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국과 바지락조개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23)

 

콩나물국과 바지락조개

 

전교인수련회를 잘 마쳤다. 아무 사고가 없었다는 것보다는 함께 한 시간이 의미 있고 즐거웠기에 감사한 마음이 크다. <나보다 아름다운 우리>라는 주제를 가지고 어린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전 세대가 한 자리에 모여 어색함을 지우고 벽을 허물었다. 프로그램마다 주제를 담아내어 뜻 깊은 수련회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어떤 어색함과 벽이 존재하는지를 실감하게 된 일도 있었다. 수련회를 마치는 날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전날 이야기를 한 대로 반찬 배식을 장로님들과 나와 아내가 맡았다. 매번 여선교회에서 수고를 했는데, 한 끼만이라도 수고를 하기로 했다.

 

나란히 반찬이 놓인 테이블 끝, 나는 국을 푸기로 했다. 밥과 반찬을 타가지고 오는 교우들에게 국을 퍼서 전하는 일이었다. 그날 아침에 준비된 국은 콩나물국이었는데, 콩나물국은 생각보다 푸기가 어려웠다. 콩나물이 서로 엉겨 있어 일정한 양을 담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교우들은 장로님들과 목사님이 배식을 한다며 좋아라 밥과 반찬을 받아 자리를 찾아갔다.

 

 

 


그렇게 국을 푸고 있을 때 식사를 마친 원로 권사님 한 분이 식사한 그릇을 놓아두는 곳으로 가다가 나를 찾아와 한 마디를 했다. “왜 내게는 바지락조개를 안 줬어요?” “덕분에 잘 먹었어요.” 하고 인사를 하러 오신 줄로 알았던 나는 순간적으로 두 가지 사실에 놀라고 당황했다. 반응이 너무 즉각적이어서 놀랐고, 권사님의 태도가 진지한 것에 당황했다. 

 

사실은 이랬다. 콩나물국을 담은 통 위쪽에는 띠처럼 콩나물이 모여 있었다. 띠를 헤쳐 가며 콩나물을 푸기 시작했는데, 국을 제법 푸다보니 국 아래쪽에서 바지락조개가 나타났다. 조개가 아래쪽에 가라앉아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었다. 그때부턴 콩나물과 조개를 같이 넣기 시작한 것인데, 국을 먼저 탄 권사님이 밥을 먹다보니 다른 이들 국그릇엔 권사님 그릇에는 없는 조개가 보였던 것이었다. 

 

폐회예배 설교 시간, 말씀을 나누기 전에 먼저 이야기를 했다.


“잊을까 봐 먼저 이야기를 하려고요. 오늘 아침식사를 할 때 국에 바지락조개를 드리지 못한 분들에게 죄송합니다. 콩나물국을 푸다가 나중에 바지락조개가 나왔을 때, 저도 당황했답니다.”

 

웃으며 이야기를 했고, 교우들도 웃었지만 뭔지 모를 허전함은 여전히 남았다. <나보다 아름다운 우리>라는 주제로 수련회를 은혜롭게 마치는 날, 우리는 여전히 이런 한계를 가지고 있구나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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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주의의 어리석음

김기석의 새로봄(153)

 

보신주의의 어리석음

 

그때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는,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그들이 모두 말하였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말하였다.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사람들이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는,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과 또 민란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고 말하였다. “나는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 그러자 온 백성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 그래서 빌라도는 그들에게,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한 뒤에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넘겨주었다.(마태복음 27:22-26)

 

예수님은 지도자들의 음모에 따라 빌라도에게 넘겨졌다. 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면서 제시한 죄목은 민족을 오도하고,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그리스도 곧 왕을 자칭했다는 것(누가복음 23:2)이었다. 한 마디로 선동가였다는 것이다. 예수 운동을 위험한 것으로 낙인찍기 위해 그들이 동원한 수사는 치밀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멋대로 왜곡하여 자기들이 파놓은 함정에 끼워 넣었다. 빌라도는 그런 고발에 대해 예수에게 자기 변론의 기회를 주었지만 주님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말의 부질없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이 낯선 사나이의 깊은 침묵에 당황했다. 자포자기의 심정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는 그저 고요한 침묵 속에 머물고 있었다. 칼릴 지브란은 『사람의 아들』에서 예수님을 만난 빌라도의 당혹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심문을 했지만 그는 대답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 속에는 불쌍히 여기는 빛이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자기가 내 통치자요 재판장이기나 한 것처럼.”(『사람의 아들』, 함석헌 옮김, 한길사, 137쪽)

 

 

 

 

성경은 빌라도가 예수의 침묵을 매우 이상히 여겼다고 전한다(마태복음 27:14). 여기서 말하는 ‘이상히 여겼다’는 말은 예수의 이적을 본 사람들의 반응을 전할 때 사용되던 단어이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위엄, 즉 신적인 권위를 보았던 것이다. 빌라도는 난처한 지경에 빠졌다. 예수님이 자기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면 결정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정치적인 고려와 양심의 법 사이에서 갈등했다. 유대 지도자들의 요청을 뿌리치는 일도 쉽지는 않았지만, 예수를 처벌할 생각도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사람들에게 묻는다.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는,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마태복음 27:22)

 

정치적으로 지혜로운 처신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당당하지는 못하다. 그는 그렇게 해서 자기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스스로 판단의 주체가 되지 못할 때 삶은 비루해진다. 위임된 권한을 바르게 활용하지 않음으로 당분간 권력은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역사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물을 가져다가 손을 닦으며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마태복음 27:24) 하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비겁이 벗겨지는 것은 아니다.

 

*기도*

 

하나님, 문제를 적당히 해결하고 넘어가고 싶었던 빌라도의 꿈은 좌절되었습니다. 그는 법의 권위를 세우는 데 실패했습니다.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기보다는 대중들의 시선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우리도 정의보다는 평판에 더욱 마음을 쓰곤 합니다.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바로 이런 보신주의 때문입니다. 이제는 정의와 공의가 넘실거리는 세상을 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속에 진실한 믿음의 용기를 심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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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소 한 마리 끌고 올 때에도

한희철의 하루 한 생긱(214)

 

지친 소 한 마리 끌고 올 때에도

 

책장 앞 시집이 꽂힌 곳에 섰다가 그 중 한 권을 빼들었다. 이정록 시인의 <어머니 학교>다. 언제 읽었던 것일까, 시집 첫 장에는 이런 저런 메모들이 빼곡하다. ‘어머니가 들려주는 삶의 지혜’ ‘우리말의 맛’ ‘해학’ ‘어머니와의 합일’ 등의 내용들인데, 맨 꼭대기에는 이렇게 적혔다. ‘많이 웃었고, 많이 울었던!’

 

 

 

 

가볍게 페이지를 넘기며 밑줄 친 곳을 읽다가 ‘그늘 선물’에 닿았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마라’로 시작하는 시인데, 밑줄이 쳐진 부분은 시의 맨 끝부분이다.

 

땀 찬 소 끌고 집으로 돌아올 때
따가운 햇살 쪽에 서는 것만은 잊지 마라
소 등짝에 니 그림자를 척하니 얹혀놓으면
하느님 보시기에도 얼마나 장하겄냐?

 

지친 소 한 마리 끌고 올 때에도 하느님 좋아하실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이었다. 하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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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사는 길

김기석의 새로봄(152)

 

죽어서 사는 길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의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가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요한복음 10:11-15)

 

선한 목자의 비유에서 양과 목자의 관계를 규정해주는 단어는 ‘안다’이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알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 선한 목자는 도둑과 이리로부터 양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삯꾼들은 위험이 닥치면 양떼를 포기한다. 자기를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셨다.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는 것이 그의 존재 이유였기 때문이다. 목숨을 바쳐야 할 가치를 알고 산다는 것, 참 행복한 일이 아닌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다. 어느 철학자는 죽음은 미래에 실현될 것이 확실한 단 하나의 가능성이라 말했다. 죽음은 고유할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건너뛸 수 없는 심연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치 있는 일들은 죽음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더 큰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한 이들을 통해 발생하곤 한다. 예수님도 살고 싶은 생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기 위해 생을 구걸하지 않았다.

 

 

 

 

 

 

<엘라의 계곡>이라는 영화에서 행크라는 인물은 자기를 도와주다 어려움을 겪은 경찰관의 집에 찾아가 그의 어린 아들에게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대해 들려주며 이렇게 말한다. “다윗은 자신의 공포심을 이겼어. 그래서 골리앗이 상대가 안 된 거야. 골리앗이 달려오는 데 꼼짝 않고 기다렸단다. 그게 얼마나 큰 용기인 줄 아니? 괴물하고는 그렇게 싸우는 거야. 다가오게 놔뒀다가 눈을 똑바로 보고 끝장내는 거지.”

 

예수님은 죽음의 공포와 그렇게 싸웠고 마침내 죽음의 지배를 끝장내셨다. 어떤 사람이 용기가 있다는 것은 그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현실이 없다면 어떻게 용기를 발휘할 수 있겠는가?. 육체적인 고통이나 사회적 수치를 당할 우려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에 맞서는 순간, 그 두려움은 더 이상 우리를 마비시킬 수 없다. 이게 자유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가장 큰 적인 두려움의 눈을 똑바로 보고 끝장을 냈던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인생의 패배자가 아니라 죽음에 대해 죽으신 분, 영원한 자유인이다. 문익환 목사는 <마지막 시>라는 시에서 “두 동강난 이 땅에 묻히기 전에/나는 죽는다./나의 스승은 죽어서 산다고 그러셨지./아./그 말만 생각하자./그 말만 믿자, 그리고/동주와 같이 별을 노래하면서/이 밤에도/죽음을 살자.”고 노래했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길이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죽어서 산다’는 말씀을 꼭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다.

 

*기도*

 

하나님, 자유롭고 멋지게 살고 싶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물러서곤 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불의를 보면 화를 내거나 혀를 차면서도 항거다운 항거를 하지 못하는 것은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건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소한 손해도 보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두려움의 영을 몰아내고, 자유인의 영을 심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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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는 열매보다 작다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12)

 

씨는 열매보다 작다

 

씨는 열매보다 작다. 지극히 당연하고 단순한 이 사실을 나는 단강에서 배웠다. 그것도 단강에 들어간 지 7년 여 세월이 지났을 무렵.

 

당시엔 잎담배 농사가 동네의 주된 농사였다. 농자금을 보조해 주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수매가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흙벽돌로 된 건조실이 서 있었는데, 생각 없이 바라보면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건조실은 동네에서 가장 높은 집이었다.

 

지금도 그날을 기억한다. 잎담배 모종을 밭에 옮겨 심던 날이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 일을 하는 밭을 찾아갔다. 손에 커피를 들고 있었는지는 기억에 자신이 없다. 이제 막 나비 날개만큼 잎을 펼친 모종을 내다심는 것이었다.

 

 

 


잎담배를 심는 모습을 바라볼 때 번개처럼 마음을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아, 씨는 열매보다 작은 것이구나!’ 조금 과장하면 그 순간은 깨달음의 순간에 가까웠다.


잎담배 씨는 재처럼 작아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성경에 나오는 ‘겨자씨’ 이야기를 듣고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는 겨자씨가 아니라 담배씨라고 일러준 이들도 단강의 교우들이었다. 그 작은 씨를 심으면 싹이 나고, 싹이 난 것을 모종을 하여 밭에 내다심으면 내 자리를 찾았다는 듯 잎담배는 쑥쑥 자라 마침내 어른 키를 넘는다.  

 

그렇듯 작은 씨를 심어 큰 열매를 거두는 것이었다. 세상 어디에도 큰 씨를 심어 작은 열매를 거두는 것은 없다. 무시하기 좋을 만큼 작은 것에서 의미 있는 일은 시작된다. 거창한 것, 대단한 것,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긴다면 그는 씨앗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다.

 

씨는 열매보다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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