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재자가 필요한가?

신동숙의 하루 한 생각(96)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재자가 필요한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재자가 필요한가? 이러한 질문을 우리가 아닌 나 자신에게 스스로 묻는다. 일회용 질문이 아닌, 거듭 숨을 쉬듯 묻고 또 묻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신약에서 말하는 예수한테서 찾으려고 한다. 나는 신학자도 아니고, 목회자나 교회의 중직자도 아니다. 그저 예수를 사랑하는 한 명의 성도로써 단지, 내 눈으로 본 성경 말씀과 지금껏 걸어온 나의 지성과 무엇보다 내 양심에 비추어서 얘기할 뿐이다. 만약 내가 하는 얘기에서 편협함과 부족함이 보인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필자에게서 원인을 찾으시기를 바란다. (비판의 말도 수용할 용의가 있다. 단, 예의를 갖춘 부드러운 표현으로.) 예수의 말과 행적에서 나는 단 한 점의 모순도 부족함도 찾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재자가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두 가지를 근거로 답변을 제시하려고 한다. 첫째는 십자가 고난 이전에 예수의 말씀과 둘째는 부활한 예수가 하늘로 오르시며 제자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씀에서 찾으려고 한다.

 

첫째, 내가 교회를 다니면서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가장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있었다. 마치 개그 콘서트를 보는 것 같은 상황극이다. 일부의 목회자나 일부의 중직자나 일부의 성도들이 나누는 얘기 가운데, "내가 기도를 해서 그 분이 나았어요. 우리가 기도를 해서..." 개인기도, 중보기도, 새벽기도의 재단을 쌓으며 흔히 주위에서 들어본 말이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했던 말이기도 하다. 교회 안에선 상식처럼 통용되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응당 합당한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새벽기도의 전을 쌓는 거룩한 목회자와 장로와 권사와 성도의 모습에서 기도의 효험을 믿는 것은 상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모순이 있다. 그 표현이 성경적인가 하는 의문이다. 예수는 어떠했는가? 살펴보려고 한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가 행한 이적과 기적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대표적인 표적들이 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 혈우병의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을 잡고는 혈우병이 나았다는 기적 등. 그럴 때마다 예수는 어떻게 말씀 하셨을까? 궁금했다. 예수도 일부의 목회자와 일부의 중직자와 일부의 성도들처럼 "내가 기도해서..."라고 했을까? 아니다. 예수는 딱 한 마디만 하셨다. "너의 믿음이... ",.이적과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의 행적을 따라 읽으며, 내가 유심히 본 대목이기도 하다. 신약 성경을 통틀어서 예수는 단 한 번도 '내가 기도해서 나았다.'는 대목이 단 한 구절도 없다. 오로지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리라..' 예수는 그 어디에서도 "내가 기도해서..."라고, "내가 구원을 해준다."라고, 스스로의 영광을 드러냄으로 이 땅에 어둔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았다. 오롯이 내 양심의 거울에 비친 예수는 그렇게 빛이 되었고, 온전한 마음, 진리의 몸이 되었다.

 

그에 반해서, 대표적으로 신천지의 교주와 한기총의 회장이 군중들 앞에서, 예수의 이름을 찔끔씩 들먹이며 모든 영광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행위는 개그 콘서트의 처음과 마지막 편에 각각 편성될 만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보인다. 그들의 모습에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예수도 보이지 않는다. 양심의 성령은 애통해 할 모습이다. 그리고 세상은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 대형 교회를 두고 권정생 선생님이 하신 말씀마따나 예수를 팔아 먹는, 사교와 이익 집단으로 전락시키는 신성한 교회에 대한 모독이다. 하지만, 그 뻘밭에서도 꽃은 피고 풀은 고개를 내민다. 어김없이 봄이 찾아오는 것처럼. 그 안에서도 애통하는 눈물의 기도로 스스로의 몸을 씻으며, 메마른 심령을 적시어 좁은 물길을 내는 선하고 맑은 영혼은 섞여 있기 때문이다.

 

둘째, 부활하신 예수가 하늘로 오르시며, 눈물로 호소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이 있다. 내가 가고 성령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 성령은 이방인이나 믿음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공평하게 주신 양심이다. 진리의 영인 양심이다. 예수도 모르고, 글도 모르는 선조들은 자연 속에서 그 양심을 등불 삼아서 일평생을 살다가신 분들도 있다. 누구에게나 그 양심이 있어서 자기 스스로를 심판하리라는 말씀이 등불처럼 환하다. 그렇게 예수는 하늘로 오르시며 마지막으로 우리들 마음 속에 성령을 선물로 주셨을 뿐, 예수는 그 어디에도 우리를 위해 중재자를 세우지 않으셨다. 단지 예수 제자들의 행적에서 중재자로써가 아닌,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된 예수를 따르는 뒷모습을 볼 뿐이다.

 

 

 

전세계 국민 행복지수 1위의 나라 중에는 덴마크가 여러 차례 오르곤 한다. 코펜하겐에는 행복 연구소가 있다. 한국에선 서울대학교 안에 연구소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덴마크의 행복을 처음엔 복지제도에서 그 행복의 원인을 찾았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 보니 제도보다 앞선 원인으로 국민들의 의식을 꼽게 되었다.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 행복지수가 높은 것이었다. 학교를 졸업해서 열쇠공이 된 친구나 의사가 된 친구나 동창 모임에서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행복해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계층 간의 위화감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국민 개개인의 의식이 성장함으로 행복지수가 높은 원인을 찾기 위해서, 덴마크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룬트비로 거슬로 올라간다. 약 230년 전의 그룬트비. 그룬트비는 덴마크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신학운동의 선구자였다. 그는 찬송가 작가, 역사가, 시인, 초기 스칸디나비아 문학 연구의 개척자, 교육 이론가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나 목회자가 된 그룬트비는 그가 성경에서 본 예수의 행적을 따라서 두 가지를 주장했다. '상호 토론과 비평의 자유'.

 

그는 성경에서 본 예수 그리스도적인 깨달음을 얻으며 예배의 바른 모습을 제시한 것이다. 목회자와 중직자와 성도가 다같이 둘러 앉아서 함께 성경을 읽으며, '상호 토론과 비평의 자유'를 통해서 예수와 삶을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주장이 원인이 되어서 그는 11년 간 목회 금지를 당한다. 만약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230년 전의 그룬트비와 같은 주장을 한다면, 한국 교회에선 어떤 반응을 보일까? 덴마크가 1위였을 때, 한국의 국민 행복 지수는 48위였다. 일제강점기 때로부터 현재까지 대형 교회는 예수로부터 노선을 벗어나서 부실 공사의 현장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너무나 많은 숙제를 안겨주고 있다. 그 원인을 외부 세계인 국가와 사회에서 찾으려고 하기 전에 기독교 내에서 찾는 것이 바른 첫걸음일 것이다. 나와 너의 틀어짐에서 그 틀어짐의 원인을 나로부터 찾으려는 첫걸음이 문제 해결의 처음이라는 사실은 상식이기에.

 

교주와 목회자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재자가 아니다. 될 수도 없고, 예수는 그런 우상을 세우라 하신 적도 없다. 그리고 예수 조차도 우상이 되지 않으셨다. 단지, 예수는 어떠한 이적과 기적을 행함에도 자신을 철저히 드러내지 않음으로 예수는 역설적이게도 빛이요. 진리의 몸이 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나아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한 예수를 따르려는 모습에서 나는 참된 기독교인의 모습을 본다. 비틀리고 흔들리고 넘어지더래도 그 길 말고는 없기에.

 

신천지와 같은 사이비를 낳은 건 탐욕으로 살만 찌운 대형 교회를 지향하는 기독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기독교의 그 많은 젊은 청년들이 대거 신천지로 이동한 원인을 철저히 기독교 안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잘못을 바로 잡는 첫걸음일 테니까. 그러한 스스로에 대한 자각 없이는 신천지에 빼앗긴,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인 소중한 자녀의 마음을 온전히 돌이킬 수 없을 것이기에. 그것은 교회 전체가 아닌 가장 먼저 나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여전히 먼저 대중에 기대고, 먼저 권위에 기대고, 목회자를 중재자인 것처럼 기대려고 하는 한 이미 내 안에 계신 하나님과 성령과 예수는 가려져 볼 수 없을 것이기에. 그것은 기독교인으로써 가장 슬픈 모습이다. 이미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고요한 기도의 자리가 곧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이 아닌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나라 전체적으로 대중의 모임과 집회들이 취소가 되었다. 숨을 쉬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라고 예외는 없다. 그것을 교회에 대한 탄압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철없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기독교는 천주교의 모습을 거울 삼아서 비추어 보기를 바란다. 그들의 예배는 쉰 적이 없다. 공기 중에 떠도는 바이러스가 국경을 막는다고 막아질까? 그것은 일본의 원전 오염물 바다 누출이 국경을 막는다고 해서 막아진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국경을 막는 일로 시간을 벌 수는 있겠지만, 하나의 지구 안에서 공기와 물의 흐름을 막으려고 국경을 막는 것은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순간의 그럴 듯한 퍼포먼스 같은 모습은 아닐런지. 질병이든 종교든 행복이든 모든 원인과 해답을 진리와 자기 자신 안에서부터 찾으려고 한다면, 세상은 좀 더 평화로워지고, 평온한 숨을 쉴 수 있지 않을까.

 

단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바라는 것은, 적어도 국가 정책자의 마음에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던 예수의 마음만은 어디에서나 언제까지나 잃지 않고, 빛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중국 우한의 사태가 일어난 첫 계기는 국민의 국가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것에서 시작했기에. 어느 누구라도 예외없이 그 잃어버린 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기에. 내가 아니더래도 내 부모와 내 어린 자녀, 내 가족, 내 친구 어느 누구에게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또 하나의 내가 되기에.

 

현 시국에 바리새인처럼 광장에서 외식하는 예배가 아닌, 홀로 산으로 오르시어 하나님을 만나던 예수의 고독처럼. 나부터 골방에서 잠잠히 하나님을 찾는 진정한 믿음의 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이미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이미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이미 내 안에 계신 예수를. 홀로 고요히 기도를 드리던 다락방 다니엘의 예배처럼. 목회자도 중직자도 단지 내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웃이고, 소중한 또 하나의 나일 뿐이다. 목회자는 성경 말씀을 나보다 더 많이 알기에 예수를 가리키는 손가락 또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선생은 될 수 있지만, 결코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리는 중재자 또는 손바닥도 되어선 안된다. 오롯이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의 몸인 예수와 예수가 선물로 주신 진리의 영인 성령이다. 이미 내 안에 있는 양심이 등불이다. 골방에 고요히 머물러 진리와 자기 자신을 등불 삼으며, 내 몸이 거룩한 성전이 되어서, 고독과 침묵의 기도 속에서 이미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망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진정한 예배요. 지상에서 천국을 누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에덴 동산의 예배가 회복되는 첫걸음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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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함과 울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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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구 2020.03.01 09:11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12)

 

유쾌함과 울적함

 

이런 무력감을 느끼는 것도 드문 일이지 싶다. 무엇보다도 한 인간으로서 무력감을 느낀다. 지나가는 시간들이 마치 불 꺼진 음습한 지하실의 시간 같다. 연일 영역을 넓히는 바이러스는 지역도 영역도 가리지 않고 퍼져간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두려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과학과 지식의 진보는 인간의 존재가 대단한 것처럼 으스댔지만, 실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앞에 허둥지둥 쩔쩔 매며 두려워하는, 허약하고 미약한 존재였던 것이다.

 

목사로서도 무력감을 느낀다. 지난 주일에는 많은 교우들이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다. 충분히 짐작했던 일이지만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신천지교인들이 참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출입하는 이들을 살펴 교인이 아닌 이들에겐 카드를 받았다. 예배당을 찾는 이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나서야 예배에 참석하게 하는 기이한 풍경, 필요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마음은 불편했고 무거웠다. 주중의 모든 예배를 가정예배로 대체했다. 예배를 중단하고 교우들이 찾지 않는 교회에 나와 시간을 보내는 것은 무작정 어둠을 주시하며 경계하는 초병 같았다. 내가 서 있는 자리와 보내는 시간, 모두가 낯설었다.

 

 

 

그런 와중에도 뭔가를 계속 결정해야 했다. 미룰 수 없는 일들이 이어졌다. 내려야 할 결정 중에는 정말로 중요한 결정이 있었다. 가장 중요하다 싶어 맨 나중으로 미뤄둔 결정이었다. 다시 다가오는 주일, 과연 주일예배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가톨릭과 불교는 교단차원에서 이미 결정한 일, 개신교에서는 그런 일사불란함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상황은 분명 자명한 상황, 신앙에 대한 핍박이나 박해와는 다른 경우이다. 이웃을 배려하고, 정부 시책에 동참하는 의미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마음은 무겁고 고통스러웠다. 상황은 당연했지만, 받아들이는 일은 정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당연하지 않았다. 뭔가 패잔병이 되는 듯한 느낌을 아주 지울 수는 없었다.

 

마침 도착한 책 <우신예찬>을 펼치니 대뜸 유쾌함에 대한 구절이 눈에 띈다. 사람들 앞에서 결코 웃음을 잃은 적이 없다며 삶의 목적을 유쾌함이라 정의한 데모크리토스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은 가능한 가장 유쾌하게, 그리고 가능한 가장 괴롭지 않게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만약 누구든 허망한 것을 좇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잔뜩 흐리고 비가 오는 창문 밖 풍경처럼, 이래저래 울적함과 유쾌함이 서로의 어깨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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