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처구니없는 꿈이라 해도

김기석의 새로봄(185)

 

어처구니없는 꿈이라 해도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스라엘과 이집트와 앗시리아, 이 세 나라가 이 세상 모든 나라에 복을 주게 될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며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 하실 것이다.(이사야 19:23-25)

 

꿈은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꿈꾸는 이들은 몽상가 혹은 현실 부적응자 취급을 당하곤 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런 이들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돌입하는 법이다. 꿈을 버리는 순간 비관주의와 허무주의가 우리를 확고하게 지배한다. 평화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꿈은 어처구니없어 보일 때도 있지만, 그 꿈은 강고한 현실에 작은 틈을 만드는 법이다. 미국 유니온 신학교의 종신교수인 정현경 박사는 알자지라 TV에서 본 한 광고를 즐겁게 기억한다.

 

"이스라엘의 어린 소년이 축구를 하다가 실수로 축구공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르는 높은 시멘트 담 너머로 넘겨버리는 것이다. 실망한 소년은 시멘트 담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팔레스타인 쪽을 들여다봤다. 그러자 저쪽에서 놀고 있던 또래의 팔레스타인 소년이 그 소년의 얼굴을 보고는 씨익 웃으며 그 공을 힘껏 차 담을 넘겨 돌려보내준다."(현경, <신의 정원에 핀 꽃들처럼>, 126쪽)

 

 

 

 

 

중요한 것은 그 '틈'이다.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작은 틈이 없었다면 이런 멋진 장면은 연출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있는 장벽 사이에 시소가 놓이자, 이쪽과 저쪽의 아이들이 시소를 타고 노는 장면을 보았다. 장벽을 깨뜨리는 상상력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 틈으로 평화의 바람이 불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틈'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전혀 소통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게 해야 한다. 예수님은 세상이 그어놓은 모든 경계선을 가로지른 분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의인과 죄인, 성과 속 사이에 길을 내 서로 통하게 만드셨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이 삶으로 만드신 그 길을 우리 길로 삼아 살아가는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사19:23)

 

이사야는 기존질서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적대관계였던 나라들이 서로 소통하고, 함께 세상 여러 나라에 복을 매개하는 꿈을 꾼다. 이런 꿈이 없어 세상은 거칠고 빈곤해졌다. 역사적 상상력을 억압하고 세상을 시장으로 바꾸는 정치를 바로잡을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사람들은 어리석은 꿈이라 말할지 몰라도 우리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아닌가.

 

*기도

 

하나님, 현실에 적응하며 사는 동안 우리는 날개를 잃은 새처럼 살고 있습니다. 몸은 비대해졌지만 정신은 왜소해졌고, 땅의 현실에 몰두하다보니 하늘을 잊었습니다. 경쟁과 불화가 우리의 자연 상태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적대 관계에 있던 이들이 함께 손을 잡고, 서로에게 복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이사야의 그 꿈을 우리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확고하게 사로잡고 있는 강고한 편견과 적대감으로부터 벗아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김기석의 새로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1) 2019.09.13
위로  (1) 2019.09.12
어처구니없는 꿈이라 해도  (1) 2019.09.10
마음을 지키는 길  (0) 2019.09.10
아마샤의 비극  (1) 2019.09.07
교만이라는 병  (1) 2019.09.07
posted by

시간이라는 약

  • 감사합니다. 목사님 참으로 이해 안가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차만 타면 그렇게 내면의 심사가 꼬이는 건가요? 원래 심사가 그렇게 꼬여서 그런건가요 ?
    그리고, 왜 술만 먹으면 음주 운전을 하는 건가요?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이진구 2019.09.11 13:19
  • 알다가도 모를 일이 세상에 하도 많아서 말이지요.

    한희철 2019.09.11 16:35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5)

 

시간이라는 약

 

정릉교회 목양실은 별관 2층에 있는데, 창문에 서서 바라보면 바로 앞으로는 삼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겨우 자동차 교행이 가능한 길 세 개가 서로 만난다. 여러 번 때운 자국이 남아 있는 도로에는 부황을 뜬 자국처럼 맨홀 뚜껑들이 있고, 대추나무에 연줄 걸린 듯 전선이 어지럽게 묶인 전봇대 여러 개, 자동차보다도 애인 만나러 가는 젊은이가 걸음을 멈춰 얼굴을 바라보는 반사경 등이 뒤섞인 삼거리엔 늘 차와 사람들이 오고간다.


삼거리라 했지만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네 개의 길이다. 예배당으로 들어오는 길까지 합하면 사거리가 되는 셈이어서 열십자 모양을 하고 있다. 정릉에는 유난히 언덕이 많고 골목길이 많은데 예배당 앞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 복잡한 길 주변으로 공사가 끊이질 않다보니 차가 엉기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한창 건축 중인 제법 큰 건축물 안식관을 끼고 있는데다가 인근에 연립주택을 짓는 곳이 여럿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일이다. 덩치가 큰 기계가 들어와 자리를 잡고 종일 공사를 하다보면 가뜩이나 복잡한 길은 더욱 복잡해진다. 도로가 아닌 예배당 입구로 차를 빼보기도 하지만, 쉽지 않은 상황은 자주 발생한다.    

 
동네로 올라오는 차와 큰 길로 내려가는 차, 골목에서 나오려는 차와 올라가려는 차, 사방으로 차들이 엉기면 바라보는 내가 보기에도 난감하다. 어디에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짐작이 안 될 정도다. 상황이 그렇게 되면 자동차만 꼬이는 것이 아니라 심사도 꼬여 경적소리가 요란해지고 서로 질러대는 고함소리가 거칠어지곤 한다.

 

그런데 신기하다. 아무리 엉긴 상태가 심각하다 해도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풀려 있다. 누가 어떻게 해서 풀었는지는 몰라도 풀릴 것 같지 않아 보였던 상황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풀려 있곤 한다. 온종일, 혹은 몇날 며칠 엉겨 있는 모습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혹시 우리네 삶도 그런 것 아닐까?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상황도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언제 풀렸는지 모르게 풀리는 것 아닐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그래서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일이 복잡하게 엉겼다고 애면글면 속을 끓일 것이 아니라 슬며시 시간에 맡겨보는 것도 한 선택일 것이다.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겸손의 밑바닥에 무릎을 꿇은 자 만이  (2) 2019.09.13
더욱 어려운 일  (2) 2019.09.12
시간이라는 약  (2) 2019.09.10
저만치  (2) 2019.09.10
폭우 속을 걷고 싶은  (3) 2019.09.07
당구를 통해  (0) 2019.09.07
posted by

저만치

  • 감사합니다. 그런데 두보의 시는 어떤 것인가요 ?

    이진구 2019.09.10 12:34
  • 두보의 시 한 편이 아니라 두보의 시 세계 전체를 두고 낸 문제였답니다.

    한희철 2019.09.10 16:45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4)

 

저만치

 

우연히 소월의 시 ‘산유화’를 대하는 순간, 떠오른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시험에 나왔던 문제가 있다. 당시 시험문제의 예문으로 주어진 시가 소월의 ‘산유화’였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산유화’라는 시에서 소월과 두보의 시 세계를 구분할 수 있는 단어 하나를 찾아서 쓰고, 그 이유를 쓰라는 문제였다. 문제를 대하는 순간 한 대 얻어맞는 것 같았다. 한국과 중국을 대표할 만한 두 시인의 시 세계를 어찌 단어 하나로 찾아내라는 것일까, 그런 일이 가당한 일일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답은 ‘저만치’였다. ‘저만치’라는 단어가 소월과 두보를 구분할 수 있는 단어였는데, ‘저만치’라는 단어가 자연과의 일정한 거리를 두는 ‘관조’의 태도라면, 두보의 시 세계는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기억에 없다. 기억에 없는 걸 보면 문제 앞에서 감탄만 했을 뿐, 정답을 쓰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때 그 국어문제는 단어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가르침으로 남아 있다.

 

그런 생각이 가능한 것이 어찌 시인의 시 세계뿐이겠는가? 우리가 하는 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말 한 마디에 말하는 이의 마음과 생각이 묻어난다. 별 생각 없이 하는 말 한 마디 속에도 말하는 사람의 속마음이 고스란히 담기고는 한다. 40년이 지나도록 국어시험 문제 하나가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하는 한 마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오랫동안 누군가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씨앗처럼 말이다.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욱 어려운 일  (2) 2019.09.12
시간이라는 약  (2) 2019.09.10
저만치  (2) 2019.09.10
폭우 속을 걷고 싶은  (3) 2019.09.07
당구를 통해  (0) 2019.09.07
일등능제천년암(一燈能除千年暗)  (2) 2019.09.07
posted by

마음을 지키는 길

김기석의 새로봄(184)

 

마음을 지키는 길

 

아이들아,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내가 이르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이 말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말고, 너의 마음 속 깊이 잘 간직하여라. 이 말은 그것을 얻는 사람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몸에 건강을 준다.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잠언 4:20-23)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순간마다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측 가능한 ‘상투어’가 아니다. 늘 새롭게 들려온다. 하지만 우리 경험은 인생이란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라고 말한다. 무료하고 권태로운 삶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분명한 지향이 있어야 한다. 제법 나이가 들고,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갖춘 이들도 가끔 길을 잃는다. 이정표를 찾아야 한다. 시인 이정록은 많이 배우진 못했지만 삶에 대한 통찰력이 넘쳤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이정표로 삼고 산다.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겄냐?/내 잘못이라고 혼잣말 되뇌며 살아야 한다./교회나 절간에 골백번 가는 것보다/동네 어르신께 문안 여쭙고 어미 한 번 더 보는 게 나은 거다./저 혼자 웬 산 다 넘으려 나대지 말고 말이여.”(<가슴 우물> 중에서)

 

 

 

 

 

삶은 이처럼 단순한 건데 우리는 복잡하게 살아간다. 그렇기에 어떤 경우에도 우리 삶을 바른 길로 인도해 줄 말씀과 만나야 한다.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나부끼는 부평초처럼 우리 마음은 속절없이 흔들린다. 하루에도 몇 번씩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감사와 노여움 사이를 오간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천국을 짓기도 하고 지옥을 짓기도 한다. 외부 세계의 영향에 민감한 우리 마음은 고요함을 누리지 못한다. 오죽하면 ‘내 마음 나도 모른다’는 말이 있겠는가? 예레미야는 일찍이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예레미야 17:9)라고 탄식했다. 

 

옛 사람은 어딘가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쓸 수 있어야 한다(應無所住而生其心, 金剛經)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진 않다. 우리는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 똑같은 사안도 이익이나 입장, 친소관계에 따라 전혀 달리 평가한다. 누가 감히 나는 언제나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마음은 늘 흔들린다. 그렇기에 마음을 제대로 쓰고 살려면 늘 잘 조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음’으로 삼아야 할까? 히브리의 지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음으로 삼으라고 말한다. ‘귀를 기울이라’, ‘한시도 눈을 떼지 말라’, ‘마음 속 깊이 간직하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집중하라는 말이다. 집중이라는 한자어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일 集에 가운데 中 자가 결합된 말이고, 다른 하나는 잡을/지킬 執에 가운데 中 자가 결합된 단어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中’에 우리 마음을 오롯이 모아야 하고(集中), 또 그것을 꼭 붙들어야 한다.(執中) 붙드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꼭 지켜야 한다. 그것이 마음을 지키는 길이다.

 

*기도

 

하나님, 우리 마음은 늘 흔들립니다. 어떤 때는 담대하다가도 다음 순간 두려움에 떨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타적인 선택을 하지만 이기심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이것이 내 마음이다’라고 말할 만한 확고한 마음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마음을 주님께 내놓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조율되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의 일에 이끌리겠기 때문입니다. 구멍투성이인 우리 마음을 고쳐주시고, 주님의 마음을 우리 속에 심어주십시오. 아멘.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김기석의 새로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로  (1) 2019.09.12
어처구니없는 꿈이라 해도  (1) 2019.09.10
마음을 지키는 길  (0) 2019.09.10
아마샤의 비극  (1) 2019.09.07
교만이라는 병  (1) 2019.09.07
우리 가운데 거니시는 주님  (1) 2019.09.07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