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오재 노오재

  • 목사님 덕분에 한자공부도 하고 감사합니다. 뜻이 꼭 지금 사는 세상의 모습 같습니다.

    이진구 2019.10.01 09:53
  • 그러게요,
    짧은 한 마디 속에 우리 삶의 풍경이 담겼지요?

    한희철 2019.10.02 08:25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6)

 

거오재 노오재

 

냉천동에 있는 감신대에 입학하여 만난 친구 중에는 한남동에 사는 친구가 있었다. 서울에 머물 일이 있으면 친구 집을 찾곤 했다. 


한남동을 찾으면 즐겨 찼던 곳이 있었는데 ‘胎’라는 찻집이었다. 순천향병원 맞은편에 있는, 가로수 플라타너스 나무가 2층 창문 바로 앞에 그늘을 드리우는 찻집이었다. 창가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도 했고, 손님이 없을 때는 연극을 하는 주인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당시만 해도 찻집에는 성냥을 선물로 준비해 두곤 했다. 찻집 이름이 새겨진 작은 성냥이었다. 그런데 ‘胎’에 있는 성냥은 특이했다. 한쪽 면에 한문으로 된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居惡在 路惡在’라는 구절이었다. 신학생의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뜻을 묻는 대신 혼자서 그 뜻을 헤아려보기로 했다.

 

 

 

 


한 달여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어느 날 항복하듯이 주인에게 물었다. 이야기를 들으니 나는 읽기부터 잘못하고 있었다. ‘거악재 노악재’로 읽었는데, ‘惡’은 ‘악’이 아니라 ‘오’로 읽어야 했다.


'거오재 노오재'(居惡在 路惡在)는 옛 선시 중의 한 구절이었다. 그 뜻이 그윽했다. '머물 곳도 마땅치 않고 갈 길도 마땅치 않다'였다. 그 짧은 한 마디로 우리 삶의 풍경을 오롯이 담아내다니, 선시의 창끝이 매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1978년의 일이었으니 오래 전의 일이다. ‘胎’라는 찻집이 여전히 그곳에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득한 세월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 성냥갑에서 본 선시 하나는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다. 머물 곳도 마땅치 않고 갈 길도 마땅치 않다고, 삶이 그렇게 보일 때마다 불쑥 떠오르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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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을 견주지 말라

김기석의 새로봄(185)

 

 

소명을 견주지 말라

 

베드로가 돌아다보니,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이 제자는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서, “주님, 주님을 넘겨줄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베드로가 이 제자를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이 믿는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들 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이 모든 일을 증언하고 또 이 사실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이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어서, 그것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한 책들을 다 담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요한복음 21:20-25)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 ‘내 양떼를 먹여라’, ‘나를 따라라!’ 하고 명령하셨다. 20절은 ‘베드로가 돌아다보니’라는 말로 시작된다. “나를 따라라!” 하는 명령과 “돌아다보니”라는 단어가 묘하게 엇갈리고 있다. 따르기 위해서는 부르신 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데 베드로는 뒤를 돌아본다. 어쩌면 이게 연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흘낏 바라보고는 주님께 묻는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천박한 호기심이다. 다른 사람의 소명과 나의 소명을 견줘보고 싶어 하는 이 마음이 유혹의 뿌리이다.

 

자기와 다른 이를 비교하는 순간 원망과 시샘이 나온다. 주님은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베드로를 책망하시고는 재차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요한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잘 안다. 그는 신실한 복음의 증인이 되었고, 그 복음의 기록자 역할을 잘 감당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하면서 몸에 있는 다양한 지체가 하는 일이 다 다르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부름 받는다(에베소서 4:11). 역할에 경중은 없다. 모두가 다 소중한 일들이다. 각자가 자기 일을 성실하게 감당할 때 그리스도의 몸은 든든히 세워진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값비싼 은총보다 값싼 은총을 좋아한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그런 값싼 은혜를 맹렬히 비판한다. 값싼 은혜란 참회가 없는 사죄요, 교회의 치리가 없는 세례요, 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이요, 개인적인 참회가 없는 사죄이고, 뒤따름이 없는 은혜요, 십자가가 없는 은혜요, 인간이 되시고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이다. 그렇다면 값비싼 은총이란 무엇인가?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따르기를 촉구하기 때문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촉구하기 때문이다.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인간의 생명을 대가로 치르기 때문이요, 인간에게 생명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디트리히 본회퍼 묵상 52>, 이신건 편, 102-3쪽)

 

값싼 은혜에 중독된 이들은 따라야 할 분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이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길을 잃을 때가 많다. 주님은 우리 시대의 갈릴리로 우리보다 앞서서 가고 계시다. 지금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 분노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있는 곳, 그곳에 갈 때 우리 신앙의 이야기가 풍성해진다. 남이 어떻게 하는 가 눈치 볼 것 없다. 각자 자기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게 중요하다.

 

*기도

 

하나님, 주님을 등지고 떠났던 제자를 지싯지싯 찾아오셔서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는 예수님의 그 끈질긴 사랑에 우리는 할 말을 잊습니다.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사랑이 베드로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부르셨기에 버리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 가끔은 유난히 내게 주어진 십자가가 가장 무거운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각자에게 맞는 역할을 부여하셨음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남과 비교하며 일희일비하지 말게 하시고, 끈질기게 소명을 이루어가는 우리가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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