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에게는 거절할 손이 없다

  •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08.31 08:46
  • 짧은 글을 눈여겨 읽으시니 고맙습니다.

    한희철 2019.09.02 07:02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3)

 

꽃에게는 거절할 손이 없다

 

예배당 입구 담장을 끼고 있는 공터에 키 큰 해바라기가 서 있다. 코스모스와 잡초가 자라는 공터에서 가장 키가 큰 해바라기가 담장 너머 세상을 구경하듯, 예배당을 찾는 사람들을 바라보듯 삐쭉 서 있다.


언제부턴가 나팔꽃이 해바라기를 타고 자라 올랐다. 돌돌 해바라기를 휘감으며 조금씩 자라 오르더니 마침내 해바라기 꼭대기에 이르렀다.

 

 

 

 


꽃에게는 손이 없다. 거절할 손이 없다. 사나운 비가 오거나 거센 바람이 불어도, 나비가 찾아오든 벌이 찾아오든 꽃은 한결같은 표정이다. 모두를 받아들일 뿐이다. 


해바라기도 마찬가지여서 자신의 몸을 휘감고 오르는 나팔꽃을 거절하지 않았다. 나라면 뱅뱅 어지러웠지 싶고 숨이 막혔을 것 같은데, 해바라기는 싫다는 표정 없이 나팔꽃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었다.


해바라기와 나팔꽃은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 밤새 내리는 이슬을 함께 맞으며 어찌 나눌 이야기가 없었겠는가.


마침내 해바라기를 타고 오른 나팔꽃은 자주색 꽃을 피우고, 나팔꽃을 몸에 두른 해바라기는 노란색 꽃을 피웠다. 해바라기와 나팔꽃이, 노란색과 자주색이 어울린다. 꽃에게는 거절할 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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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박다

  •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글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08.31 08:43

김기석의 새로봄(173)

 

뿌리를 박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그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을 굳게 하여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골로새서 2:6-7)

 

‘나는 믿습니다’라는 뜻의 라틴어 ‘크레도credo’는 ‘심장을 바친다’는 뜻의 ‘코르도’에서 나온 말이다. 코르도는 영어로 용기를 뜻하는 ‘courage’의 어원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우리의 의지, 생각, 감정보다 더 깊은 생의 중심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이다. 우리는 믿는 사람인가? “믿는다는 말이나 믿는다는 확신만으로는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행동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다.”(게리 하우겐, 『정의를 위한 용기』, 78쪽)

 

신앙고백을 행동으로 옮길 때 비로소 믿는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입술로는 주님을 시인하면서도 삶으로는 그 분을 부인하거나 배신할 때가 많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도우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사도는 주님 안에서 살아간다는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여러분은 그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을 굳게 하여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골로새서 2:7)

 

 

 

 

‘뿌리를 박는다’는 말을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1968년에 작고한 김수영 시인의 <거대한 뿌리>라는 시이다. 그는 진창처럼 더러운 역사일망정 이 땅에 굳게 뿌리를 내리겠다고 다짐하면서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기둥도/내가 내 땅에/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이라고 노래한다. 젊은 시절 이 시구와 만났을 때 가슴이 뛰었다. 우리를 힘들게 하던 역사에 대해 속상해하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검질김과 당당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린 채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 아무리 척박해도 예수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려는 절박함 혹은 열정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뿌리를 박은 사람이라야 세우심을 받을 수 있다. 세우심을 받는다는 말은 정신적으로 든든하게 되어 주체적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참으로 믿는 사람은 자기 속에 기둥과도 같은 것이 박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유혹의 바람, 박해의 바람이 거세게 불면 가끔 흔들릴 수는 있어도 결코 무너지지는 않다. 뿌리를 내리고, 세우심을 입은 사람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대로 살아간다. 우리는 일쑤 주님의 가르침을 우리의 욕망에 따라 왜곡하거나 축소시키곤 한다.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제거하고 매끈매끈하게 만든다. 그래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다. 하지만 그건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란 심장을 바치는 것이다. 이 믿음 안에 있을 때 우리 삶은 든든해진다.

 

*기도

 

하나님, 인간은 뿌리가 없어 불편합니다. 대지에 깊이 뿌리를 박지 못했기에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삽니다. 그러나 높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풍란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에 뿌리를 내린 채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부평초처럼 세상 물결에 따라 흔들리는 삶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린 채 흔들림없는 발걸음으로 진리를 향해 걸어가도록 우리를 꼭 붙들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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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2)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정릉교회는 8월 한 달 동안 속회방학을 한다. 무더위도 무더위지만, 재충전의 의미에 더 가깝다.

 

방학 기간에 갖는 프로그램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힐링 콘서트로 수요일 저녁예배 시간에 콘서트를 연다. 올해에는 ‘좋은날 풍경’ 박보영 집사님과, 성악을 전공하고 목회자 아내의 길을 걷는 있는 황은경 사모님, 산청 지리산 자락에서 사목 활동을 하고 있는 성요한 신부님을 초청하여 음악회를 열었다. 평소에는 대하기 힘든 신앙과 삶에 대한 새로운 결과 마음들, 세상을 이런 눈으로 바라볼 수도 있구나 하는 마음을 전해준 신선한 감동의 시간이었다.

 

 

 

 

방학 기간에 갖는 또 하나의 프로그램은 책읽기이다. 책을 한 권 정해서 다함께 읽는다. 책을 구입하여 속별로 한 권씩을 전하고, 방학 기간 동안 돌아가며 읽는다. 올해 정한 책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었다. 책을 읽은 뒤엔 독후감을 쓰도록 권하는데, 교우들이 어떤 마음으로 책을 읽었을 지가 궁금했다. 대부분이 손으로 꾹꾹 눌러서 쓴 글들, 교우들이 정성껏 쓴 독후감을 대하니 함께 좋은 책을 읽는 것이 참으로 즐겁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독후감을 읽는 내내 덩달아 영혼이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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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조차 품어 안는 사랑

  •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자녀에게 줄 빵을 왜 개에게 준것인가요 ?

    이진구 2019.08.30 08:52

김기석의 새로봄(172)

 

모욕조차 품어 안는 사랑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마침,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그 지방에서 나와서 외쳐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간청하였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나아와서, 예수께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여자가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복음 15:21-28)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벌이신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들어가셨다. 고요함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러나 고요함에 대한 갈망은 성취되지 않았다.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찾아와 귀신에 들려 괴로워하고 있는 자기 딸을 도와달라고 외쳤던 것이다. 예수님은 짐짓 모른 척하셨다. 절박했던 여인은 더욱 크게 외쳤다. 오죽하면 제자들이 여인을 달래 돌려보내는 게 좋겠다고 하였을까. 무릎을 꿇고 도움을 청하는 여인을 보면서도 주님의 반응은 냉랭하기 이를 데 없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복음 15:26) 

 

뜻밖의 반응이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놀란다. 이 말을 하신 분은 우리가 알던 그분이 아닌 것 같다. 누구보다도 가련한 이들을 따뜻하게 배려하고, 그들의 아픔을 마치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셨던 예수님이 아니신가. 예수님의 반응은 낯설 뿐만 아니라 불친절하고 잔인하기까지 하다. 이 예기치 않은 반응을 두고 신학자들은 예수님을 변호하기 위해 애쓴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반응을 보이신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고, 예수님은 이미 여인의 믿음을 알아보셨지만, 여전히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그런 반응을 보이셨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정말 그런 것일까?

 

 

 

 

여인은 모욕을 당했다. 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하는 ‘개’라고 지칭되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도 국수주의자처럼 보인다.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노골적이었기에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에도 어떤 긴장감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고통을 안고 찾아온 여인이 종교와 인종의 장벽에 막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긴장된 대치를 깨뜨린 것은 여인이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마태복음 15:27)

 

모욕을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관계는 단절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여인의 절박함은 자존심을 훨씬 넘어섰던 것 같다. 여인은 그 모욕적인 말과 상황을 그냥 자기 품으로 부둥켜 안아버린다. 이 여인이 거절에 노여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딸의 고통으로 인해 겪어온 인고의 세월이 준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긴장이 해소되면서 자유의 공간이 생겼다. 여인의 말은 예수님께 깊은 인상을 남겼음에 틀림없다.

 

여인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문제에 몰두해 있던 예수님을 구체적인 한 존재, 곧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한 사람에게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고통은 인종, 피부색, 문화, 정치 체계, 종교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을 하나로 이어주는 인류 공통의 경험이다. 고통이야말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대의 끈이다. 여인은 그런 사실을 가리키는 기표로 우리 가운데 서 있다.

 

*기도

 

하나님,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런 모멸감을 견딜 수 있었을까요? 박두진 시인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묵상하면서 “뜨물 같은 치욕을, 불붙는 분노를, 에어내는 비애를, 물새 같은 고독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작은 손해에도 분노하고, 작은 모멸감에도 바들바들 떠는 우리들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존심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그 사랑의 빛 안에서 사람과 세상을 보며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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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욕(無所有慾)

  • 무소유가 어떤 재화의 있고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소유를 했더라도 그것들이 언제든지 나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마음 가짐이 바로 무소유의 참 뜻이라고 합니다.

    정운식 2019.08.29 12:57
  • 네,
    공감합니다.

    한희철 2019.08.29 16:35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1)

 

무소유욕(無所有慾)

 

책을 주문하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책을 내가 다 읽을 수 있을까?


옷을 입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지금 지니고 있는 옷을 내가 다 입을 수 있을까?


음악을 듣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음반을 내가 다 들을 수 있을까?

 

 

 

 

 

 

오래 전 내게 ‘무소유욕’이란 말을 들려준 이가 있다. 나를 보면 그 말이 떠오른다는 것이었는데, 그런 마음으로 살라는 격려로 새겼다. 소유욕은 본능적이지만, 무소유욕은 본능을 역행한다. 거대한 흐름을 거스른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자연스럽지도 않고 쉽지도 않은 일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온갖 소유욕을 버릴 수 있다면, 마침내 무소유욕까지 버릴 수 있다면, 그래서 그냥 훌훌 가벼울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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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장이 집에서

김기석의 새로봄(171)

 

토기장이 집에서

 

그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아, 내가 이 토기장이와 같이 너희를 다룰 수가 없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듯이, 너희도 내 손 안에 있다. 내가 어떤 민족이나 나라의 뿌리를 뽑아내거나, 그들을 부수거나 멸망시키겠다고 말을 하였더라도, 그 민족이 내가 경고한 죄악에서 돌이키기만 하면 나는 그들에게 내리려고 생각한 재앙을 거둔다. 그러나 내가 어떤 민족이나 나라를 세우고 심겠다고 말을 하였더라도, 그 백성이 나의 말을 순종하지 않고, 내가 보기에 악한 일을 하기만 하면, 나는 그들에게 내리기로 약속한 복을 거둔다.”(예레미야 18:5-10)

 

예레미야는 자기 직무로부터 달아날 생각은 없었지만 좀 지쳤다. 그 때 하나님이 그에게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라고 명하신다.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에 가서 그가 그릇을 빚는 모양을 유심히 지켜본다. 토기장이는 좋은 흙을 떠다가 체로 거르고, 물을 뿌려 질흙으로 만들고, 그것을 물레 위에 올려놓고,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질흙에 형상을 부여했다. 그런데 토기장이는 그릇을 빚다가 잘 되지 않으면 흙을 뭉개서 다른 그릇을 빚곤 했다. 토기장이가 마음에 그린 형상과 질료인 질흙이 절묘한 조화를 이룰 때 그릇 하나가 완성되었다.

 

이윽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 “이스라엘 백성아, 내가 이 토기장이와 같이 너희를 다룰 수가 없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듯이, 너희도 내 손 안에 있다.”(6절)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에 안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택하시는 까닭은 그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선택은 철저히 하나님의 자유이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이 누군가를 부르시는 까닭은 그에게 맡기실 일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땅에 사는 모든 민족에게 복을 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불러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이 음란하고 악한 세대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그루터기가 되어야 한다. 신영복 선생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가을에 사서 징역살이하던 방에 걸어두었던 마늘을 이듬해 봄에 껍질을 벗기다가 느낀 것을 적었다. 

 

“마늘 한 통 여섯 쪽의 겨울을 넘긴 모습이 가지가지입니다. 썩어 문드러져 냄새나는 놈, 저 하나만 썩는 게 아니라 옆의 쪽까지 썩게 하는 놈이 있으며, 새들새들 시들었지만 썩기만은 완강히 거부하고 그나마 매운 맛을 간신히 지키고 있는 놈도 있으며, 폭싹 없어져버린 놈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마늘 본연의 생김새와 매운 맛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흐뭇하게 하는 것은 그 속에 싹을 키우고 있는 놈입니다. 교도소의 천장 구석에 매달려 그 긴 겨울을 겪으면서도 새싹을 키운 그 생명의 강인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초록빛 새싹을 입에 물고 있는 작은 마늘 한 쪽, 거기에 담긴 봄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돌베개, 1998, 365쪽) 

 

그 혹독한 겨울 추위를 견디고 기어이 싹을 틔우고 마는 마늘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처럼 여겨진다. 작은 마늘 쪽에 담긴 봄처럼, 이 엄혹한 세상에 성도들은 봄소식이 되어야 한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이, 너희도 내 손 안에 있다.” 두려운 말씀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 해도 썩어 문드러지면, 그래서 주변까지도 썩게 하면 하나님은 그를 버리실 것이다.

 

*기도*

 

하나님, 에덴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만족을 모릅니다. 마음에 깃드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나 그 분주한 발걸음이 우리를 인도하는 곳은 또 다른 공허 혹은 혼돈일 뿐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누군가를 원망합니다. 원망할 대상이 없으면 하나님께 눈을 흘기기도 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주신 삶의 분깃을 소중히 여기면서 기뻐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빚어주신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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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네 믿음을 혼동하지 말라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0)

 

나와 네 믿음을 혼동하지 말라

 

철원동지방 연합성회에 말씀을 나누러 왔다. 오는 길이 2년 전 DMZ를 홀로 걷던 길이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머물고 있는 숙소 또한 그때 지나간 길에 서 있었다.

 

나흘간의 집회로 모이는데, 저녁에만 모인다. 정릉과 거리가 가깝다면 얼마든지 오가도 좋을 터이지만, 그럴만한 거리는 아니다 싶다.


선교부 총무에게 이야기를 하여 식사는 저녁에만 하기로 했다. 그래도 되는 일이라면 강사에게 신경을 덜 쓰게 하는 것이 담당자를 돕는 일이 될 때가 있다.

 

낮시간을 더없이 편하게 보낸다. 쉬기도 하고, 책도 보고, 산책도 한다. 책을 두 권 챙겨왔는데, 그 중의 한 권이 <바이올린과 순교자>다.


책을 읽으며 이렇게 밑줄 안 긋기가 어려운 책도 드물 것이다. 빨리 읽고 싶지 않은, 빨리 읽을 수가 없는 내용들이다. 마치 가문비나무가 자라는 속도로 읽어야 글의 속내를 따를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어제는 책을 읽다가 그 대목에 이르러 책을 덮었다. 더 읽을 수가 없었다. '믿음에 해가 되는 것은 의심이 아니라, 의심이 조금도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바라는 욕심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하느님의 존재가 결여될 때, 의심은 거룩한 힘을 발휘합니다. 소중한 의식이 사랑 없는 틀에 박힌 의례가 될 때,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 종교적 익숙함이 스며들 때, 과정을 통해 배우기를 중단하고 경직된 생각의 집 안에 둥지를 틀고 들어앉을 때, 믿는다고 말하면서 정작 하느님을 막아서고 그 결과를 종교라 부를 때, 의심은 거룩한 권위로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불안을 일으키는 의심이 없다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하느님을 잃어버리게 될 테니까요.'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믿음이 실제로는 얼마나 위험하고 불안한 것인지를 이야기 한 뒤에 이어진 문장이었다.

 

「이럴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나와 네 믿음을 혼동하지 말라." 하고 말합니다. 때로 의심은 하느님의 메신저가 되어, 비록 아프고 힘든 방식이지만,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그런 경우 하느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의심입니다.」

 

"나와 네 믿음을 혼동하지 말라."는 말이 벼락처럼 다가왔다. 책을 덮고 길을 나선 것은 그 문장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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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뜯지 말라

김기석의 새로봄(170)

 

헐뜯지 말라

 

형제자매 여러분,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자기 형제자매를 헐뜯거나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헐뜯고 율법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율법을 심판하면, 그대는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을 제정하신 분과 심판하시는 분은 한 분이십니다. 그는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심판합니까?(야고보서 4:11-12)

 

사람 사는 곳에 갈등이 없을 수 없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마르틴 루터는 교회를 가리켜 ‘거룩한 창녀’라 했다. 거룩을 지향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옛 삶의 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의 모임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는 좋아하고, 누군가는 싫어한다. 어떤 사람은 구구절절 옳은 말을 하지만 사람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기도 한다. 이성적으로는 납득하면서도 감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게 사실이다. 교회처럼 말이 많은 곳이 또 있을까? 문제는 수군거림과 비방이 공동체의 일치를 해친다는 사실이다. 초대교회도 그런 문제에 직면했던 것 같다.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오죽하면 이런 말을 할까?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어도 어떤 이들의 말이나 처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때가 왜 없겠는가?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래?’ 하지만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가 그렇게 처신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이들의 삶의 자리에 서 보지 않은 채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밀양의 한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던 이계삼 선생이 어느 잡지에 쓴 글을 참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세 종류의 교사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바라보는 교사이다. 그가 학생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단순하다. 공부를 한다/하지 않는다, 단정하다/너저분하다, 교사의 지도에 긍정적이다/부정적이다. 그들은 교단에서 받은 인상으로 학생들을 평가한다. 둘째는 아이들이 앉은 자리로 찾아가는 교사이다. 그 자리에 가면 사나울 것 같았던 아이의 천진한 모습도 보게 되고, 모범생처럼 보였던 아이의 자폐적인 내면을 보게도 된다. 셋째는 교실 바깥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는 교사이다. 그들은 아이들이 속한 시공간 속에 들어가 그들과 어울린다. 그때 비로소 교사는 학생들에 대한 비교적 객관적이고 정확한 인식에 이르게 된다. 그 글을 보면서 참 많은 반성을 했다. 우리는 교단 위에서 학생들을 바라보는 교사처럼 타인을 평가할 때가 많다. 야고보의 질책이 우렁우렁 들려온다. “도대체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심판합니까?”(야고보서 4:12)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평화롭게 사는 법을 익히라고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서로 함께’ 북돋는 관계를 통해 우리는 악마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 사소한 차이 때문에 불화를 겪는 것처럼 큰 낭비가 없다.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고, 서로 무거운 짐을 나눠지고, 서로 발을 씻겨줄 때 공동체는 든든히 선다. 다른 이에게 변화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변하면 된다.

 

*기도*

 

하나님, 채찍에 맞은 상처보다 더 아픈 것은 말로 맞는 매입니다. 그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다고 고백하는 이들조차 말을 함부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 살리는 말, 용기를 북돋는 말, 사랑으로 감싸는 말을 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필요할 때는 허위를 깨는 말을 하되 그 말을 듣는 이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존중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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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움이 거침을 이긴다

  • "견강은 죽음의 속성" 무슨 뜻인가요?

    이진구 2019.08.27 09:27
  • 부드럽고 약한 것이 삶의 속성이고, 견고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속성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나뭇가지를 보아도 살아있는 것은 부르럽게 휘지만, 죽은 것은 딱딱하여 부러지고 말지요.

    한희철 2019.08.29 10:13
  • 아~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이제 이해가 되네요

    이진구 2019.08.30 04:32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69)

 

부드러움이 거침을 이긴다

 

모처럼 비와 여러 날 친했다. 마음이 가문 탓인지 시간을 잊고 비와 친한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빗소리도 실컷 들었고, 빗방울도 실컷 보았고, 빗속을 실컷 달리기도 했다. 저 아랫녘에서는 적잖은 비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도 들려왔지만, 잠을 자다가 창밖으로 듣는 빗소리는 얼마나 평화로웠는지.

 

 

 

 

비 그치고 쏟아지는 햇살은 세수를 마치고 웃는 아이의 웃음 같다. 해맑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표정으로 말해준다.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어디에서 비를 피했던 것일까, 잠자리가 난다. 쏟아진 빗방울이 잠을 깨운 것일까, 저리도 가볍게 저리도 자유롭게 잠자리가 난다. 

 

유약은 삶의 속성이요 견강은 죽음의 속성, 부드러움이 거침을 이긴다. 비 온 뒤 자유로운 비행으로 잠자리가 들려주는 경전을 경건함으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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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곧 부자유

김기석의 새로봄(169)

 

죄는 곧 부자유

 

그러므로 동포 여러분, 바로 이 예수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죄 용서가 선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던 그 모든 일에서 풀려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됩니다.(사도행전 13:38-39)

 

성경에서 죄를 뜻하는 단어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하마르티아hamartia’이다. 이 단어의 동사형인 ‘하마르타노’는 호메로스 이후에 ‘과녁을 빗나가다’, ‘잃어버리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그러니까 죄는 과녁에 적중하지 못하는 삶, 혹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에서 벗어난 삶을 가리킨다. 우리가 인생을 걸고 겨눠야 할 과녁이 대체 무엇일까? 성경은 그것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하나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 인생의 과녁이다. 그 과녁에서 빗나가는 게 죄라면 죄인 아닌 사람이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적당히 사랑하면 안 된다.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한 끼만 굶어도 어쩔 줄 모르는 우리가 굶주린 사람을 보아도 무덤덤하게 지낸다. 

 

한자로 ‘죄(罪)’라는 단어가 참 재미있다. 그물 망(罒) 부에 잘못을 뜻하는 아닐 비(非) 자가 결합되어 있다. 망은 갇혀서 답답한 상태 곧 부자유한 상태를 상징한다. 죄는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든다. 죄의 거미줄 위에서 몸을 뒤챌수록 부자유는 더욱 심화된다. 법적인 죄를 범하면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과녁을 빗나가는 죄를 범하면 자기 속에 갇힌 사람이 된다. 갇힌 상태이니 사랑을 할 수 없다. 사랑은 자유를 전제로 하니 말이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 몸을 굽힐 수도 없다. 죄의 지배를 받을 때 우리는 사랑에 무기력한 사람이 된다. 

 

 

 

 

존 웨슬리는 우리가 은혜로부터 멀어져 죄로 향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그린 바 있다. 1) 먼저 유혹이 일어난다. 그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일 수도 있고, 육체나 악마로부터 오는 것일 수도 있다. 2)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죄가 가까이에 있다고 경고하면서 더 열심히 깨어서 기도하라고 명하신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즐거움을 약속하는 유혹에 어느 정도 양보한다. 4) 성령은 깊이 슬퍼하신다. 우리 믿음은 약해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차가워진다. 5) 성령은 더욱 날카롭게 경고한다. “이것이 길이다. 이 안에서 걸으라.” 6) 하나님의 음성에서 돌이켜 유혹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7) 마침내 악한 욕구가 영혼 속에 퍼져서 믿음과 사랑이 사라진다. 그러면 그는 죄의 포박에 확고히 매이게 된다(웨슬리 설교전집2, 설교 1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의 특권>, 45쪽 참고). 어김없는 우리 현실이다. 

 

예수와 만난 이들은 오랫동안 그들을 얽어매고 있던 속박에서 풀려남을 느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던 그 모든 일에서 풀려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됩니다.”(사도행전 13:39) 예수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우리는 또 다시 부자유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과녁을 빗나간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예수여, 우리를 인도하소서!

 

*기도*

 

하나님, 주님은 ‘나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지만, 우리는 보내신 분이 누구인지, 또 무엇을 하라고 보내셨는지 깨닫지도 분별하지도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지향이 분명치 않기에 삶은 가리산지리산 어지럽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보다 달콤한 유혹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가 많습니다. 넓어 보이던 길이 문득 끊어지고 아득한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아둔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너무 늦기 전에 주님의 마음을 향해 돌아서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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