 그윽할까 싶었다.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었지만 월영교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월영교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다리였다. 조선 중기 원이엄마와 그 남편 사이의 숭고한 사랑을 간직한 다리였던 것이다. 먼저 간 남편을 위해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아 한 켤레의 미투리를 지은 지어미의 애절하고 숭고한 사랑을 담아서, 다리를 미투리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아 미투리를 만들면 먼저 떠난 남편이 그 신을 신고 꿈에라도 한 번 찾아오지 않을까 빌었던 것 아닐까? 한 올 한 올에 담은 그리움의 깊이는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까? 그런 지극한 사랑과 그리움이 담긴 다리이니 세상 어느 다리가 월영교보다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다리를 건너는 마음에도 그리움이 물드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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