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서리

한희철의 얘기마을(97)


밤 서리


동네 형, 친구와 같이 장안말 산에 오른 건 밤을 따기 위해서였다. 가을 산에는 먹을 게 많았고 그건 단순히 먹을 걸 지나 보석과 같은 것이었다.


신나게 밤을 털고 있는데 갑자기 “이놈들!” 하는 호령 소리가 들려왔다. 산 주인이었다. 놀란 우리들은 정신없이 도망을 쳤다. 하필 주인 있는 밤나무를 털었던 것이다. 한참을 산 아래로 내려와 헉헉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잡히지 않은 것과 제법 자루를 채운 밤이 다행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정신없이 도망을 치느라 친구가 신발 한 짝을 어디엔가 잃어버린 것이었다. 검정고무신이었지만 신을 잃고 가면 집에서 혼날 거라며 친구는 울먹울먹했다.


그때 동네 형이 제안을 했다. 내가 가서 신발을 찾아오겠다, 대신 오늘 딴 밤은 모두 내 차지다. 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산 주인이 무서워 신을 찾으러 갈 엄두가 안 났던 것이다. 결국 형은 친구의 신발을 찾아와 밤을 모두 차지했고, 우리에게는 까먹으라고 몇 알씩 나누어 주었을 뿐이었다.


말은 못했지만 신발을 잃어버린 건 친구였는데 친구와 같이 밤을 모두 내놓은 것이 못내 억울했다.  


같이 책임을 진다는 것은 불이익을 나누는 것이다. 지금도 두 사람의 이름이 또렷한 어릴 적 한 기억은 지금도 그렇게 가르친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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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 청도 운문사

신동숙의 글밭(242)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 청도 운문사


가을 하늘이 좋은 토요일 정오인데, 가족들이 저마다 다 일이 있다고들 합니다. 은근히 기대하던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입니다. 모처럼 혼자서 길을 나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훌쩍 혼자서 집을 나서기 전에 "같이 갈래요?"하고 자녀들과 친정 엄마에게까지도 전화를 걸어서 일일이 다 물어보았기에,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홀가분하기만 합니다. 가뜩이나 온라인 등교로 두 자녀와 매일 집에서 함께 지내다 보니, 혼자만의 시간이 그립기까지 했던 차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멀리까지 가지는 못하고 차로 달려서 한 시간 이내에 있으면서 조용히 책도 읽고, 숲길 산책도 하고, 침묵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이면 좋은 것입니다. 


분도 명상의 집, 통도사, 석남사, 청도 운문사, 산길이나 숲속으로 산책도 할 수 있는 자연으로 마음이 더 갑니다. 국도를 달리면서도 목적지를 정하질 못하고서 마음이 저울질을 합니다. 그러다가 마음이 모아지는 곳이 있습니다. 청도 운문사의 산세가 다시 보고 싶어진 것입니다. 운문사 뒷편으로 먼 산능선이 보이는 곳이라면 주차장 한 귀퉁이에 차를 세워도 좋을 것 같습니다.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서 올라가는 길이 초행길일 때처럼 무섭지가 않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만 다시 이 길을 되돌아 내려오면 되는 걸음입니다.


천년의 숨결을 간직한 청도 호거산 운문사는 160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경학을 수학하고, 계율을 수지봉행하면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 청규를 철저히 실천하고 있는 수도 도량입니다. 사찰에서 하는 일을 울력이라고 하는데, 앉아서 하는 참선 만큼이나 몸을 움직이는 울력 또한 중요한 공부의 방편으로 삼고 있습니다. 마치 성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보았던 '기도하고 일하라.'의 근본 수행과 다르지 않음을 봅니다. 




코로나19의 안전 수칙은 청정 도량에서도 예외가 없습니다. 사찰 입구에는 손소독제가 놓여 있고, 방명록 대신 출입자의 성함과 연락처를 적는 기록장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불사 재건축을 하고 있는지 기계음이 귀를 찌릅니다. 쉼이 없는 기계음은 들을 수록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귀를 찌르는 귀뚜라미 소리와는 비슷한 듯 사뭇 다른 소리입니다. 도시에서 살아갈 수록 이따끔 산이나 바다를 찾아서 몸도 마음도 기대어 자연과 호흡하는 시간을 더욱 가지려고 합니다. 자연 속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흐트러졌던 많은 것들이 본래면목으로 저절로 회복됨을 느낍니다.


운문사에는 자그마한 전각들이 많이 있습니다. 작압전과 관음전을 지나서 오백전에서 발걸음이 머뭅니다. 한 비구니 스님이 목탁을 치면서 독경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어린 스님이 손에 책자를 들고서 오백전 주위를 시계 방향으로 탑돌이를 하듯이 돌고 있습니다. 언뜻 보아도 손에 든 내용을 암송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 짐작하게 된 데에는 저 역시 가끔은 잠을 쫓거나 문장을 가슴에 새기기 위해서 거실을 탑돌이 하듯이 돌고 돌기도 하는 제 모습이 스님의 모습에 비추어 보이는 것입니다. 


오백전 우측으로 긴 나무 의자가 보이고, 수행자들이 거하는 곳이라는 나무 표지판이 막다른 길임을 보여줍니다. 무성한 나뭇가지 잎들이 햇살을 가려주고, 저 발 아래로 개울물이 명경지수입니다. 잠시 앉아서 진도가 안나가던 책 읽기를 마무리하기에 맞춤인 장소입니다. 


저녁해가 서산으로 기울려고 하지만, 이대로 산을 내려가기엔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좌측 이정표를 따라서 사리암까지 올라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주차장에서부터는 가파른 길을 30여 분을 걸어서 올라가야 사리암이 나온다고 합니다. 걸어가는 입구엔 나무를 깎아서 만든 지팡이가 여러 다발 꽂혀 있는 걸로 보아 오늘은 무리일 것 같아서 다음을 기약하며 다시 내려왔습니다. 


그래도 해가 남아 있습니다. 6시면 저녁 예불을 드리는 시간이라는 걸 미리 보아두었습니다. 다시 들어선 경내는 산속 사찰의 본래면목으로 조용해졌습니다. 한 여인이 다가오더니, "죄송하지만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대가족입니다. 아기띠로 갓난 아기를 안은 젊은 아빠도 보이고, 할머니, 할아버지, 젊은 여인 두 명, 가족 단체 사진을 제게 부탁한 것입니다. 배경이 되는 것은 수령이 500년이 넘는 '처진 소나무'입니다. 그리고 우측 뒤로는 기암절벽이 멋진 산능선이 보입니다. 전문가는 아니더래도 전문가의 솜씨 만큼이나 가족 사진을 잘 찍어주고 싶은 그런 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선 되도록 많이 찍어야 합니다.  배경이 여러 방향에서 들어오도록 조금씩 각도를 달리해서 서너 장, 그리고 인물이 가까이 보이도록 여러 장을 찍었습니다. 서 있는 분들이 눈을 감았다 뜰 새를 알 수 있도록, "하나, 둘~", 그렇다고 사진 부탁을 받긴 했으나, 제 욕심껏 초면인 분들을 너무 오래 세워 두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싶어서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초집중을 하면서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고맙습니다"는 인사를 받으며 핸드폰을 돌려주고 돌아서 가려는데, 젊은 할머니께서 몇 걸음 따라오시며 합장을 하시면서, "너무 고맙습니다. 복 받으실 겁니다." 하면서 거듭 몸을 숙이십니다. 저도 두 손을 모아서 공손히 인사를 드리면서 걸음을 돌렸습니다. 등 뒤로는 "와~" 하는 탄성이 저녁 바람결에 환청인 듯 들려오는 것 같아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손소독제가 놓여 있던 사찰 출입문 위 범종루에서 법고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서산으로 하얀 상현달이 어둑해지는 저녁 하늘에 호젓해 보입니다. 경내 여기저기 머물던 발걸음들이 법고 소리 아래로 모여듭니다. 이곳이 극락정토가 아니고 따로 있을까 싶습니다. 예불을 드리려 걸음을 옮기는 스님들의 모습이 그림 같습니다. 


색색깔 옷은 달리 입었지만 멈추어 서서 법고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말갛게 하얀 달을 닮았습니다. 법고 소리에 모두가 멈춘 절 마당에는 승과 속이 따로 없으며, 법고를 치는 이와  듣는 이가 더이상 둘이 아닙니다. 조금 전 한 순간에 찍던 사진 한 장에도 정성을 담으려던 한 마음과 그 마음을 알아본 분의 마음이 둘이 아니었습니다. 그 또한 순간을 영원으로 산 것과 다르지 않아서, 차오르는 상현달 만큼이나 입가엔 미소가 절로 머금어지는 저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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