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이 너무 성하다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63)

 

내 몸이 너무 성하다

 

 


 

거꾸로 걷거나 뒷걸음질을 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정록 시인의 시를 읽다가 그의 시를 모두 읽고 싶어 뒤늦게 구한 책 중의 하나가 <벌레의 집은 따뜻하다>인데, 보니 그의 첫 번째 시집이다. 첫 번째 시집을 뒤늦게 읽게 된 것이었다.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책머리에 실린 ‘서시’가 매우 짧았다. 군더더기 말을 버려 끝내 하고 싶은 말을 남기는 것이 시라면, 시인다운 서시다 싶다. 

 

다시 한 번 곱씹으니 맞다,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사람 손을 많이 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몸이 너무 성하다니! 나는 아직 세상을 잘 모른다고, 사람들 속에서 살지만 삶을 모른다고, 여전히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짧은 말 속에 자신의 한계를 겸손하게 밝힌다. 그런 표현과 단어조차 흔하고 뻔해 슬그머니 나무 이야기를 통해서. 

오히려 그런 고백이 시인을 향한 신뢰로 확장된다. 다음 장을 넘기는 마음에 설렘과 기대가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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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아닌 때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62)

 

때 아닌 때
    


1981년, 그해 가을을 잊을 수 없다. 짝대기 하나를 달고 포상 휴가를 나온다는 것은 감히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군에 입대한지 넉 달여 만의 일이었으니 그야말로 꿈같은 휴가였다. 
논산에서 훈련을 마친 뒤 자대에 배치를 받자마자 배구대표선수로 뽑혔고, 광주 상무대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여 우승을 했다. 9인제 배구였는데 나는 레프트 공격수였다. 아무리 규모가 큰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해도 이등병에게까지 휴가를 줄까 염려했던 것은 기우, 보란 듯이 3박4일간의 휴가를 받은 것이었으니 군 생활 중에 누릴 수 있는 기쁨 중 그만한 것도 드물 것이었다.

구름 위를 날아가는 것 같은 기차를 타고 올라와 수원에서 전철을 갈아타고 부곡역에 내린 나는 먼저 교회를 찾아갔다. 예배당에서 기도를 드린 뒤 목사님께 인사를 드리려 사택에 들렀다. 사모님이 나오셨는데, 나를 보더니 왈칵 눈물을 쏟으신다. 반가움과는 다른 눈물이었다. 잠시 뒤에 나오신 목사님도 마찬가지였다. 눈물부터 보이셨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더 참지를 못하고 여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요?” 질문을 받은 두 분은 당황하셨다. 모르고 왔느냐며 되물으셨다. 

막내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그렇게 들어야 했다. 나를 좋아하고 따르던, 자기도 신학을 공부해서 형을 도와 목회를 하고 싶은 꿈을 가졌던, 형이 우승을 하면 휴가를 나갈 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는 매일 밤 예배당을 찾아 기도를 드렸던, 우승을 하며 누구보다 먼저 떠올랐던, 휴가를 나오며 가장 싶었던 사랑하는 동생이었다.


사고였다. 막 입대한 내가 충격을 받을까 집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은 채 막 장례를 마친 뒤였다. 포상 휴가를 받아 기쁨으로 달려온 내게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내가 동생을 잃은 것과 어머니가 막내아들을 잃은 것은 달랐다. 비교할 수가 없는 슬픔과 고통이었다. 어머니는 당신 생의 유일한 벗을 잃었다고 했다. 그만큼 막내는 심성이 착했고 다정다감했다. 그런 어머니 앞에서 나는 눈물조차 보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를 모르겠는 시간을 뒤로 하고, 부대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그 때의 쓸쓸함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눈물에 젖은 기도를 드렸다. ‘내 것 아닌 것, 내 것이라 하지 않게 하소서.’

 


부대에서는 포병 생활과 군종 생활을 겸하여 했는데, 어느 날 말씀을 준비하다가 마가복음 11장을 읽게 되었다. 잎만 무성한 채 열매가 없었던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난히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었다.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는 구절이었다.


예수께서 베다니 지역을 지나가실 때는 유월절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6월말 7월초에 열매를 맺는 나무에게 4월에 열매를 찾는 것은 누가 봐도 부당한 일이었다. 나무 잘못이 아니라 열매를 찾는 이의 잘못이었다. 동생을 보낸 슬픔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당하게 여겨졌던 그 말씀은 이런 의미로 다가왔다. ‘주님은 때 아닌 때에 열매를 요구할 수 있는 분이구나.’

며칠 전 새벽기도 시간에 만난 본문이 같은 본문이었다. 같은 본문 앞에서 다시 한 번 동생을 떠올리게 되었다. ‘너는 멀리 떠난 것이 아니다. 이제부턴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살자’ 했던, 귀대하던 기차 안에서 가졌던 다짐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우리의 삶이란 때 아닌 때에 열매를 찾는 그분의 요구를 따라야 하는 삶이다. 시간이 우리 몫이 아닌 것처럼 항의나 원망 또한 우리 몫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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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61)

 

징검다리
    

오래 전 단강에서 보낸 시간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주보와 함께 기억을 하곤 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주보에 담았다. 땅 끝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여겨졌던 일들, 그 일을 기록하는 것은 내가 이웃에게 다가가는 한 방법이었고, 내게 허락하신 땅을 사랑하는 한 선택이었다. 고흐가 그림을 통해 땅의 사람들에게 다가갔던 것처럼, 나는 이야기를 통해 다가갔다. 주보의 이름도 <얘기마을>이었다.

지렁이 글씨로 글을 쓰면 아내가 또박또박 옮겨 썼다. 때로는 아내조차 내가 쓴 글씨를 읽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글씨를 읽지 말고 이미지를 읽으라 말하고는 했다. 그렇게 손으로 써서 만든 주보는 민들레 씨앗처럼 조용히 퍼져갔고, 700여 명의 독자가 있었다.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얼마든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믿음의 식구들이었다.

 


 

단강을 떠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서로에게 그랬다. 떠남을 얼마 앞두고 만든 주보 표지에 ‘징검다리’라는 짤막한 글을 실었다. 

내가 아니면 건너지 못한다.
나는 건너지 못한다.    

떠나는 날이 보름여 남았을 때니 단강을 떠난다는 것을 교우들은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떠나는 마음을 남기고 싶었다. 우연히 만난 옛 주보 표지에 실린 ‘징검다리’, 나는 여전히 징검다리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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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의 마귀

김기석의 새로봄(1652)

 

낙담의 마귀

 

 

내가 너에게 굳세고 용감하라고 명하지 않았느냐!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여호수아 1:9)

 

모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여호수아는 중대한 책무를 떠맡았다. 요단강을 건너(cross over)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백성들을 이끄는 것 말이다. 젊은 시절부터 모세를 모셔왔던 그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의 무게 때문에 두려웠을 것이다. 요단강은 옛 삶과 새 삶의 경계이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여호수아를 격려하셨다. “네가 사는 날 동안 아무도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여호수아 1:5). 여호수아가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늘 율법을 읽고 그 말씀을 성심껏 실천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또한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낙담의 사전적 정의는 바라거나 계획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 실망하고 맥이 풀리는 것이다. 지도자로서 여호수아가 직면해야 했던 문제가 많았을 것이다. 홀로 결단해야 하는 시간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의 몰이해로 인해 상처를 받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성숙하지 않은 대중은 비전보다는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걸 아시기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낙담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주후 360년 경 로마의 스키타이(Scythia)에서 태어난 존 카시안(John Cassian)은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은 탐식, 부정, 탐욕, , 낙심, 태만, 자만심, 교만이라는 악덕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낙담에 맞서야 할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낙담의 마귀는 영혼의 영적 관상 능력을 흐리게 하고, 선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 마귀는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아 완전히 어둡게 만들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꾸준히 성경을 읽어 유익을 얻지 못하게 하고, 형제들을 온유하고 긍휼하게 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는 온갖 종류의 일에 대한 미움, 심지어 수도 서원 자체에 대한 미움을 주입합니다. 그는 영혼의 유익한 결단을 손상시키고 인내와 끈기를 약하게 만들며, 영혼을 무감각하고 마비되게 하고, 낙심되는 생각들의 속박을 받게 만듭니다.”(<필로칼리아1>, 엄성옥 옮김112)

 

낙담을 이겨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도, 하나님 안에 소망을 두기, 성경 묵상,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기 등이다. 낙담의 마귀가 횡행할 때일수록 함께 기운을 북돋워주는 이들이 필요하다. 주님은 우리에게 지치고 낙심한 이들 곁에 다가가라고 명하신다. 어디에 가든지 함께 있겠다 하신 주님의 손을 잡고 불화와 갈등의 세계를 건너 화해와 사랑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기도*

 

하나님,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공포심을 주입합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한눈을 파는 순간 패배자로 전락할 거라는 생각이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듭니다. 경쟁에서 이길 때는 우쭐하지만 패했을 때는 주눅이 들고 맙니다. 패배의 기억은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고, 그 응어리는 돌덩이가 되어 우리를 짓누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꿈조차 잃고 맙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낙담을 떨쳐버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하신 주님의 손을 붙잡고 저 진리의 싸움터에서 용감하게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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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취를 경계하라

김기석의 새로봄(161)

 

도취를 경계하라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베소서 5:15-20)

 

 

가장 열심히, 가장 분주하게 교회생활을 하는 이들도 영적인 잠에 빠지기 쉽다. 분별력 없는 열심은 언제나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에베소서 5:15) ‘살피라는 단어는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가 영적인 잠에 빠졌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하나의 척도는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지 여부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내셨기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지금 곁에 있는 이들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주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고 신신당부한다. 늘 박해와 죽음의 위협 아래 놓여있던 초대교인들은 이 말을 아주 강력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여쭙고 또 여쭈어야 한다. 서양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인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서의 첫 마디는 들어라’(obsculta)이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귀로만 들으면 안 된다. 먼저 머리로 다음에는 온몸으로 들어야 한다. 라틴어로 순명을 뜻하는 ‘oboedientia’듣다라는 뜻의 ‘audire’와 어원이 같다. 들음은 순명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도취를 경계해야 한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에베소서 5:18) 여기서 말하는 은 좁은 의미로는 알코올 음료를 가리키는 말이겠지만, 모든 종류의 도취를 일컫는 환유換喩로 보아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사로잡아 버리는 일체의 것들 곧 술, 쾌락, 마약, 오락, 권력, 소유 등이 바로 변형된 이다.

 

 

 

 

신앙이란 깨어남이다. 지금 우리 삶이 뭔가에 도취된삶인 것을 깨달을 때 자유로운 삶이 시작된다. 자유로운 삶이 생기를 얻으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에베소서 5:18b-19)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 그 눈으로 보면 나와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기에 세상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고, 세상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된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들은 타인을 향해 자기를 개방하며 산다. 자기를 열고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맞아들일 때 우리는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기쁨을 맛본다. 신앙의 신비이다.

 

*기도*

 

하나님, 누구에게나 삶은 힘겹습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겪는 일은 한편으로는 진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늘 낯섭니다. 모든 순간에 적용되는 보편타당한 정답이 없음을 알기에 우리는 늘 고민하며 길을 모색합니다. 삶이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는 뭔가에 도취함으로 현실을 잊으려 합니다. 그것은 자학일 뿐입니다. 새로운 세상의 꿈에 사로잡혀 살도록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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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불화를 넘어

김기석의 새로봄(160)

 

자기 불화를 넘어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로마서 7:24-25)

 

오랜 세월 몸과 마음에 밴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바울은 자기 불화의 쓰라림을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로마서 7:15) 자각과 삶의 불일치, 이것은 바울만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경험이다. 바울은 자기 불화라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숨기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철저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속절없이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고백한다. 자기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고도 말한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실행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우리 속에는 악한 것에 대한 본능적 끌림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지향도 있다. 하지만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은 번번이 패배한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하나님의 뜻을 일깨워주는 율법은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만들지 못한다.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사실 이것이었다. 이런 깊은 자각이 있었기에 그는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24절)라고 탄식했다. ‘되고 싶은 나현실의 나사이의 분열 혹은 불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자기를 사로잡아 버리는 죄를 힘차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무능함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왜 무능하게 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그렇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왜곡되어(voluntas perversa) 육욕(libido)이 생겼고, 육육을 계속 따름으로 버릇(consuetudo)이 생겼으며, 그 버릇을 저항하지 못해 필연(necessitas)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쇠사슬의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쇠사슬이라고 불렀습니다-나를 노예의 상태에 강하게 붙들어 매어 놓았습니다."(성 어거스틴, <고백록>, 선한용 역254)

의지의 왜곡-->육욕-->버릇-->필연-->노예 상태로 이어지는 이 흐름을 어떻게 해야 끊을 수 있을까? 이것을 끊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죄의 종이 되어 살 수 밖에 없다. 굳게 결심을 해보아도 우리는 마치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 같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육욕에 이끌려 가곤 한다.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납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도 애써서 그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지만, 그와 대면하는 순간 마음속에 똬리 틀고 있던 화가 불쑥 튀어나와 또 다른 불화를 만들어낼 때가 많다. 감정이 이성에 통합되지 못한 결과이다. 이성과 감정 그리고 의지가 분열되어 있다. 이게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이성으로도 의지로도 통제할 수 없는 삶의 습기習氣, 죄의 지배를 벗어버리고 싶어 절규하던 바울의 어조가 바뀐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로마서 7:25a). 일렁이던 바다가 일시에 고요해진 것 같다. 돌풍이 몰아치던 하늘에서 마치 꽃비가 내리는 듯하다. 이 느닷없는 전환 속에 은총의 신비가 있다.

 

*기도*

 

하나님, 인간의 자기 불화는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인지요? ‘되고 싶은 나현실의 나의 불일치는 우리 속에 깊은 자괴감을 자아냅니다. 대개는 그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체념하고 살지만, 바울은 그 불화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 불화는 오직 주님의 은총 안에서만 극복될 뿐입니다. 주님의 은총 안에 깊이 잠길 때, 그래서 우리의 옛사람이 녹을 때 우리는 죄의 법에서 놓여나게 됩니다. 그 은총으로 육욕의 노예살이를 하는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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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감을 사는 사람들

김기석의 새로봄(230)

 

호감을 사는 사람들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사도행전 2:43-47)

 

초대교회의 모습을 전하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놀랍다. 성령 강림절 이후의 교회 공동체는 이 땅에 실현된 천국과 다를 바 없었다. 누가는 사도들을 통해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다고 전하지만, 사람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고,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쓰는 그 모습 자체가 기적이 아닐까? 저들의 삶은 사람들이 차이를 넘어 어떻게 일치를 이루며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표징이다.

 

초대교회는 사랑, 일치, 거룩함이 온전히 드러나는 교회였다. 낯선 이들이 함께 지내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는 것은 모두가 가족이 되었다는 말이다.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은 그들을 가르던 사회적 장벽이 무너졌다는 말이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과 사심 없이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 참 놀라운 일이다.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가? 많은 이들이 익명성 속에 머물려고 한다. 한편으로는 누군가와의 친밀한 교제를 소망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과 연루되는 번거로움을 귀찮아한다. 프라이버시를 침해받고 싶지 않기에 서로를 깊이 알려고 하지 않고 또 스스로를 알리려 하지 않는다. 자아의 한계를 벗어나 다른 이들과 소통하기보다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그런 사귐을 소홀히 하는 순간, 우리는 삶의 가장 값진 은총을 잃어버릴 수 있다. 낯섦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내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생을 경축하는 잔치를 벌일 수 있어야 한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만으로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삶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한달음에 그 목표에 도달할 수는 없다 해도, 노둣돌 하나를 놓는 마음으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야 한다.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땀 흘리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싸우고, 함께 성찬을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다. 독점과 지배와 풍요가 아니라 나눔과 섬김과 청빈함이 오히려 삶을 축제로 만든다는 사실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그런 삶의 결과는 무엇인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그것을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2:47)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 정체를 드러내는 징표이다.

 

*기도*

 

하나님, 기독교인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자못 따갑습니다. 경멸의 언사와 눈빛을 만날 때마다 속이 상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았다면 이런 난감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처럼 우리에게도 다시 시작할 용기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진실과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서게 도와주시고, 이익이 아니라 의를 검질지게 추구함으로 세상의 복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 싸늘한 세상에 봄소식처럼 다가가는 이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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