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그끄저께와 그글피

by 한종호 2019. 6. 22.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73)

 

그끄저께와 그글피

 

김중식의 시를 읽다가 ‘그끄저께’라는 말을 만났다. 그끄저께라는 말은 마치 광 속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가 우연히 나타난 것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먼지를 닦아내듯 생각을 가다듬자 이내 익숙한 표정을 지었다. 어릴 적 어렵지 않게 쓰던 말이었다.


사전에서는 그끄저께를 ‘그저께의 전날. 오늘로부터 사흘 전을 이른다.’고 설명한다. 재재작일(再再昨日), 삼작일(三昨日)이라는 유의어도 있는데, 한문이라 그런지 영 낯설다.


손가락을 꼽듯 ‘오늘’부터 하루씩을 거꾸로 불러본다. 오늘-어제-그끄제(그제)-그끄저께(그끄제), 마치 신나게 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새로운 놀이를 위해 줄을 서듯 아무 혼란도 없이 시간이 한 줄로 늘어선다.

 

 

 

 


재미있다 싶어 이번엔 하루씩 앞으로 가보기로 한다. 오늘-내일-모레-글피-그글피, 오늘 앞으로도 제법 줄이 길다. 맞다, 우리가 하던 말 중에는 그글피도 있었다. 그글피는 글피의 다음날, 오늘로부터 나흘 후를 이르는 말로, 어릴 적 우리들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글피로 정해지기도 했다.

 

‘오늘’을 중심으로 하루씩을 앞뒤로 부르고 나니 각각의 하루가 빙긋 웃는 듯하다. 오랜만에 나를 부르네, 하는 투다. 그끄제, 그끄저께, 글피, 그글피, 오랜만에 되뇌는 말들은 입 안과 기억 속을 정겹게 구른다. 마치 고향의 뒷산 잔디가 곱게 자란 경사진 산소를 데굴데굴 굴러 내리는 것 같다.


이어지는 생각이 있다. 하필이면 ‘내일’이라는 우리말이 없는 것일까? 설마 희망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 터, 본디 없지는 않았을 터, 언제부터 왜 잃어버린 것일까? 있었다면 당연히 그 말을 찾아내든지, 혹시라도 없었다면 지금이라도 살려내든지 해야 할 것 아닌가.


요즘은 왜 그끄저께나 그글피와 같은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3일 전이나 4일 후처럼 시간을 숫자로 대신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기억이나 꿈의 한계가, 시간에 대한 인식의 범위가 좁혀진 탓일까…

 

그러고 보니 그끄저께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떠오르질 않는다. 그글피에 어떤 약속이 있는지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우리는 그끄저께와 그글피를 잃어버린 채 좁다란 시간 속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