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160)

 

냄새 혹은 향기

 

 

그러나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언제나 우리를 참가시키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어디에서나 우리를 통하여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러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냄새가 되고,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가 됩니다. 이런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2:14-17)

 

바울은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하면서도 마음은 고린도에 가 있었다. 신생교회의 위기가 그 교회를 무너뜨리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불안한 마음을 품고 마케도니아로 선교의 현장을 옮겼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소식을 듣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경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안해하던 바울의 어조가 급격히 바뀐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언제나 우리를 참가시키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어디에서나 우리를 통하여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고후2:14)

 

바울은 왜 여기서 굳이 개선 행렬이라는 수상쩍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개선 행진은 로마의 군사주의와 깊이 연루된 것이다. 로마는 이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거나, 5천 명 이상의 적을 죽이거나, 새로운 땅을 정복해 황제에게 귀속시킨 장군에게 개선 행진을 허락했다. 그는 호위대의 경호를 받으며 금빛 마차를 타고 로마의 주도로를 행진했다. 그의 부대가 획득한 전리품과 포로들이 행렬을 뒤따랐다. 사제들은 행렬을 뒤따르며 향을 피워 신들의 가호를 빌었다. 개선 행진은 원형경기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 ‘큰 원을 뜻함)까지 이어졌다. 그곳에서 포로들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이처럼 로마의 개선행렬에는 피의 냄새가 난다. 억눌린 울음소리가 섞여 있다. 사제들이 피우는 향기는 잔인한 폭력을 숨기는 역겨운 냄새였다.

 

 

 

 

그런데 어쩌자고 바울은 이런 용어를 가져다 쓰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던 것처럼, 바울은 로마의 개선 행렬과 철저히 대비되는 다른 개선 행렬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그 개선 행렬은 비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낯설었던 사람들을 벗이 되게 하는 행렬 말이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이 말을 택하여 로마 체제의 비인간성과 폭력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자기를 희생함으로 다른 이를 복되게 하는 십자가의 길을 제안한다.

 

십자가는 멸망당하는 이들에게는 죽음의 냄새(stench)이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이들에게는 생명의 향기(aroma)이다. 바울은 성도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

 

우리는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고린도후서 2:15)

 

오늘 우리는 어떤 향기를 풍기며 살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수십 년을 교회에 다녔는데도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길을 잘못 든 사람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기도*

 

하나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불안과 두려움이 늘 우리 옷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습니다. 사도는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길들여진 채 살아갑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나부끼다보니 우리 삶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닌 악취를 풍길 때가 많습니다. 이 부끄러운 악순환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맑은 영을 우리 속에 채워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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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59)

 

흙가슴으로

 

다른 죄수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서,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달고, 그 죄수들도 그렇게 하였는데, 한 사람은 그의 오른쪽에, 한 사람은 그의 왼쪽에 달았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누가복음 23:32-34)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시간, 세상은 흑암과 절망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의와 진리와 사랑과 선이 잦아들고, 악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골고다 언덕에서 군인들이 예수님의 손과 발에 쾅쾅 쳐 못을 박을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사는 사람들, 진실과 정의가 승리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의 가슴에도 대못이 박혔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한껏 조롱하던 이들은 강자의 편에 서서 자신의 용렬함과 비겁함을 숨기려 했다. 그 어둠의 시간, 야만의 시간에도 주님은 당신께 맡겨진 일을 계속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누가복음 23:34). 죽음의 문턱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은 그치지 않았다. 주님은 세상의 폭력과 미움과 비겁함과 무지함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셨다.

 

 

 

 

 

이 대목을 묵상할 때면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의 마지막 연이 떠오른다. “껍데기는 가라/한라에서 백두까지/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그 모든 쇠붙이는 가라“. 시인은 한반도에서 모든 전쟁 무기들이 사라지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절절한 평화의 염원을 담고 있는 흙가슴이라는 표현이 이채롭다. 세상의 모든 것을 품에 안아 기어이 정화시키고야 마는 흙을 닮은 마음이 바로 흙가슴일 것이다. 어느 날 외국 기자가 장일순 선생을 찾아와 물었다

 

혁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혁명이란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것이라오.” “그런 혁명도 다 있습니까?” “혁명은 새로운 삶과 변화가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 새로운 삶이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쳐 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잖아요? 새로운 삶은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이는 안 되지요.”(최성현 엮음, <좁쌀 한 알>, 156-7쪽 요약)

 

우리는 야만의 시대에 대해 분노해야 하지만, 사람들을 네 편 내 편으로 가르고, 누군가를 적으로 규정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의 길이 아니다. 불의에 치열하게 저항하면서 정의를 추구해야 하지만, 미움과 증오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주님은 하늘 군대를 동원하여 원수를 없애기보다는 당신의 몸으로 세상의 어둠을 받아들여 빛으로 바꾸는 길을 택하셨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혁명이다. 어리석어 보이고, 너무나 더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길이야 말로 생명의 길이고 평화의 길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떠오른다.  “자기의 몸을 신에게 바친 사람은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신을 믿는 사람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진리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바로 이 사실을 몸으로 증언하셨다.

 

*기도*

 

하나님,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면서도 참 어렵습니다. 상처 입은 마음은 좀처럼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모욕과 수치의 기억을 우리는 적대감으로 바꾸어 마음에 쟁여두곤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당신을 조롱하고 박해하는 무리를 용서하실 수 있었나요? 그 마음을 얻어 보려 노력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더 큰 세상과 잇댄 채 살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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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17)

 

가지나방 애벌레

 

 

가지나방 애벌레는 나뭇가지를 흉내 낸다. 새들에게 잡혀 먹지 않기 위해서이다. 자작나무에 있는 가지나방 애벌레는 자작나무 가지처럼 몸의 빛깔을 바꾸고, 버드나무에 숨은 가지나방 애벌레는 버드나무 빛깔을 띤다. 사진을 찍은 것을 보면 가지나방 애벌레는 벌레가 아니라 영락없는 가지로 보인다. 심지어는 줄무늬를 그려 넣은 인공 나뭇가지에 올려놓자 가지나방 애벌레의 피부에는 인공 나뭇가지에 그려놓은 줄무늬가 나타났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가지나방 애벌레의 눈을 가려도 같은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가지나방 애벌레는 눈으로 빛깔을 감지하여 몸의 빛깔의 바꾸는 것이 아니라, 피부로 빛을 감지해 주변 환경에 맞도록 자신의 피부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세상에, 피부로 빛을 감지하여 감지해 낸 빛깔에 자기 몸을 맞추는 벌레가 있다니.

가지나방 애벌레 이야기를 들으며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것은 한 마리 벌레는 자신의 몸으로 주변의 색을 감지하여 자신의 몸을 일치시키는데, 오늘 우리 그렇게 오랫동안 예수를 믿었다 하면서도 무엇 하나 제대로 닮은 게 보이지 않는, 결국은 애벌레만도 못한, 우리의 한심한 한계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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