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12)
유쾌함과 울적함
이런 무력감을 느끼는 것도 드문 일이지 싶다. 무엇보다도 한 인간으로서 무력감을 느낀다. 지나가는 시간들이 마치 불 꺼진 음습한 지하실의 시간 같다. 연일 영역을 넓히는 바이러스는 지역도 영역도 가리지 않고 퍼져간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두려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과학과 지식의 진보는 인간의 존재가 대단한 것처럼 으스댔지만, 실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앞에 허둥지둥 쩔쩔 매며 두려워하는, 허약하고 미약한 존재였던 것이다.
목사로서도 무력감을 느낀다. 지난 주일에는 많은 교우들이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다. 충분히 짐작했던 일이지만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신천지교인들이 참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출입하는 이들을 살펴 교인이 아닌 이들에겐 카드를 받았다. 예배당을 찾는 이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나서야 예배에 참석하게 하는 기이한 풍경, 필요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마음은 불편했고 무거웠다. 주중의 모든 예배를 가정예배로 대체했다. 예배를 중단하고 교우들이 찾지 않는 교회에 나와 시간을 보내는 것은 무작정 어둠을 주시하며 경계하는 초병 같았다. 내가 서 있는 자리와 보내는 시간, 모두가 낯설었다.
그런 와중에도 뭔가를 계속 결정해야 했다. 미룰 수 없는 일들이 이어졌다. 내려야 할 결정 중에는 정말로 중요한 결정이 있었다. 가장 중요하다 싶어 맨 나중으로 미뤄둔 결정이었다. 다시 다가오는 주일, 과연 주일예배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가톨릭과 불교는 교단차원에서 이미 결정한 일, 개신교에서는 그런 일사불란함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상황은 분명 자명한 상황, 신앙에 대한 핍박이나 박해와는 다른 경우이다. 이웃을 배려하고, 정부 시책에 동참하는 의미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마음은 무겁고 고통스러웠다. 상황은 당연했지만, 받아들이는 일은 정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당연하지 않았다. 뭔가 패잔병이 되는 듯한 느낌을 아주 지울 수는 없었다.
마침 도착한 책 <우신예찬>을 펼치니 대뜸 유쾌함에 대한 구절이 눈에 띈다. 사람들 앞에서 결코 웃음을 잃은 적이 없다며 삶의 목적을 유쾌함이라 정의한 데모크리토스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은 가능한 가장 유쾌하게, 그리고 가능한 가장 괴롭지 않게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만약 누구든 허망한 것을 좇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잔뜩 흐리고 비가 오는 창문 밖 풍경처럼, 이래저래 울적함과 유쾌함이 서로의 어깨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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