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멘’이 된 사람

김기석의 새로봄(166)

 

‘아멘’이 된 사람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튼튼히 서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를 자기의 것이라는 표로 인을 치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고린도후서 1:20-22)

 

예수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다. 어떤 경우에도 ‘아니오’ 한 적이 없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성령은 예수님을 ‘아멘이신 분’(요한게시록 3:14)이라고 말한다. 이 강력한 단어 앞에서 우리 삶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아멘’이라는 말을 우리는 그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으로 새긴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나는 신뢰한다’, ‘나는 굳건해졌다’는 뜻도 있다. 신뢰 없이는 ‘아멘’ 할 수 없다. 진심으로 ‘아멘’ 하는 순간 우리 정신은 굳건해진다. 예수님이 만일 하나님의 권위에 눌려 ‘아멘’ 하셨다면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일치와 사랑 안에서 ‘아멘’ 하셨다. ‘아멘’ 함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했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굳건하게 만드셨다. 이런 되먹임의 관계를 일러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은 ‘입맞춤’이라고 표현했다. 아멘은 하늘과 땅의 입맞춤이고 포옹이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믿는 사람만이 순종할 수 있고, 순종하는 사람만이 믿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신앙이 먼저고 순종은 그 다음이라 생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신앙은 오직 순종의 행위 안에서만 자신의 참됨을 입증한다. 순종은 아주 구체적인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 또는 말씀을 통해 들려오는 소리에 순종하여 이웃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벗이 되어주고, 고통을 덜어주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설 때 우리는 비로소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우리 믿음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는 것은 한사코 고통의 자리를 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고통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름에 늘 ‘아멘’으로 응답하셨다.

 

주님은 우리들의 삶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 되기를 원하신다. 믿음의 사람은 직립한 사람이다. 오직 주님 앞에서만 무릎을 꿇을 뿐 세상의 어떤 권세 앞에서도 허리를 곧게 펴고 일어서는 사람 말이다. 작고한 시인 김남주는 <자유에 대하여>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자유 좀 주세요 자유 좀 주세요/강자 앞에 허리 굽히고 애걸복걸하며/동냥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적어도 직립의 인간인 나는.” 작은 풀뿌리에 걸려도 자꾸만 비틀거리는 우리가 이런 오연한 고백을 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령께서 우리 속에 자꾸 생기를 불어넣어주셔야 한다. 성령은 우리를 일어서게 하는 힘이다. 봄이 되어 초목이 깨어나듯 성령은 우리 속에 잠들어 있던 참 사람을 일깨우는 힘이다. 그 힘을 덧입을 때 우리는 비로소 ‘아멘’의 사람이 될 수 있다.

 

*기도*

 

하나님, 조각가 자코메티는 ‘직립하는 인간이 아름답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를 자꾸 끌어내리는 세상의 중력에서 벗어나 하늘을 향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음 삼아 우리 마음을 조율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는 일체의 것들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게 해주시고, 힘겹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아멘’ 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든 우리 마음에 성령의 신바람을 채워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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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

김기석의 새로봄(167)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시몬은 사도들이 손을 얹어서 성령을 받게 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돈을 내고서, 말하기를 “내가 손을 얹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도록 내게도 그런 권능을 주십시오.” 하니,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그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우리의 일에 그대가 차지할 자리도 몫도 없소. 그러므로 그대는 이 악한 생각을 회개하고, 주님께 기도하시오. 그러면 행여나 그대는 그대 마음속의 나쁜 생각을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오. 내가 보니, 그대는 악의가 가득하며, 불의에 얽매여 있소.” 시몬이 대답하였다. “여러분들이 말한 것이 조금도 내게 미치지 않도록, 나를 위하여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이렇게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뒤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마리아 사람의 여러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다.(사도행전 8:18-25)

 

박해를 인해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 집사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를 통해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그 성에 있던 마술사 시몬은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이 놀라운 사건을 목격하고는 넋이 나갔다. 그는 빌립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자기도 그런 능력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그곳에 와서 사람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니 성령이 임했다. 시몬은 사도들에게 돈을 건네며 “내가 손을 얹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도록 내게도 그런 권능을 주십시오.” 하고 청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에게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돈을 가져온 것이다. 그 철부지를 향한 베드로의 질책은 자못 준엄하다. 

 

“그대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그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우리의 일에 그대가 차지할 자리도 몫도 없소.”(사도행전 8:20-21)

 

시몬의 영혼을 내리치는 베드로의 채찍질이 혹독하다. 마치 얼음을 깨는 도끼 같다. 이렇게까지 반응을 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야 한다. 그릇된 정신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강한 충격이 필요한 법이다.

 

 

 

돈은 어느 시대에나 매력적이다. 현실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가게에서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정말 소중한 것은 시간을 들일 때 얻어지기 때문이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은 사람들의 삶과 관계를 피상적으로 만든다.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다 숨이 가쁘다. 사회학자인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은 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돈은 사물의 모든 다양성을 균등한 척도로 재고, 모든 질적 차이를 양적 차이로 표현하며, 무미건조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모든 가치의 공통분모임을 자처함으로써 아주 가공할 만한 평준화 기계가 된다. 돈은 이로써 사물의 핵심과 고유성, 특별한 가치, 비교 불가능성을 가차 없이 없애버린다.”(<짐멜의 문화론> 중에서)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왜 문제인지를 잘 지적해주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다양성을 특색으로 한다. 하나님의 세상에서 불필요한 것, 무가치한 것은 없다. 저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 조화로운 세상을 이룬다. 하지만 돈은 모든 사물을 균등한 척도로 잰다. 질적인 차이를 양적인 차이로 환산함으로써 그 고유한 아름다움이나 가치를 지워버린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은 폭력 세상이다. 기독교인은 돈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삶으로 증언해야 한다.

 

*기도*

 

하나님, 마술사 시몬은 악인이 아니라 약자입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싶어 하면서도 그는 진리에 대해서는 청맹과니에 불과했습니다. 믿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는 했지만 그는 자기를 부정하는 데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신앙은 다만 자기 확장을 위한 도구였을 뿐입니다. 시몬의 모습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봅니다. 가장 귀한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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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탓 네 덕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66)

 

 내 탓 네 덕


   
영월에 있는 선배 목사님을 방문하고 왔다. 함께 목회의 길을 걸으며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만나면 좋고 생각하면 마음 든든한 선배가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마침 선배가 새로운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한 터라 반가운 마음은 더욱 컸는데, 간곡한 마음으로 선배를 청한 교우들이 고맙기도 했고 복되다 싶기도 했다.

 

예배당을 둘러보고 밀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점심을 먹으러 찾아간 곳이 곤드레밥집이었다. 예전에도 들른 적이 있는 곳인데, 외진 곳에 있지만 충분히 찾아갈 만한 밥집이었다. 맛도 맛이지만 주인내외의 정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식당 주인에게는 식당을 찾는 사람이라면 대번 확인할 수가 있는 취미가 있는데 목공이다. 여러 개의 작품들이 식당 곳곳에 전시가 되어 있어 손님들의 눈길을 끈다. 이번에 찾았을 때 마음에 와 닿았던 것 중에는 단순한 글도 있었다. 빙긋 웃음을 자아내는 글이 눈에 띄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그보다 더 짧은 것도 있었다.

 

내 탓
네 덕

 

그 말 새기고 싶었다. 그 마음 지니고 살아간다면 누구 따로 원망할 사람도, 탓할 일도 없지 않을까 싶었다. 내 탓 네 덕, 역시 단순한 것이 울림이 크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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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떡메가 아니다

  • 목사님! 근데, 떽메라고 쓴 단어는 떡메를 잘못 쓰신 건가요?

    이진구 2019.08.23 11:25
  • 좋은 지적 고맙습니다.

    한희철 2019.08.24 10:50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36)

 

기도는 떡메가 아니다


   
며칠 전 ‘하루 한 생각’에 이정록 시인의 시집 <벌레의 집은 따뜻하다>에 실린 서시를 읽고서 쓴 글이 있었다.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에 대한 글이었다.


그 글 아래 임종수 목사님께서 사진을 한 장 올리셨다. 숲속 도토리나무 세 그루가 나란히 섰는데, 세 나무가 모두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어른 키 높이쯤에 커다란 상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는데 맞았다, ‘내놓으라는 폭력이지요. 갑질~ 도토리를 탈취하려는 폭력~’라는 글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기 흉한 상처 자국은 떡메에 맞은 자국이었다.

 

 

 

 

 

가을이 되어 도토리를 따러 가는 사람들 손엔 떡메가 들려 있곤 했다. 인절미 등 떡을 만들 때 내리치던 떡메로 나무를 쳐서 도토리를 떨어뜨리기 위함이었다. 떡메에 맞을 때마다 나무는 껍질이 다 까지고, 껍질뿐만이 아니라 몸에 해당하는 줄기도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런 시간이 이어지다보니 나무엔 그리도 큰 상처 자국이 남게 된 것이었다. 목사님의 사진 아래 답글을 남겼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였군요.
떡메 자국!
떡메는 떡을 만드는데 쓰면 되는데, 나무를 치는 데도 썼으니 나무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싶습니다.
기다리면 아낌없이 다 줄 텐데 말이지요.
우리의 기도가 떡메가 아니기를 빕니다.
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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