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지어가는 삶의 이야기

우리가 함께 지어가는 삶의 이야기
 



“주님의 길은 바다에도 있고, 주님의 길은 큰 바다에도 있지만, 아무도 주님의 발자취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시편 77:19)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의 가정에 임하시기를 빕니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어나면서 방역단계가 1.5단계로 올라갔습니다. 교회는 좌석 수의 30%의 교인만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좌석 수보다 많은 교인이 참석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앞섭니다. 익숙해지지 않는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무시할 수도 없는 현실입니다. 적응하며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에게는 인내가 필요하다”(계14:12)는 말씀을 날마다 곱씹고 있습니다. 화낼 일도 아니고, 한숨을 내쉴 일도 아닙니다.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면서 우리 마음을 다잡아야 할 때입니다. 늘 대하던 얼굴을 대할 수 없는 아쉬움은 크지만 저기 어딘가에서 우리 교우들이 온몸으로 어둠과 맞서고 있음을 생각하며 힘을 내야 합니다.
 
지난 주중에는 모처럼 강화도에 다녀왔습니다. 바깥출입이 어려워 오랫동안 교회에 오실 수 없었던 원로 장로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김포를 거쳐 초지대교를 건너서 목적지를 향하면서도 마음이 상쾌하지 않았던 것은 자욱한 미세 먼지 때문일 겁니다. 바깥 풍경이 사뭇 을씨년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건너편으로 석모도가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어디선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꽤 오래전입니다만 교회 봉사자들과 함께 석모도를 찾아갔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모처럼의 나들이에 신이 난 교우들이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웃음꽃을 터뜨리던 그 날이 그리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새우젓도 사고, 간장게장도 사고, 속노란 고구마도 사며 흥청거리던 그 시간이 떠오르면서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습니다. 결국 함께 지나온 삶의 이야기가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비교적 최근에 우리 교인이 된 형제자매들과 그렇게 허물없이 어울리며 생의 한순간을 즐기고, 하나님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엮어갈 삶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계단을 올라 집 현관 앞에 이르렀을 때 휠체어에 앉아 계신 장로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손을 잡은 우리를 장로님은 소리 없는 울음으로 반겨주셨습니다. 아이처럼 우시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잠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찬송가를 함께 부르고, 시편 77편을 읽었습니다. 히브리의 시인은 고난의 시간을 회상합니다. 삶이 고달파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은 매정하게도 그 기도를 들으실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참담한 경험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영원히 버리시는 것일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일까? 한결같은 그분의 사랑도 이제는 끊기는 것일까? 그분의 약속도 이제는 영원히 끝나 버린 것일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일을 잊으신 것일까? 그의 노여움이 그의 긍휼을 거두어들이신 것일까?“(77:7-9)
 
어쩌면 우리 가운데 이런 상황에 처한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식(日蝕) 체험은 우리 쪽에서 보자면 ‘어두운 밤’의 경험입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이 다가오면 확실하던 것은 불확실하게 변하고, 맛있었던 것은 맛없는 것으로 변합니다. 속만 바짝바짝 타들어갑니다. 그러나 이때 시인은 스스로에게 자기를 사로잡고 있던 우울감에서 벗어날 처방을 내립니다. 그것은 주님이 해주신 일을 하나하나 되뇌고, 깊이깊이 되새기는 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자리에 이르기까지 끝도 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분심에 시달려야 했겠지만 시인은 그 마음을 다잡아 하나님께 가져간 것입니다. 되뇌고 되새기는 동안 들끓던 마음이 차분해지며 마침내 빛이 그의 내면의 뜨락에 내려앉았습니다. 마침내 시인은 “하나님, 주님의 길은 거룩합니다. 하나님만큼 위대하신 신이 누구입니까?“(77:13)라고 고백합니다. 고백이지만 사실은 찬양입니다. 장로님은 그 말씀을 들으며 또 우셨습니다. 그 울음 속에 담긴 염원과 진실함을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차가운 이론에 대한 관심이 적어집니다. 젊은 날에는 비논리적인 언술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지금은 그 언술 너머에 있는 마음을 읽기 위해 노력하는 편입니다. 차가운 신학이론이나 교리를 가지고 누군가의 삶을 재단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류를 제거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임을 압니다. 하지만 이론은 복잡한 현실을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냉정한 잣대를 들이대며 누군가를 배제하는 차가운 신학보다는, 곁에 있는 사람의 숨죽인 울음소리를 듣고 그들을 소중하게 대하는 이들 속에서 거룩함을 발견합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읽은 글이 제 마음에 참 따뜻하게 남아 있습니다. 동국대 입구에 있는 빵집 태극당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거대한 프랜차이즈점들의 등장으로 태극당은 거의 문을 닫을 지경에 처해 있었다고 합니다. 몇 년 전 창업자의 손자가 그 사업을 맡았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代)로 이어져 온 그 빵집의 전통을 잘 지켜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래된 샹들리에도 손질만 하여 재사용하고, 옛날부터 벽에 부착되어 있던 벽화나 안내문도 그대로 살려두었습니다. 옛 감성의 빵도 그대로 담아 판매했습니다. 많은 이가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감성이 다른 세대에게 어필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많은 젊은이가 그 빵집을 찾기 시작했고 사업은 본궤도에 올랐습니다. 지금의 주인은 창업자인 할아버지가 들려주신 이야기를 가슴에 깊이 담아 두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이 오래 걸려 기껏 하루 세 개밖에 못 만드는 빵이 있었어요. 할아버지한테 도대체 왜 이렇게 시간 뺏기면서 어느 날은 팔리지도 않는 빵을 만드시냐고 여쭤봤지요. 말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 빵을 좋아하셔서 가끔 사러 오시는 할머니가 계신다. 이 빵만 좋아해서 드시는데 우리밖에 못 만드니 그 할머니를 위해서 만들어드리는 거다.’”
 
어쩌면 전통이란 이런 이야기들이 쌓여 형성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해득실을 헤아리기보다는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려는 마음이 사랑이고 평화를 만드는 마음일 겁니다. 사람들은 새것을 좋아합니다. 낡은 것을 다 허물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쌓아 올리는 것을 일러 발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새것 속에는 이야기가 깃들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가 빈곤한 것은 사람들이 함께 살며 엮어가는 이야기가 사라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앙인들은 이 우울한 시대를 다양한 색으로 물들일 수 있는 색의 마법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영혼을 납작하게 만듭니다. 중층적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우리 삶을 긴 안목에서 조망하는 시선을 빼앗길 때 삶은 전장으로 바뀝니다. 숨을 돌리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추월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에 멈추지도 못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분홍 구두를 신어서 계속 춤을 추어야 했던 안데르센 동화의 소녀처럼 우리는 휴식조차 없이 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가끔은 멈추어 서야 합니다. 멈추어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잘 보아야 잘 살 수 있습니다.
 
또다시 힘겨운 시간이 우리 앞에 배달되었습니다. 한숨만 내쉴 게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발견할 수 있는 영의 눈이 열리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고립된 단자가 아닙니다. 잠시 떨어져 있지만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돌아오는 주일은 교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전통적으로 이날은 왕 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서심으로 오히려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되신 주님을 깊이 묵상하며 지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이 오롯이 드러나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0년 11월 21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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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참, 보기 좋구나

한희철 얘기마을(150)


거참, 보기 좋구나


아침부터 어둠이 다 내린 저녁까지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자기 차례가 돌아왔다. 한 사람 끝나면 또 다음 사람, 잠시 쉴 틈이 없었다.


파마를 하는 분도 있었고 머리를 다듬는 분도 있었다. 노인으로부터 아이에 이르기까지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이야기에 웃음꽃이 피어나기도 했다. 난로 위에서 끓는 산수유차가 들썩들썩 신이 났다.


원주 선미용실의 서명원 청년, 미용실은 한 달에 두 번 쉰다고 했다. 그 쉬는 날 중의 하루를 택해 아침 일찍 단강을 찾아 함께 예배를 드리고, 마을 분들을 위해 머리손질 봉사를 하는 것이다.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는 일, 결코 깨끗하다 할 수 없는 다른 이의 머리를 만져야 하는 일, 늘 하던 일을 모처럼 쉬는 날 또다시 반복해야 하는 일. 그러나 어둠이 내리고 마지막 손님이 된 종순이 머리를 다듬기까지 그 밝은 웃음은 변함이 없었다. 



따뜻한 웃음과 따뜻한 이야기. 문득문득 사람들은 그런 삶을 신기해했다. 쉽지 않은 삶의 근원이 무엇일까를 곰곰 생각하기도 했다.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내가 직장인이었다면, 한 달에 두 번 쉬는 직장인이었다면 그 쉬는 날, 난 무얼 하고 있을까? 그 쉬는 날 중 하루를 다른 이를 위해 온전히 쓸 수 있을까?’ 나도 자신이 없었다. 여간한 마음 없인 어림없는 일일 듯싶었다. 


예배당에서 머리를 깎아 미안하다 했지만 십자가 아래서의 아름다운 봉사, 마침 그날이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종려주일, 주님이 그러시는 것 같았다.


-거 참, 보기 좋구나. 다 끝나고 시간 남거들랑 내 머리도 좀 다듬어 다오. 치렁치렁 땀과 핏방울로 뒤엉켜 헝클어진 이 머리를 좀.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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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신동숙의 글밭(281)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세상엔 매듭 짓지 못하고, 풀리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작은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제게 주어진 이 하루도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흐르게 할 뿐입니다.


유약(柔弱)한 가슴에 어떠한 원망이나 분노의 씨앗도 뿌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쩌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노가 내 살과 뼈를 녹이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단속하려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닐 것입니다.


분노를 품고서도, 몸을 움직이며 그럭저럭 일상을 살아갈 때에는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습니다. 멈추어 바라본 순간에 비로소 자각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분노를 제 가슴에 품고서 새벽 기도를 드리던 고요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엄습하던 온몸의 느낌을 차마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몸이 멈춘 그 순간에 분노 속의 기도란, 내 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마치 핵분열을 일으키는 발열체로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 폭발할 듯한 열이 제 몸의 세포를 녹이고, 파괴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얼른 기도를 멈추었던 자각의 순간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그 후로 저에게 분노란 씨앗이 되지 못하도록 하는, 하지만 가끔은 무기력한 스스로를 끓어올릴 화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기도 하는 장작불 에너지원이 되기도 합니다. 평소 게을러서 하지 못하던 일을 그 화력을 사용해서 움직이게 할 뿐, 그 화력이 나와 타인에게로 무심코 흐르게 방치하지 않도록 깨어 있으려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 싸움과 갈등은 늘상 흐르는 강물의 한 줄기가 되어 우리의 일상 가운데 유유히 섞이어 흘러가고 있습니다. 


제게로 오는 방해물 또는 장애물을 애써 지우려거나 막으려 들지 않고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일입니다. 저항하지 않으려는 일입니다. 강물의 넉넉한 흐름 속에 섞이어 흐르도록, 단지 깨어서 바라보는 시선의 고요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스스로 만든 둑을 세우고 저항하던 힘이 한계 수위를 넘어서고는, 욱하며 터져서 약한 보다 약한 어린 자녀에게로 흘러 가는 경험을 많이도 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끝이 없습니다. 단지 방해물과 장애물이란 끊이지 않는 호흡처럼 평생토록, 흐르는 강물 속에 섞이어 흐르는 하나의 물줄기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기로 선택을 하는 일은 저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의 영역입니다. 불교에선 이번 생을 살아가는 동안 풀어야 할 업장이 될 테고, 기독교에선 제 몫의 십자가가 될 테지요. 



감사하게도 저에겐 가슴에 품은 맑은 샘이 있습니다. 예수. 그곳으로부터 맑은 샘물이 끊임없이 흘러 나와 흐르게 하는 일입니다. 눈물로, 기쁨으로, 감사와 감격의 모습으로 샘솟아 나를 적시우고, 흘러 넘쳐서 물길을 내어 세상 밖으로 흐르도록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흐름이 작은 생명을 살리우는 물길이 되기를 소망하는 일. 유약한 저 자신이 스스로 저항하며, 버티려는 제 힘만으로는 이 한 몸이 숨을 쉬기도 버겁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알아차리게 됩니다. 저항하기보다는 받아들이고 더불어 함께 흐르게 하는 편이 한결 마음을 더 넉넉하게 하고, 나와 우리와 자연의 생명을 조화롭게 살리우는 쪽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하려는 마음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탁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샘솟는 샘물을 가슴에 품지 못함일 테지요. 가슴에서 솟아나는 맑은 샘물이 끊임없이 흘러 넘쳐서 흐를 수 있다면, 한 줄기의 장애물과 한 줄기의 혼탁함도 넉넉히 품어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흐를 수 있을 테지요. 제 가슴에 품은 샘물은, 사랑과 진리의 몸이 되신 예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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