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라림을 빛나는 보석으로 바꿀 때

쓰라림을 빛나는 보석으로 바꿀 때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따로 따로는 지체들입니다.”(고전12:26-27)

평강의 주님이 우리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별고 없으셨는지요? 시간 여행자인 인간은 언제나 앎과 모름 사이, 빛과 어둠 사이, 기쁨과 슬픔 사이, 확신과 회의 사이에 걸린 외줄을 타고 삽니다. 어지간히 익숙해지긴 했어도 균형을 잡고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도 맑고 선선한 웃음을 지으며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한 동안 미세먼지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초미세먼지가 ‘나쁨’ 단계에 이르렀다는 뉴스 보도를 보았습니다. 대기의 정체(停滯) 때문이라지만 결국 그 먼지를 만든 것은 우리들이기에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주 정말 오랜만에 교회 문이 다시 열렸습니다. 비록 마스크 너머로 보아야 했지만 정겨운 얼굴들을 대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았던지 모릅니다. 마치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근 8개월 만에 처음으로 교회에 온 교인도 가슴이 벅찬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손을 마주잡지도 얼싸안을 수도 없었지만 눈빛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확진자가 줄어들지 않는 상황에서 많이 못 오실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거의 교회의 수용 인원을 다 채울 만큼 오셨습니다.

황지우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 떠올랐습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가슴 절절한 그리움으로 누군가를 기다려본 사람이라면 이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다림의 시간은 지연된 시간입니다. 늦어지는 도착 때문에 우리 온 몸은 귀로 변합니다. 긴 설렘의 시간 끝에 시인은 마침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고 노래합니다. 기다림은 ‘너에게로 감’입니다. 긴 격절의 세월이 우리 그리움을 깊게 만들었습니다.

예배시간에 쌍둥이 아기를 환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기를 품에 안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엄마 아빠 품에 안긴 아기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축복하는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생명은 태어나고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어떤 분은 그 광경을 보고 뭔가 새로운 일이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며 그 감격을 전해왔습니다. 문득 이사야가 전해주던 아름다운 비전이 떠올랐습니다. 이사야는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던 백성들에게 한 아기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그 아기야말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징표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사9:2). 우리는 이런 희망을 품고 어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비대면 예배가 일상이 되면서 가장 마음이 많이 쓰이는 분들이 원로들이었습니다.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신 분들도 계셨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계셨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교회생활이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는데, 비록 감염병 때문이라지만 교회 출입이 금지되었으니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마치 친교의 자리에서 멀어진 것 같은 소외감을 느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삽상한 바람이 부는 늦가을이면 함께 나들이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먼데 가지는 못했지만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이 기뻐하셨습니다. 올해는 그럴 수 없어서 고심 끝에 작은 선물을 보내드렸습니다. 스산한 계절, 몸과 마음 두루 덥히시라고 어묵을 선택했습니다. 좋은 선택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주일은 우리교회가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지난 주일 광고 시간에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할 일이 무엇인지를 돌아보라는 숙제를 내드렸습니다. 사실 감사는 뜻밖의 선물이나 도움을 받았을 때 우리 속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고마움의 감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를 강조하는 것은 돌이켜 생각해보지 않으면 우리 삶에 주어지는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내게 주어지는 어떤 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고전15:10a)라고 고백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라야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습니다. 자기 삶이 ‘사랑의 빚’임을 아는 사람은 질투, 분노, 혐오에 빠지지 않습니다. 감사는 우리 영혼의 굳어짐을 막아주는 백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뭇잎이 노란색, 붉은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급한 녀석들은 줄기에서 분리되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굴러다닙니다. 김현승 시인은 유난히 가을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가을을 노래한 시가 아주 많습니다. 그 가운데 ‘나무’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느님이 지으신 자연 가운데/우리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나무이다.” 시인은 나무 모양이 사람을 닮았다고 말합니다. 참나무는 튼튼한 어른들 같고, 앵두나무와 그 빨간 뺨은 소년들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물녘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나무도 옆에서 그림자를 드리우고, 우리가 멀고 팍팍한 길을 걸을 때면 말없이 그 먼 길을 따라오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러하듯 나무도 머리를 푸른 하늘에 두고 있습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매우 종교적입니다.

“가을이 되어 내가 팔을 벌려
나의 지난날을 기도로 뉘우치면,
나무들도 저들의 빈손과 팔을 벌려
치운 바람만 찬 서리를 받는다, 받는다.“

시인은 기도하는 나무, 참회하는 나무를 보고 있습니다. 참회의 자세는 찬 바람, 찬 서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만 보면 늦가을 나무는 잎에 가려 보이지 않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보입니다. 돌에 맞아 난 상처, 벌레들의 공격을 받았던 흔적, 찢기고 잘린 자리에 생긴 옹이…. 그 자국들은 나무가 견뎌야 했던 아픔의 시간을 보여줍니다. 그 아픔과 상처를 안으로 감싸 안으며 나무는 성장을 거듭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사코 우리의 몸과 마음에 난 상처를 숨기려 합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경쟁 사회에서 취약함을 드러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확고히 사로잡고 있습니다. 취약함이 자랑일 수는 없지만 부끄러워 숨겨야할 것 또한 아닙니다. 나의 연약함을 누군가에게 드러낼 때, 다른 이들도 자기 안의 상처를 드러낼 용기를 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취약함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인간이 속절없이 떠밀리고 있는 인고와 슬픔의 강 속에 뛰어드셨습니다. 그래서 울기도 했고, 화를 내기도 했고, 배신도 당하고, 고향에서 쫓겨나고, 거절당하는 쓰라림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아픔과 쓰라림을 빛나는 보석으로 바꾸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신비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히2:18). 놀라운 은총입니다.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의 가려진 부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무에 새겨진 옹이와 상처와 같은 이들 말입니다. 안정적인 직업을 갖지 못한 분들, 가혹한 노동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분들, 자꾸만 절망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분들의 설 땅이 될 수 있는지 고심해야 하겠습니다.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능력도 없지만, 우리가 함께 지향을 분명히 하고 연대한다면 적어도 절망에 휩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이들을 위해 늘 기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공적인 문제를 향할 때 삶을 얽어매고 있는 비애감은 줄어들고, 삶의 의욕이 커질 겁니다.

아직 주일까지 며칠 남았습니다. 꼭 걸어온 시간을 반추하면서 우리 삶이 사랑의 빚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 좋겠습니다. 할 수 있다면 우리의 등불이 되어 주었던 이들에게 작은 감사의 마음이라도 표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강건하시기를 빕니다.

2020년 10월 29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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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들판

한희철의 얘기마을(128)


텅 빈 들판




들판이 텅 비었다.

볏가리와 짚가리 듬성듬성 선 들판

모처럼 소들이 한가하다

어미 소와 송아지가 진득이 편한 시간 보내기도 드문 일,

커서 할 일 일러라도 주는 듯

어미 소와 송아지가 종일 정겹다.

송아지와 어미 소가 대신하는 

이 땅의 평화.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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