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같은 열정

김기석의 새로봄(151)

 

바보 같은 열정

 

하나님의 사람은 세속에 매몰된 사람들이 보기에 낯선 존재들이다. 모두가 높은 곳을 지향할 때 낮은 곳을 지향하고, 편안하고 안락한 길을 추구할 때 불편하고 힘겨운 길을 걷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은 의심을 받게 마련이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온갖 말로 바울을 폄하했다. 사심 없는 것처럼 보여도 바울이 뭔가 꿍꿍이속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접근했을 거라든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 비해 이름 없는 사람이라든지, 가는 곳마다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 그에게 문제가 있다는 등의 모함이었다. 바울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증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8b-10)

 

그는 사심 없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했을 뿐 누구를 속여 자기 이익을 취하려 한 적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온통 성도들의 구원에 있었기에 고난을 겪으면서도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려 했다. 늘 시련의 그늘 아래 있었기에 그는 근심하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늘 기뻐했다. 질그릇 속에 담긴 값진 보화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기쁨은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다. 비행기가 지상의 인력을 떨치고 날아오르듯 우리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하나님 나라의 흐름을 타는 순간 근심은 기쁨으로 바뀐다. 바울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다른 이들을 부요하게 했다. 염려와 근심에 짓눌린 이들을 일으켜 세웠으니 말이다.

 

 

 

 

후배 목사가 제주도에서 목회할 때의 일을 들려주었다. 교인이 20명 쯤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회에 부임하고 보니 교인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몇 달 수고한 끝에 그의 교인은 다섯 명이 되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이었다. 그는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홀로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하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아들의 목회지를 찾아갔다가 그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눈시울이 시큰해져서 탄식하듯 말했다. “네가 수도원장으로 사는구나.”

 

프란체스코 성인은 새들과 동물들에게도 설교를 했다 한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느 수도자는 틈만 나면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싶어했다. 사환 노릇을 하던 젊은이가 고단한 나머지 텅 빈 들판에서 발을 멈추고는 말씀을 듣기 원하는 이들이 앞에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수도자는 열성을 다해 설교를 했다. 설교가 끝나자 돌들이 ‘아멘’ 하고 화답했다고 한다. 좋은 것을 남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어 하는 이 바보 같은 열정이 세상을 정화하지 않겠는가?

 

*기도*

 

하나님,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속에 두려움을 주입하려 합니다. 삶의 안전장치를 많이 마련해야 한다고 설득합니다. 그 설득에 넘어간 이들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축적하기 위해 자기를 착취합니다. 이웃들을 돌보거나, 그들과 삶을 경축하며 살 여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외로움은 깊어가고, 삶은 적막해집니다. 주님, 소유의 많고 적음을 떠나 항상 생의 신비를 경축하며, 다른 이들을 복 되게 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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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尖)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11)

 

첨(尖)

 

한문으로 ‘첨’이라는 글자를 써보라고 하면 난감해진다. 1) 뾰족하다 2) 성격·표현 등이 날카롭거나 각박함 3) 끝 4) 산봉우리 5) 정상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첨’자 말이다. ‘尖端’ ‘尖塔’ 등을 읽기는 했어도 따로 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尖’이라는 글자를 가만 보니 재밌다. 아랫부분이 ‘큰 대’(大)이고, 윗부분이 ‘작을 소’(小)다. 아래가 크고 위가 작으면 어떤 것이라도 뾰족하거나 날카롭기 마련, 글자가 이미 그런 뜻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요런, 귀여운 것, 글자를 향해 그동안 알아보지 못했던 아쉬움을 웃음으로 대신하는데 문득 지나는 생각이 있다. 큰 것이 아래로 들어 작은 것을 받들면 그것이 안정된 것, 큰 것들이 자꾸만 작은 것들 위에 서려고 하니 세상 어지럽고 위태한 것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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