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선생님



-1989년 9월 7일. 목요일. 


실내화를 안 가지고 학교에 갔다. 빈 실내화 주머니를 가지고 간 것이다. 맨발로 교실에 있었다. 규덕이 보고 실내화를 가지고 오라고 전화를 했는데도 규덕이는 실내화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다. 


학교에서 계속 맨발로 지냈다. 집에 와서 물어보니 학교에 가지고 왔는데 잊어버리고 나한테 안 준 것이었다. 다음부터는 꼭 챙겨야지. 

-그렇게도 정신이 없었니? 6.25땐 아기를 업고 간다는 게 베개를 업고 피난을 간 사람도 있었다더라. 

초등학교 5학년인 조카 규애가 연필로 쓴 일기 밑에는 빨간색 글씨의 짧은 글들이 있었다. 물으니 담임선생님께서 써 주시는 것이란다. 

 


반 아이들 일기도 마찬가지란다. 흔희 ‘검’자 도장을 찍어 주는 게 예사인줄 알았는데 그 선생님은 달랐다. 규애의 허락을 받고 일기를 함께 보았다. 규애의 일기 밑에는 늘 선생님의 느낌이 적혀있었다. 메아리처럼. 

학급신문을 만들고 좋아서 ‘헤헤헤’로 끝난 일기 밑에는 ‘혀까지 내놓고 웃는 거니? 정말 학급신문이 확 달라 보인다. 규애가 쓱쓱 그려놓은 게 아주 예뻐 보인다. 선생님이 보기엔 우 리 반 것이 가장 잘 만든 것 같다. 하하하.’

새로 사권 친구가 욕을 잘하는 것을 보고 ‘난 왜 사귀는 친구마다 그런지 모르겠다’고 쓴 일기 밑에는 ‘친구는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야. 서로 노력하다 보면 진정한 친구가 되는 거란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을 보도록 하렴.’ 


아빠가 구두를 사준 얘기를 쓴 일기 밑에는 ‘아침 조회시간에 규애 구두가 예쁘다 생각했는데 그게 새로 산 것이구나. 너무 자랑하지 마. 친구들이 샘 낼 테니까.’ 


¤+¤ 무지무지 ¤라고 날씨를 적은 날은 ‘날씨표현이 재미있구나. 그런 공식이 있는 줄 몰랐어.’라고 적혀 있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일상과 느낌들을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받고 있었다. 


묵묵히 주어진 길을 사랑으로 걷는 일, 새삼 아름다웠다.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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