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자루

한희철 얘기마을(152)


고추 자루




망치 자루처럼, 마른 몸매의 지 집사님이 한 자루 고추를 이고 간다. 

부론장에 고추를 팔러가는 길이다. 

며칠 전엔 여주장까지 가 고추를 팔고 왔다.

스물일곱 근, 아귀가 터지도록 고추 자루 묶어 맸지만 한번 팔고 와 몇 집 잔치 부조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곶감고치에서 곶감 빼먹듯 한 자루 한 자루 줄어드는 고추들.

버스 운전사 눈치를 보며 지 집사님이 고추 자루를 싣는다.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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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달빛을 닮은 눈길로

신동숙의 글밭(283)


가을 달빛을 닮은 눈길로



며칠 동안 간간히 가을비가 내리더니,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어둑한 밤하늘을 환하게 밝혀주던 가로수의 노란 은행잎이 이제는 땅 위에 수북합니다. 그 노란 은행잎 융단을 밟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일으키는 작은 파동이 가을바람의 빗자루질 같습니다.


지난 시월의 어느날 해인사 원당암 달마선원 참선방에서 철야 참선을 마친 후 일찍 나서던 길에, 잠시 보았던 스님들의 분주한 빗자루질 풍경이 한 폭의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날 느즈막히 길을 나설 때면, 말끔하게 쓸어놓은 공원 산책길과 훤한 절 마당이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어쩌다가 떨어진 단풍잎 하나를 발견하고는, 가을 소식인가 싶어 반가운 마음에 줍기도 하고, 곁에 선 나무 아래로 돌려보내주기도 하던 적이 지금은 옛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는 덤덤히 낙엽을 밟으며 길을 걸어도, 바라보는 눈길 만큼은 가을햇살처럼, 어려운 시기를 함께 지나온 한 해 동안의 고마운 마음을 담은, 따뜻한 시선을 땅에서 끝까지 거두지 않으리라는 한 마음을 내어봅니다. 


그리고 점점 드러나는 빈 나뭇가지를 바라보면서, 그 앙상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어디에다 제 푸른 마음을 두어야 할 지, 마음이 가을바람처럼 제자리를 찾으려 맴돕니다.


이제는 떠날 채비를 다 끝내가는 이 가을과 어떻게 작별 인사를 나누어야 할 지, 비우고 털어낸 앙상한 가지를 볼 때면 허전한 공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 지, 그럴 수록 빈 하늘을 더 자주 바라보게 되는 11월의 끝자락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비우고 털어내고 있는 이 가을날, 이른 새벽부터 가로수길과 공원 산책길과 절 마당을 쓰는 사람들의 수고롭고 고마운 손길을 생각합니다. 낙엽을 쓸어놓으면 또 금새 땅을 뒤덮으려는 11월의 가을잎들과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는 마음은 아닌지 궁금해집니다. 제가 사는 집에도 일찌기 마당에 가지치기를 끝낸 터라 친정 엄마는 올 가을엔 빗자루질을 안해서 좋다며 홀가분해 하시는데, 그런 마음은 아닌지.


법정 스님은 마당에 떨어지는 낙엽을 일부러 때마다 쓸지 않으시고, 마당에 떨어진 모습 그대로 오래 두고 보기를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스님의 그 넉넉하고 고즈넉한 마음이 어둔밤 마당에 내려앉는 가을 달빛을 닮았습니다. 그럴 때면, 함께 생각나는 한시가 있습니다.


竹影掃階塵不動 죽영소계진부동

月輪穿沼水無痕 월륜천소수무흔


대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달빛이 연못에 들어도 물에는 흔적 없네


(金剛經五家解 금강경오가해)


떠나는 이 가을날, 떨군 잎들과 빈 가지와 빈 하늘을 바라보는 눈길에도, 온 땅을 덮어주는 낙엽들의 넉넉한 마음이 깃들기를. 


땅에 뒹구는 잎들에 난 구멍과 찢긴 상처를 보며 제 허물과 상처를 본 듯 바라보기를. 때론 그 모습이 마치 주어진 생을 살아오느라 무릎과 허리가 성할 날 없이 견디어낸, 몸이 부서져라 애쓴 정직함과 제 몸을 내어주고 욕심을 비우느라 구멍 뚫린 가슴의 진실함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이 가을날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따스히 은은하게 비추는 온유한 가을 달빛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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