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잔을 받겠나이다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16)

 

BWV 244 Matthäus-Passion/마태 수난곡

No.16 기꺼이 잔을 받겠나이다

 

마태수난곡 1부 27번~29번

마태복음 26:39

음악듣기 : https://youtu.be/ulO8S1ZrMcU

27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39. Und ging hin ein wenig, fiel nieder auf sein Angesicht, und betete und sprach: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대:

27

대사

예수

39. Mein Vater, ist's möglich, so gehe dieser Kelch von mir; doch nicht wie ich will, sondern wie du willst.

39.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28

코멘트

베이스

레치타티보

Der Heiland fällt vor seinem Vater nieder.

Dadurch erhebt er mich und alle

Von unserm Falle

Hinauf zu Gottes Gnade wieder.

Er ist bereit,

Den Kelch, des Todes Bitterkeit

Zu trinken.

In welchen Sünden dieser Welt

Gegossen sind und häßlich stinken,

Weil es dem lieben Gott gefällt.

구주께서 아버지 앞에 엎드리심으로

나와 모든 사람들을 세워 올려주시네

죄에 넘어진 우리들을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다시 세워주시네

그는 이제, 그 잔을,

죽음의 쓰디쓴 잔을 마시려 하시네.

그 잔에는 세상의 온갖 죄악이 그득하고

악취를 내뿜고 있지만

그래도 그것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이기에.

29

기도

베이스

아리아

Gerne will ich mich bequemen

Kreuz und Becher anzunehmen.

Trink ich doch dem Heiland nach.

Denn sein Mund,

Der mit Milch und Honig fließet

Hat den Grund

Und des Leidens herbe Schmach

Durch den ersten Trunk versüßet.

기꺼이 나는 순종하여

십자가와 잔을 받으리라.

주님을 따라서 나도 마시리라.

그의 입이 닿아

젖과 꿀이 흐르는 잔이 되었기에

고난과 쓰디쓴 치욕의 잔이

그의 들이킴으로 인해

달콤하게 되었다네.

 

 

기꺼이 잔을 받겠나이다

 

예수 수난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입니다. 마태수난곡에서의 겟세마네 기도문은 마치 원래 그 기도가 부드럽고 강한 이 음악에 얹혀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성경 중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운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도이기에 이 부분 만큼은 예수의 음성에 실린 단어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아직 독일어 실력이 부족할 때 독일가곡을 공부하며 썼던 방법인데 여러분도 이 방법을 통해 만나보시면 보면 더욱 깊은 감동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흐 또한 마태수난곡을 작곡함에 있어 문장 전체를 음악으로 옮기기 보다는 단어 하나하나에 음악을 덧입히는 방식을 자주 사용했기 때문에 단어 하나하나를 따로 번역하고 그 조합은 해석자에게 맡기는 'Word by Word'의 방식으로 해석할 때 더 깊이 있게 마태 수난곡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데 고야 作 ‘감람산의 그리스도’(1819)

 

Mein(나의) Vater,(아버지여) ist's(그것이) möglich(가능하다면), so(그렇게) gehe(가다<명령>) dieser(지시대명사 '이') Kelch(잔을) von(~로 부터 )mir;(나)

doch(그러나) nicht(not) wie (like ) ich(내가) will, (원하다) sondern(대신에) wie(like) du(당신이) willst(원하다, 2인칭).

 

나의 아버지여,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이 잔을 나로부터 떠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옵소서.

 

쓰러지신 예수

 

쓰러지듯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는 예수의 모습은 베이스 서창의 오케스트라 반주로 표현되고 있는데 바이올린과 비올라 파트는 철퍼덕 쓰러지는 것과 같은 악상을 이 곡이 끝날 때까지 반복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의 예수는 끝까지 쉬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쓰러뜨리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28번곡의 시작 부분. 맨 위로부터 세 번째 줄까지가 현악파트인데 예수께서 기도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쓰러트리고 있음을 지속해서 표현하고 있다.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는 지금 얼굴이 땅에 닿아 있어 몸이 더 이상 낮춰지지 않게 보일 뿐 이 노래의 반주처럼 그의 마음과 뜻을 하염없이 내려놓으며 스스로 쓰러뜨려지기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연주에서 지휘자들은 작곡가의 의도가 너무나도 명확하게 드러나 보이는 이 부분을 매우 강렬한 활 긋기와 빠른 템포를 사용하여 매우 드라마틱하게 표현합니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표현에 강한 칼 리히터는 유독 이 부분을 사뭇 부드럽고 깊이 있게 터치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 기도의 표면적인 면만 부각시켜 격정적으로 그려내기 보다는 이 부분을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깊은 곳에서 거대한 영적 에너지 사이의 긴장 상태로, 피 말리는 영적 샅바싸움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또한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기도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마태수난곡을 통해 알게 된, 내가 아는 예수는 그렇게 기도하셨을 것 같습니다. 만일 그 기도가 외적으로 그렇게 강렬했다면 돌맹이 하나 던질 수 있는 지척의 거리에 있는 제자들이 아무리 피곤하다한들 그렇게 단잠을 잘 수는 없었겠지요.

 

반면,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가만히 있다가도 시작 신호만 나면 어떤 고양됨의 과정도 없이 엄청난 소리를 질러가며 기도합니다. 그런 기도를 하는 교회를 더 뜨겁고 살아 있는 교회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평범한 상태로 돌아갑니다. 부르짖는 기도, 뜨거운 기도 모두 좋습니다. 모두 필요합니다. 특히 요즘, 저도 그런 기도를 자주합니다. 그러나 어떤 고양됨의 과정도, 어떤 갈무리의 과정도 없는 외적으로만 뜨거운 기도는 진정 강렬한 기도가 아니라 무속신앙의 영향을 받은 집단적이고 감정적인 히스테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도의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겟사마네기도 처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기도가 아니라 무언가를 더 얻어내기만을 구하는 기도,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뜻에 하나님을 가져다 붙이며 자기의 뜻을 관철해 내려는 기도는 예수께서 몸소 가르치신 기도와 전혀 상관없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

 

레치타티보의 가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베이스 솔로는 예수의 엎드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다시 일으킴 받았다고 노래합니다. 바로크 시대는 렘브란트의 그림의 빛과 어둠처럼 ‘대조의 미학’이 지배했던 시대입니다.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로 크레센도와 디미누엔도는 존재조차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며 오케스트라에서 독주 파트그룹(리피에노/Ripieno)과 전체합주(뚜띠/Tutti)가 늘 구분되어 있어 점점 커지거나 작아지는 효과 대신 갑자기 작아지고 갑자기 커지는 표현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서 마태수난곡의 대본 곳곳에는 ‘엎드리심으로 높이 신다’, ‘그가 쓴 잔을 마심으로 우리가 단 잔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시간의 내용 중에서 ‘예수께서 깨어 기도하심으로 우리가 쉼을 누린다’ 등의 대조적인 문학기법이 자주 쓰이고 있습니다.

 

Der Heiland fällt vor seinem Vater nieder.

Dadurch erhebt er mich und alle

Von unserm Falle hinauf zu Gottes Gnade wieder.

구주께서 아버지 앞에 엎드리심으로

나와 모든 사람들을 세워 올려주시네

죄에 쓰러진 우리들을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다시금 세워주시네

 

겟세마네의 기도는 예수와 하나님 사이에서만 이루어진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기도의 가운데에는 죄악에 쓰러져버린 우리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예수는 우리 인간의 운명을 놓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가사 내용 그대로 예수는 죄악에 쓰러진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다시 세워주시기 위해 자신을 쓰러뜨리고 있습니다. 베이스는 계속해서 겟세마네의 기도를 영적으로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Er ist bereit, den Kelch, des Todes Bitterkeit zu trinken.

In welchen Sünden dieser Welt Gegossen sind und häßlich stinken,

그는 이제, 그 잔을, 죽음의 쓰디쓴 잔을 마시려 하시네.

세상의 온갖 죄악이 그득하고 악취를 내뿜고 있는 그 잔을.

 

그가 마셔야 할 잔은 죽음의 쓰디쓴 잔이었고 세상의 죄악으로 가득한 악취가 나는 잔이었지만 예수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뜻 앞에 엎드림과 스스로를 쓰러뜨림으로 순종합니다. 그 이유를 이 서창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해 줍니다.

 

Weil es dem lieben Gott gefällt

그것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이기에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간편하게 생각합니다. 새번역과 공동번역이 39절에서 ‘나의 원’, ‘아버지의 원’ 대신에 ‘나의 뜻’, ‘하나님의 뜻’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교리는 매우 중요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신앙을 건조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말 ‘원함’과 ‘뜻함’사이에는 사뭇 큰 차이가 있습니다. ‘뜻함’이 ‘원함’보다 더 강하고 경직된 표현입니다. ‘뜻함’은 이미 정해진 느낌이 드는 반면 ‘원함’에는 우리의 의지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마태수난곡에 쓰인 루터 번역 성경은 의도적으로 ‘뜻함’이라는 표현을 피했습니다.

 

‘Gottes Willen'이라는 '하나님의 뜻'에 해당하는 관용적 표현이 있음에도 루터는 ‘하나님의 원하심대로/Wie du willst' 혹은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Dem Gott gefallen'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만큼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 없으며 반대로 ‘하나님의 뜻’만큼 쉽게 아는 것처럼 여기며 오용되는 것 또한 없습니다. 루터가 그러했듯이 하나님께 가까운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쉽게 쓰지 않습니다.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는 방법이 되기도 하지요. 한국 정치에서 ‘종북’프레임을 씌우면 모든 정치적 논쟁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듯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카드를 내밀게 되면 모든 신앙적 프로세스가 정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는 기계적인 정답을 내어 놓기 전에 그 앞에 놓인 ‘lieben/사랑하는’ 이라는 표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표현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의 공식대로, 우리가 믿는 교리대로 이루어 진 일이 아닙니다. 예수 십자가 사건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그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이며 우리를 사랑했기에 그토록 고민했던 것이지 무조건 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하나님의 뜻’ 운운하는 사람 치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있거나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했고 바로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이 십자가의 잔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명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 안에서 예수와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통해 펼쳐지는 것입니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이어지는 베이스 아리아는 예수처럼 십자가와 잔을 기꺼이 받겠다는 다짐을 노래합니다. 우리가 듣고 있는 58년 칼리히터 음반에서는 베이스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를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가 부르고 있습니다. 디스카우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성악가로서 레퍼토리가 무궁무진해서 현존하는 거의 모든 독일 가곡을 녹음으로 남겼는데 그의 음반은 지금까지도 독일가곡 연주의 경전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가사의 문학적 해석과 성악적 표현의 거장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위대한 예술가가 그러하듯이 그에게도 역시 죽음의 경험이 진지한 음악가의 삶으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는 전쟁 포로로서 2차 대전의 참상을 몸소 겪으며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이 음반을 녹음할 때 서른세 살, 즉 수난곡의 예수와 같은 나이였습니다. 누군가가 마태 수난곡을 일컬어 ‘제 5복음서’라고 이야기 했는데 서른 세 살의 디스카우가 참여한 이 음반은 ‘가장 아름답게 번역된 제5복음서’로 음악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Dietrich Fischer-Dieskau (1925~2012)

 

겟세마네에서 우리의 기도로

 

레치타티보에 이어지는 베이스의 아리아는 마태수난곡의 내용분류상 ‘기도’에 속합니다. 마태수난곡의 내용 분류는 이 연재 글의 두 번째와 세 번째 글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이 아리아는 ‘기도’로서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를 바라본 한 신앙인의 영적인 결단을 노래하고 있지요.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Gerne will ich mich bequemen

Kreuz und Becher anzunehmen.

기꺼이 나는 순종하여

십자가와 잔을 받으리라.

 

독일어 ‘'sich(mich) bequemen’은 ‘순종(순응)하다’와 ‘편히 쉬다’의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 된다고 할 수 있는데 즉,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고자 할 때(마태복음 16:24) 오히려 그 십자가와 잔이 우리로 하여금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는 그 잔이 지나가도록(gehen) 간구했지만 우리는 그의 십자가 승리로 인하여 그 잔을 받아들겠노라(annehmen)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와 쓴 잔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잔은 예수의 거룩하신 입술이 닿은 잔이며 십자가의 승리로 인하여 달콤하게 되었기에 더 이상 쓴잔이 아닙니다.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를 귀하게 여긴다면 우리 또한 우리의 십자가와 잔을 기쁨으로 영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는 무엇이며 우리가 받아 들이켜야 할 쓴 잔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십자가와 잔을 분별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모른채 하느냐 아니면 진지하게 그 앞에서 기도하느냐 일 것입니다. 우리가 때마다 우리의 십자가와 잔을 받아들이며 예수를 따를 때 그 때야 말로 하나님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시는(Dem Gott gefallen)때요 ‘하나님의 뜻’이 가장 충만하게 드러나는 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렇게 오늘도 새롭게 펼쳐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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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카페

신동숙의 글밭(107)

 

텅 빈 카페

 

몸이 늘어지도록 늦잠을 자던 중학생 딸아이가 방에서 나오며 대뜸, "엄마, 우리 카페 가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뭔가 얘기를 해옵니다. "엄마~ 코로나에 걸리면 치사율이 몇 프로인지 알아?" (계속 반말을 합니다. 이쯤 되면 존댓말을 해야 되지 않느냐고 엄마로써 한마디 해줘야 하는데, 얘기가 재미나서 그냥 끝까지 들어주었답니다.) 그러면서 딸아이는 자문자답을 합니다. 3%라며, 수능 시험 1등급 받을 확률이라면서, 친구들하고 카톡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우리는 걱정 안해도 된다."고 했다며, 환하게 웃으면서 카페를 가자고 합니다.

 

아직은 외출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러자고 했습니다. 마당에 하얀 목련꽃이 어제보다 조금 더 피어서 오후의 햇살을 듬뿍 받아 딸아이의 미소처럼 환합니다. 습관적으로 겨울 모직 코트를 입으려다가 마땅치 않아서, 딸아이에게 옷 부탁을 했습니다. 가슴팍에 반토막 난 흰색 부메랑 마크가 크게 그려진 검정색 얇은 외투를 입으라며 줍니다. 지퍼를 목 아래 끝까지 올렸더니, 그렇게 입으면 촌스럽다며 살짝 내려서 안쪽 티셔츠가 살짝 보이도록 엄마의 옷매무새를 잡아줍니다. 그런 딸아이의 손길이 싫지가 않습니다. 그 귀여운 손으로 가끔 설겆이도 해주니까요.

 

 

 

걸어서 갈만한 동네 카페 중에서, 집 근처 큰 도로변에 있는 작은 카페로 정했습니다. 골목길에도 봄햇살이 따스합니다. 입은 옷이 얇은데도 피부에 닿는 선선한 봄바람이 싫지가 않습니다. 골목길 구석 자리 하수구 철창 바로 옆 틈새에서 노란 민들레꽃 한송이가 피었습니다. 용케 피운 꽃이 반갑고 고마워서 민들레꽃과 2020년 올해의 첫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테이블이 5개가 있는 작은 카페입니다. 외국인 여성이 혼자 앉아 있을 뿐 카페는 텅 비어 있습니다. 오랜만에 카푸치노와 자몽에이드를 주문했습니다. 통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도로가 한산합니다. 달리는 차량들과 버스 정류장에 잠시 멈추었다 출발하는 버스가 보일 뿐, 인도에는 평소보다 확연히 줄어든 행인이 드문드문 보일 뿐입니다.

 

대신 우리가 걸어온 골목길 반대편 강변에는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자전거 길로 봄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자전거가 신났습니다. 산책길을 따라서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활기차 보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특이하게도 대구시에서만 집중적으로 늘고 있는 와중에, 우리가 사는 마을의 사람들은 그렇게 강변으로 자연에 더 가까이 모여있습니다.

 

다들 얼굴에는 마스크를 끼고 있지만, 목련꽃처럼 봄햇살을 듬뿍 쬐면서 강을 따라서 신나게 걷고 있습니다. 강변 둑에는 봄쑥을 캐느라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입니다. 해를 등지고서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주머니들의 색색깔 외투가 활짝 피운 꽃 같습니다. 덕분에 카페에는 우리둘 뿐입니다. 두세 분이 잠시 들러 주문한 음료를 테이크아웃으로 가지고 나가긴 해도, 계속해서 카페 주인과 우리 둘 뿐, 텅 빈 카페입니다. 그 넉넉함을 우리만의 행복으로 채우기엔 미안한 마음입니다. 가방 속에 넣어 간 오렌지 하나를 꺼내서 주문 받는 곳에다, 웃으며 말없이 놓아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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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은행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23)

 

마스크 은행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교우들을 위해 준비해 둔 마스크가 있었다. 알아보니 1100개 정도가 된다고 한다. 교우들 중에는 몸이 약하여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분들이 있다. 그분들이 약국 앞에 줄을 서서 마스크를 구하는 일은 어려운 일, 필요한 교우들께 나누어 드리기로 했다. 양이 제한되어 있어 더 자주 더 많이 나눌 수 없는 것에 양해를 구하며 교우들께 소식을 전했다.

 

 


 

그러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마스크 은행을 개설하면 좋겠다 싶은 것이었다. 교우들께 다시 한 번 문자를 보냈다.

 

“마스크 은행을 개설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마스크를 구하기 힘든 시기, 이럴 때일수록 오병이어의 기적이 그리움으로 다가옵니다. 혹시라도 마스크를 교회에 기증을 하든지, 마스크를 살 수 있는 비용을 전해주시면 그만큼을 더 교우들과, 이웃들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분명히 이 시간도 지나갈 것입니다. 함께 마음을 나눔으로 우리의 마음과 믿음이 성숙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나눌수록 남는, 넉넉한 은행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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