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강의 겨울



눈이 오면 가장 신나는 게 아무래도 아이들과 개들이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동네 개들은 개들대로 모여들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등허리에 옷 하나 걸치곤 질금질금 되새김질하며 한가로이 쉬고 있는 소나 그 옆 송아지에게 장난을 걸기도 한다. 껌벅이는 소의 큰 눈에도 내리는 눈이 가득하다.


아이들을 가장 아이답게 하는 것도 눈이다. 대번 마음이 열리고 열린 마음엔 날개가 달린다. 날리는 눈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영혼들, 여기 저기 자기 키만 한 눈사람이 세워지고, 툭툭 던지기 시작한 눈뭉치가 어느새 편싸움이 된다. 하하하, 하얀 입김, 하얀 웃음들, 온통 하얀 세상이 된다.


토끼 발자국을 쫒아 올무를 놓기도 하고 틈틈이 올무를 확인하곤 한다. 성급하면 안 되지, 성급하면 안 돼, 빈 올무를 볼 때마다 자신에게 이르고는 한다.


낙엽송 곧게 솟아오른 앞개울 건너 담안 골짜기, 사과 과수원 뒤편 백수네 담배 밭 바로 옆, 백수 네가 돌봐온 산소자리 언덕, 참 잔디 고운 곳. 눈이 오면 그곳은 천연 스키장이 된다. 비료 부대 위에 주저앉아 언덕 꼭대기부터 신나게 달려 내려오기도 하고, 내려오다 넘어지면 신나게 언덕을 구르고, 그렇게 눈사람 되고, 혼자서도 타고 앞자리에 동생도 태우기도 하고, 오줌 싼 듯 모두의 엉덩이는 펑퍼짐히 젖어들고. 


막걸리 빈병이나 플라스틱 소주병 또한 아이들의 스키 도구. 양쪽 발을 하나씩 올리고 앞으로 향하면 왜 그리 속도가 빠른지. 어, 어, 어, 어 대다 중심을 잃고.


종설아, 종하야, 정희야, 밥 먹어라. 골짜기 울리며 엄마, 할머니 불러대는 소리에 아쉬운 듯 집으로 향하면 집마다 굴뚝마다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들.


곱은 손을 불어 녹여 저녁을 먹고 쓰러지듯 잠이 들면 하얀 꿈은 밤새 하얗게 이어지고 다음날도 하얀 세상, 아이들과 개들은 다음날도 바쁘다.

눈이 오면 온통 하얀 세상, 단강의 겨울은.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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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버림을 받지 않기 위하여



“주님, 제가 아직 짓지 않은 많은 죄에서 저를 지켜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저지른 모든 죄를 슬퍼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만난 모든 사람들, 그들이 저의 친구이든지 적이든지, 그들을 만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들 모두가 결국 제 친구로 되기를 기도합니다.”(Margery Kempe, 1373-1440)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무더위를 잘 견디고 계시는지요? 날이 얼마나 더운지 모기들도 활동을 쉬고 있다지요? 물것을 많이 타는 분들에게는 이 여름이 주는 작은 위안인 것 같습니다. 낮에는 차마 움직일 생각이 들지 않아 이른 새벽에 공원을 걷고 있습니다. 걷는 시간은 기도의 시간인 동시에 얼크러진 생각의 타래를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한낮에 땀을 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안쓰러운 동시에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가 누리고 사는 것들이 실은 다른 누군가의 수고의 결실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하계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올림픽은 편안한 거실에서 즐기는 소일거리이지만, 몸과 마음을 단련하며 그날만을 학수고대했던 선수들에게는 수확의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메달을 따든 따지 못하든 일단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모든 선수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싶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무관중 경기가 많다고 합니다. 관중들의 박수소리를 듣지 못하며 고독한 싸움을 하는 이들을 크게 위로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단련된 몸이 그리고 고도로 집중된 정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는 표지들입니다. 나이가 이미 전성기를 지난 장년의 선수들도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운동 경기도 즐기지만, 그들이 빚어내는 삶의 이야기에 더 크게 반응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은 말 그대로 평화의 제전이었습니다. 올림픽이 열리면 전쟁도 중단하고,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은 적대적인 국가를 통과할 때도 그 안전이 보장되었습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올림피아 제전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르테미시온 해전이 벌어져 수많은 사상자가 나고 식량도 바닥을 드러내자, 소수의 (그리스)아르카디아인들이 일자리를 얻으려고 페르시아 진영으로 탈주를 감행했습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군의 행동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그들을 신문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리스군이 올림피아제전을 벌이면서 체육 경기와 전차 경주를 관람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경기의 상품이 무엇이냐고 묻자 탈주자들은 승리자들에게는 올리브 가지로 엮은 관이 수여된다고 답했습니다. 상품으로 금품이 아닌 화환이 수여된다는 말을 듣은 트리탄타이크메스는 탄식하듯 말했습니다.

“아 마르노니오스여, 그대는 어찌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필이면 이런 인간들과 싸우게 만들었는가? 금품이 아닌 명예를 걸고 경기를 행하는 자들과!”(헤로도토스, <역사 下>, 박광순 옮김, 범우사, p.305)

물론 이 기록은 페르시아의 전제정치와 그리스의 자유 정신을 대조하기 위한 헤로도토스의 의도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물질적인 보상보다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그리스 정신임을 자부심을 담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객관적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역사에 대한 기록자인 동시에 교육자이기도 합니다. 후대의 사람들의 DNA 속에 그런 도도한 자유혼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은 시대입니다. 건강이 유사 종교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말을 듣고 살았습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뜻으로 자주 인용되는 이 말은 로마시대 문장가인 유베날리스(Decimus Junius Jubenalis)의 풍자시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의 원래 의미는 조금 다른 듯합니다. 라틴어의 표현을 직역하면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기를 기원해야 할 일이다”가 된다고 합니다. 이 말의 속뜻은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김용석, <일상의 발견>, 푸른숲, p.139). 몸을 단련한다고 하여 곧 정신이 맑아지거나 아름다워지지는 않습니다. 그 둘은 함께 가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올림픽 경기에 빗대 설명했습니다. 올림픽은 그 시대에도 사람들의 큰 관심을 받는 행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사람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고전 9:24) 꼭 신앙생활의 목표가 ‘상’을 받는 것일 필요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그 목표 못지않게 과정이 중요합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고백’을 ‘삶’으로 번역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삶은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일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음식을 먹고,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고, 일을 하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네 일상입니다. 일상은 너무나 평범하고 반복적입니다. 사람들은 일상을 지겹게 느끼기에 뭔가 짜릿하고 특별한 경험을 구하거나, 잠시라도 일상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사실 그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마치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일상이야말로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 일상을 충실히 사는 것이 아름다운 삶의 비결입니다. 김용석 교수의 말이 우리 폐부를 찌릅니다. 

“적지 않는 사람들에게 일상생활은 새콤달콤 ‘잘사는’ 삶이 아니라, ‘남들에게 좀더 잘사는 것처럼 보이려고’ 아등바등하는 삶이거나 ‘이미 잘살고 있다’는 것을 크렁크렁 과시하는 삶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의미 있는 일상이 그들에게서 멀리 있기 때문이다.”(김용석, 앞의 책, ‘머리말’ 중에서)

‘만일 예수님과 동행할 기회가 주어진다면’이란 가정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복음서 가운데서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들을 상세하게 설명해달라고 부탁할까?’ ‘도무지 풀리지 않는 신정론의 문제를 여쭤볼까?’, ‘당신을 배신하기로 이미 마음 먹은 유다의 발을 닦아주실 때 심정이 어떠셨는지 여쭤볼까?’ 제게 정말 그럴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깊은 침묵 속에서 예수님의 일상을 관찰하고 싶습니다. 주무시는 모습, 음식을 잡수시는 모습, 기도하는 모습, 길을 걸으시는 모습, 가련한 이들과 만날 때의 눈빛, 그리고 영혼의 목마름에 시달리는 이들을 향해 가만가만 말을 건네시는 주님의 음성, 귀신을 꾸짖으실 때의 어조, 적대적인 질문을 하는 이들을 대하실 때의 호흡... 누군가의 일상을 보면 그의 내면을 살필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 삶을 뒤흔들어놓는 것은 누군가의 심오한 말이나 이론이 아니라, 정성스럽게 자기 일상을 살아내는 이들의 아름다움에 눈을 뜰 때가 아니던가요? 신앙생활은 일상과 무관한 가외의 생활이 아니라, 일상 속에 하나님의 뜻이 배어들게 하는 것입니다.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훈련 없는 거룩한 삶은 불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독려하기 위해 믿음을 올림픽 경주에 빗대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경기에 나서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말합니다. 절제란 자기 훈련 혹은 자기 통제를 의미하지만 실은 많은 것을 포기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편안하게 지내고 싶은 욕구,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욕구, 느긋한 시간을 누리고 싶은 욕구, 친한 벗들과 어울려 놀고 싶은 욕구, 이기적으로 처신하고 싶은 욕구. ‘절제’는 욕망과의 거리두기입니다. 바울이 그렇게도 위대한 전도자로 살았던 것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치열한 노력 덕분입니다. 그는 자기 몸을 쳐서 굴복시켰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게까지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고전 9:27b)

자기 기만에 빠져 결국 영혼이 텅 빈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그랬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버림을 받는다’는 말이 통렬하게 다가옵니다. 스스로 잘 믿는다 생각하면서도 결국은 자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올림픽 선수들은 피땀을 흘리며 훈련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기 위한 것이라 말합니다. 아마 요즘 같으면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 겁니다. 사실 이 자극적인 표현은 신앙의 길을 걷는 이들이 얻게 될 ‘썩지 않을 월계관’을 더 도드라지게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 표현일 겁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절제하면서 자기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운동선수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욕망과의 거리 두기가 더욱 필요한 시기입니다. 교우들의 애경사가 있어도 공동체가 함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매미 울음소리가 여름을 처연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배롱나무에 고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저마다 한 세상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투덜거리지 말고, 기쁘게, 깨어서 우리 일상을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한 주간도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빕니다. 일상 속에서 문득 주님의 현존을 알아차리는 기쁨도 누리시기를 빕니다. 평화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2021년 7월 29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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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는 적으나 존재는 넉넉하게



흙벽돌로 지은 허름한 방, 임시로 마련된 예배처소도 그러하고 내 기거할 방도 그러하다.
문득 생각하니 묘하다.


동화작가 권정생에 대한 얘길 듣고부터는 흙벽돌집에 대한 기대를 은근히 가져왔지 않았는가. 


맑게 설움이 내비치는 사람, 그는 동내 청년들이 빌뱅이언덕에 지어준 작은 흙벽돌집에서 꽃과 함께 생쥐와 함께 살고 있다.


겉은 더 없이 허술해도 방안은 아늑한 집, 다른 건 없어도 좋아하는 책들이 빼곡히 들어있는 곳, 많진 않지만 책을 둘러쌓으니 마음속 바래왔던 기대 하나가 이루어진 셈이다. 낮에도 문을 닫으면 불을 켜야 하지만 족하다.


작은 카세트임에도 FM 방송이 두개씩이나 나오고, 커피와 촛불과 노래가 있으니까. 고요한 시간은 보다 창조적일 수 있을 테니까. 책상 앞 벽에 “所有는 적으나 存在는 넉넉하게”라 써 붙인다.

<얘기마을>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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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름을 안다는 것



웬만한 지도에는 나와 있지도 않은 이곳 단강. 걸어서도 하루에 강원도, 충청북도, 경기도, 삼도를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곳.


앞쪽으론 남한강이 흐르고 뒤쪽엔 이름 모를 산들이 그만그만한 크기로 동네를 품고 있다.


단군이 목욕해서 단강이 되었다고 떠나올 땐 그렇게 들었는데 와서 보니 그게 아니다. 단종이 피난 가다 잠시 쉬어갔다 해서 생긴 이름이란다. 아쉽다, 먼저 번 것이 훨씬 그럴듯한데.


단강리는 끽경자와 섬뜰과 작실 3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이름이 재미있다. 끽경자는 경자라는 여자가 강물에 빠져 죽어 붙여진 이름이고, 섬뜰은 마을의 4면이 강과 저수지 그리고 두개의 개울로 감싸져 있어 섬뜰이 됐고, 작실은 作室이라 쓰는데 ‘집을 짓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다.


내 숙소는 섬뜰에 있는데 여차하면 난 孤島에 갇히는 게 아닐까 싶다. 앞으로도 동네 이름과 길, 그리고 산이름 등에 관심을 가져야겠다. 


민요나 노동요 등도 찾아 봐야지. 새로운 이름을 안다는 것, 그리고 그 이름에 익숙해진다는 것. 그게 삶의 과정일 테니까. 성숙을 향한.

<얘기마을>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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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소본능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방앗간의 방아소리가 며칠째 끊이지 않는다. 방앗간은 설날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고무 함지박을 줄 맞춰 내려놓고 사람들은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대하는 밝은 표정들. 쌀을 빻기도 하고, 가래떡을 뽑기도 한다. 지나치는 길에 잠시 들여다 본 방앗간엔 구수한 냄새와 함께 설날에 대한 기대가 넘쳐 있었다.

강냉이 튀기는 기계가 있는 반장님 댁도 바빴다. 쌀, 옥수수, 누룽지 등이 빙글빙글 손으로 돌리는 기계 속에서 하얗게 튀겨져 나왔다.


“뻥이요!” 


소리를 치면 둘러선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귀를 틀어막고, 곧이어 “빵!” 대포 소리와 함께 하얗고 구수한 연기가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작실 단강리 섬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김영옥 집사님, 지금순 집사님 집은 콩으로 두부를 직접 만들었다. 작실엔 돼지를 두 마리 잡았는데도 모자라 또 잡기로 했단다. 엿이며, 강정이며, 만두며, 감주며, 집집마다 하얀 연기 피워 올리며 설 준비에 모두들 바빴다. 벌써부터 설빔을 차려입고 고향을 찾는 이들의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흩어졌던 가족들이 고향에 모여 가족임을 확인하고, 그새 늙으신 어버이 주름이며 흰머리 안쓰럽게 헤아리며, 집집마다 찾아 절을 하며 한 이웃임을 확인하는 설.


“아니 니가 아무개 아녀?”
“네 맞습니다.”
“많이 컸구먼, 몰라보겠어. 그래 어떻게 지냈누?”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자, 절 받으십시오.” 
“아니 절은 무슨 절, 됐어 됐어 봤으면 됐지.”


그럴수록 덥석 절을 한다. 절을 하는 이, 절을 받는 이 훈훈한 마음속 그렇게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그 보이지 않는 끈이 곧 우리네 인생임을, 고향이란 이런 곳이지, 생의 뿌리를 깨닫는다.


어디 코끼리나 여우나, 연어뿐이겠는가. 누울 곳을 찾는 귀소본능이란 어쩜 다른 어느 동물보다도 인간에게 주어진 본능인지도 모른다. 설은 그 귀소본능의 확인이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의 이유로도 돌아갈 곳이 있는 이는 행복한 사람이다. 많은 걸 갖고도 돌아갈 곳이 없는 이도 더러는 있는 법이니까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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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歸鄕)



잠깐 이야기를 들었을 뿐, 한 번도 당신을 뵌 적은 없습니다. 그래도 당신 떠나는 날 한쪽 편 고즈넉이 당신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향년 92세, 그 세월의 길이는 얼마쯤일까요. 병원이었건, 양로원이었건, 혹은 노상(路上)이었건 사람들 말 당신 쓰러진 곳 어디라 하더라도 당신은 돌아와 고향 땅에 묻힙니다.

“어-야-디-야”


마을 청년 모자라 당신 조카까지 멘 상여를 타고 비 내려 질퍽한 겨울 길을, 오랜만에 물길 찾은 내를, 가파른 산길을 걸어올라 마침내 당신 자리에 누우셨습니다.


꽃가마 타고 와 연분 맺었을 먼저 가신 할머니, 이번엔 당신이 꽃상여 타고 할머니 곁을 찾으셨습니다.            


사방 편하게 산들이 달려 당신 살아온 마을을 품고, 흐르는 남한강 저만치 한 자락 굽어보이는 곳, 문득 당신이 행복하다 싶었습니다.

돌아와, 끝나는 돌아와 당시 키워준 고향 땅에 눕는 당신의 귀향. 대한(大寒)을 하루 앞두고도 햇볕이 따뜻했습니다. 고향 품에 아주 안기는 당신을 반기 듯.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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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때론 연극이 보고 싶다.
영화가 보고 싶기도 하다.
때로는 연주회 생각이 나고
합창을 듣고 싶기도 하다.
그림 구경을 하고 싶을 때도 있다.
큰 서점에 들러 책 구경을 하고 싶기도 하다.
문득 생각 없이 인파속에 묻히고 싶기도 하다.

때로는
욕심처럼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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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



섬뜰속 속회인도를 부탁받았다. 새로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용자 할머니 네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예배를 드리곤 부적을 떼어 달라는 것이었다. 부적을 떼어 달라는 부탁이 하나님을 보다 확실하게 섬기려는 할머니의 뜻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할머니의 믿음은 충분히 본받을 만하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럴듯한 부적을, 부적이라 부르지는 않지만 부적의 의미를 가진 것들을 거리낌 없이 소유하는 이도 적지 않으니까.


부적을 잘못 떼면 부적 뗀 사람이 되게 앓게 된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기억하기 때문이었을까, 부적을 뗀다는 말을 듣고 드리는 예배는 왠지 모를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찬송도 그랬고 기도도 그랬다. 더욱 힘찼고 더욱 간절했다.


예배를 마치고 부적을 뗐다. 기다란 것 하나, 그보다 작은 것 두 개, 나란히 붙어있는 세 개의 부적을 조심스레 뜯어냈다. 잘못 뜯어서 한 조각이라도 남으면 그만큼의 귀신이 안 떠나고 남아 안 좋은 힘을 쓸까 싶은 마음으로.


“그걸 8만원 주고 사왔어요.”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 잘 생각하셨어요. 이젠 하나님이 돌보실 거예요.”


함께 예배를 드린 교우들이 혹 부적 떼어낸 할머니의 마음이 불안할까 싶었던지 권면의 말을 계속 건넸다. 부적 떼어 낸 자리에 십자가나 예수님 그림이라도 사다 걸어드리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당분간 그만 두기로 했다. 그것을 또 하나의 부적으로 여기시는 건 아닐까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할머니, 늘 기도하세요. 하나님께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그게 기도에요.”


백발의 할머니, 할머니는 네 명의 손주를 키우고 계신다. 작년에 젊은 나이의 아들이 죽고 며느리는 어디론가 돈 벌러 나갔다. 말씀은 안 하시지만 할머니의 마음은 늘 눈물일 게다. 삶이란 이런 것인지, 안개 낀 듯 퀭하니 눈물일 게다.


“할머니, 할머니 이름이 뭐예요?” 


그저 어린아이가 응석 떨 듯 할머니께 이름을 물었다. 새삼스러운 듯 눈을 크게 뜨고 부끄러운 듯 대답하시는 할머니. 


“안숙자에요.”


안숙자라는 말에 김정옥 집사님은 “이숙자랑 이름이 똑같네,” 하며 크게 웃는다. 이숙자 씨는 끽경자에 살고 있는 교우 중 한 분이다. 모두들 용자 할머니로 알고 있을 뿐, 그리고 그렇게 부르고 있을 뿐 할머니 이름이 안숙자 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으리라. 할머니는 ‘안숙자’란 당신의 이름을 누군가 불러준다는 것의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소중한 경험을 오늘 새롭게 맛보리라. 


꼬깃꼬깃 호주머니에 넣어온 부적을 집에 돌아와 불에 태운다. 손에 들고 하나씩 태운 부적, 여느 종이와 다름없이 쉽게 타고 말았다.

 - 그래. 쉽게 불 타 없어지는 건 신앙이 아니야.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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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다리



“삼라만상은 모두 상이하고 독특하고 희귀하고 낯설구나./무엇이나 변덕스럽고 점철되어 있나니(누가 그 이치를 알까?)/빠르거나 느리고, 달거나 시고, 밝거나 어둡구나./이는 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분이 낳으시는 것이니, 그분을 찬미할지어다.”(제라드 홉킨스, <홉킨스 시선>, 김영남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p.88, ‘알록달록한 아름다움’ 중에서)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삼복더위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습니다. 초 ·중복이 지났고 이제 대서 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마른 장마도 끝이 났다지요? 요즘 하늘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새털구름이 드리운 하늘은 뭔가 목가적 세계의 문처럼 보입니다. 저녁 노을 또한 장관입니다. 지난 월요일 늦은 오후에 공원 근처를 걷고 있는데, 여성 몇 분이 휴대전화 카메라로 연신 하늘을 찍고 있었습니다. 제 시선도 저절로 위를 향했습니다. 하늘 저편에 선명한 쌍무지개가 걸려 있었습니다. 코로나 재확산으로 위축된 마음을 위로하듯 무지개는 그곳에서 땅을 가만히 감싸고 있었습니다.

무지개 하면 떠오르는 것이 노아 시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속속들이 썩고 무법천지로 변한 세상을 보며 땅 위에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땅을 멸하겠다고 다짐하십니다. 노아가 육백 살 되는 해의 둘째 달, 열이렛날, 땅 속 깊은 곳에서 큰 샘들이 모두 터지고, 하늘에서는 홍수 문들이 열려서 밤낮 비가 쏟아졌습니다. 사십 일 밤낮 내린 비로 코로 숨을 쉬며 사는 것들이 다 죽었습니다. 노아와 더불어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과 짐승들만 살아남았습니다.

홍수가 끝나자 하나님은 노아와 함께 한 사람들, 그리고 숨쉬는 모든 생물 사이에 새로운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애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의 표로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셨습니다. 무지개야말로 살아있는 모든 것과 맺은 언약을 상기시키는 기표인 셈입니다. 제게도 예기치 않은 시간에 만났던 무지개의 기억이 있습니다.

 

 


군목으로 최전방에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저는 모터사이클을 타고 GOP(general outpost, 일반 전초) 부대를 방문하여 예배를 인도하곤 했습니다. 철책선을 담당하는 작은 단위 부대였기에 예배당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식당의 한 켠에 모여 앉아 함께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올리는 시간이 참 복되게 느껴졌습니다. 그날도 저를 돕는 군종병은 기타를 치며 그의 주특기 복음송을 불렀습니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약함을 사랑으로 돌봐주시네/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고적감이 느껴지는 그 시간과 장소에서 이 노래와 만난 병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도 뜨거워졌습니다. 분단의 아픔이 크게 느껴졌고, 한반도에 평화의 꽃이 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는 검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니 구름이 걷혀 있었고, 하늘 저편에 커다란 무지개가 걸려 있었습니다. 무지개는 한반도를 동서로 갈라놓고 있는 철책선을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제 눈에는 무지개 다리처럼 보였습니다. 병사들은 ‘오오!’ 감탄사를 내뱉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모두의 마음은 이미 하나였습니다. 근 40년 가까운 세월 저편의 일이지만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그 날의 감동이 컸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기억이 있습니다. 2004년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방 교역자들과 이스라엘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이집트 여정을 마치고 이스라엘의 타바 국경 검문소에 당도한 순간부터 우리 일행은 몹시 긴장된 시간을 보냈습니다. 국경에서 폭발물로 의심되는 가방이 발견되어 국경이 폐쇄되었고, 우리는 뙤약볕 밑에서 몇 시간을 대기해야 했던 것입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아일라트를 지나 숙소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11시가 넘었습니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나 CNN 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가 간밤에 지나온 해변 마을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 많은 사상자가 났다는 보도였습니다. 그 땅이 분쟁의 땅이라는 사실이 현실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며칠 머무는 동안 우리 일행은 팔레스타인에 속한 유적들을 보기 위해 베들레헴에 다녀왔습니다. 말로만 듣던 6미터 높이의 분리의 장벽을 보았습니다. 체크 포인트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시달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팠습니다. 성경의 세계로 시간 여행을 떠난 셈이었지만 제 마음은 온통 그 땅이 겪고 있는 시련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유대 광야를 지날 때 몸과 마음이 몹시 고단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저 멀리 무지개가 보였습니다. 흐릿하긴 했지만 분리 장벽 위로 높이 솟아있는 것은 무지개가 분명했습니다. 모두가 그 광경을 보며 놀랐습니다. 마치 어떤 하늘의 메시지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무지개는 음악용어 ‘슬러slur’ 곧 이음줄을 닮았습니다. 슬러는 악보에서 음높이가 다른 둘 또는 그 이상의 음표의 위나 아래에 긋는 호선을 이르는 말입니다. 음과 음 사이를 끊어지지 않도록 매끄럽게 연주하여 선율감을 주라는 표시입니다. 사람들이 무지개 앞에 멈춰서는 것은 어쩌면 분열된 세상에서 지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멋대로의 상상입니다. 무지개는 꿈을 꾸도록 만듭니다. 워즈워스의 ‘무지개’는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시입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
(워즈워스, <무지개>, 유종호 옮김, 민음사, p.18)

무지개를 보고도 가슴이 설레지 않는다면 그의 영혼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어른의 아버지인 까닭은 ‘경탄’할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깃든 신비에 눈을 뜰 때 사람은 아름다워집니다. 경탄의 순간은 우주의 맥박 소리를 듣는 시간이고, 표현 불가능한 세계로 진입하는 시간입니다. 경탄을 잃어버릴 때 세상은 처리해야 할 일이 되고, 우리를 위협하는 적대적인 공간으로 변합니다. 최근 며칠 동안 많은 이들이 SNS에 무지개, 구름, 노을 사진을 올렸습니다. 그 놀라운 광경과 만났던 순간의 행복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기 때문일 겁니다.

다시 노아 시대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무지개는 홍수 이후에 나타났습니다. 모든 생명이 멸절 당한 이후에 말입니다. 기후 위기에 대한 경고의 나팔소리가 울린 지 이미 오래건만 우리는 벌써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다들 큰일났다고 말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짐짓 눈을 감고 있는 형편입니다. 위기의 시간은 삶의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겨울이 되기 전에 나뭇잎을 떨구는 나무의 지혜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풍요의 환상 속에 오래 머물수록 지구는 더욱 망가질 것입니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지역을 휩쓴 대홍수로 많은 인명피해가 났습니다. 재산 피해의 규모도 천문학적입니다. 사회적 안전망이 잘 갖춰졌다고 평가받는 유럽 국가들도 대규모 자연재해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미국의 서부 지역은 매해 산불과 가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알라스카와 캐나다는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뜨거운 여름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기후 변화로 인해 제트 기류가 약화되어 열돔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라지요? 우리 눈앞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무지개는 모든 살아 숨쉬는 것들이 죽임을 당했던 그 쓰라린 기억을 되살리라는 하늘의 메시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는 정말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비상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해야 합니다. 풍요로움에 길들여진 이들은 감사를 모릅니다. 아낌과 돌봄을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이들이라야 삶의 비의에 눈을 뜨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일상적 삶의 자리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당분간 비대면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불편하고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성도들의 코이노니아가 약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접속을 유지하고, 기도 중에 서로를 기억해야 합니다. 어려운 시간을 지나고 있는 교우들은 언제라도 제게 메시지를 보내주십시오. 함께 고난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어린이들과 청소년, 젊은이들의 신앙 교육이 원활하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 안타깝습니다. 부모님들께서 적극적 관심을 가지고 교회학교에서 제공하는 영상자료를 활용하여 자녀들과 복된 시간을 마련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휴가철이 되었습니다. 안전하고 유익하고 즐거운 휴가를 즐기실 수 있기를 빕니다. 주님의 사랑이 교우 여러분의 가정마다 넘치시기를 빕니다. 그리스도의 평화.

2021년 7월 22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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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직행버스



농번기 땐 거의 텅 비어 다니던 버스가 요즘은 만원이다. 일 쉴 때 다녀올 데 다녀오고자 하는 사람들로 때론 발 딛을 틈이 없을 정도다.


살림도구를 사러 나가는 이, 바쁜 일 때문에 미뤘던 병 치료 받으러 나가는 이, 멀리 사는 자식 네 다니러 가는 이, 시내바람이라도 쐴 겸 약주 한 잔 하러 가는 이들도 있다.


이래저래 원주를 자주 오가야 하는 나로선 때론 자리가 없고, 때론 자리에서 일어서야 하지만 그래도 붐비는 버스가 좋다.


아직도 농촌에 남은 사람들. 땅 끝에 남아 그 땅 지키는 사람들. 주름진 얼굴, 허름한 옷차림이라 하여도 그들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위험한줄 알면서도 끝가지 진지를 사수하는 병사처럼 떳떳하고 당당하다.

웃음과 이야기로 생기 가득한 단강의 겨울 직행버스, 모처럼 사람 사는 마을이 된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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