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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42

단강의 겨울 눈이 오면 가장 신나는 게 아무래도 아이들과 개들이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동네 개들은 개들대로 모여들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등허리에 옷 하나 걸치곤 질금질금 되새김질하며 한가로이 쉬고 있는 소나 그 옆 송아지에게 장난을 걸기도 한다. 껌벅이는 소의 큰 눈에도 내리는 눈이 가득하다. 아이들을 가장 아이답게 하는 것도 눈이다. 대번 마음이 열리고 열린 마음엔 날개가 달린다. 날리는 눈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영혼들, 여기 저기 자기 키만 한 눈사람이 세워지고, 툭툭 던지기 시작한 눈뭉치가 어느새 편싸움이 된다. 하하하, 하얀 입김, 하얀 웃음들, 온통 하얀 세상이 된다. 토끼 발자국을 쫒아 올무를 놓기도 하고 틈틈이 올무를 확인하곤 한다. 성급하면 안 되지, 성급하면 안 돼, 빈 올무를 볼 때마다 자신에.. 2021. 7. 31.
스스로 버림을 받지 않기 위하여 “주님, 제가 아직 짓지 않은 많은 죄에서 저를 지켜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저지른 모든 죄를 슬퍼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만난 모든 사람들, 그들이 저의 친구이든지 적이든지, 그들을 만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들 모두가 결국 제 친구로 되기를 기도합니다.”(Margery Kempe, 1373-1440)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무더위를 잘 견디고 계시는지요? 날이 얼마나 더운지 모기들도 활동을 쉬고 있다지요? 물것을 많이 타는 분들에게는 이 여름이 주는 작은 위안인 것 같습니다. 낮에는 차마 움직일 생각이 들지 않아 이른 새벽에 공원을 걷고 있습니다. 걷는 시간은 기도의 시간인 동시에 얼크러진 생각의 타래를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한낮에 땀을 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안쓰러운 .. 2021. 7. 29.
소유는 적으나 존재는 넉넉하게 흙벽돌로 지은 허름한 방, 임시로 마련된 예배처소도 그러하고 내 기거할 방도 그러하다. 문득 생각하니 묘하다. 동화작가 권정생에 대한 얘길 듣고부터는 흙벽돌집에 대한 기대를 은근히 가져왔지 않았는가. 맑게 설움이 내비치는 사람, 그는 동내 청년들이 빌뱅이언덕에 지어준 작은 흙벽돌집에서 꽃과 함께 생쥐와 함께 살고 있다. 겉은 더 없이 허술해도 방안은 아늑한 집, 다른 건 없어도 좋아하는 책들이 빼곡히 들어있는 곳, 많진 않지만 책을 둘러쌓으니 마음속 바래왔던 기대 하나가 이루어진 셈이다. 낮에도 문을 닫으면 불을 켜야 하지만 족하다. 작은 카세트임에도 FM 방송이 두개씩이나 나오고, 커피와 촛불과 노래가 있으니까. 고요한 시간은 보다 창조적일 수 있을 테니까. 책상 앞 벽에 “所有는 적으나 存在는 넉넉하.. 2021. 7. 29.
새로운 이름을 안다는 것 웬만한 지도에는 나와 있지도 않은 이곳 단강. 걸어서도 하루에 강원도, 충청북도, 경기도, 삼도를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곳. 앞쪽으론 남한강이 흐르고 뒤쪽엔 이름 모를 산들이 그만그만한 크기로 동네를 품고 있다. 단군이 목욕해서 단강이 되었다고 떠나올 땐 그렇게 들었는데 와서 보니 그게 아니다. 단종이 피난 가다 잠시 쉬어갔다 해서 생긴 이름이란다. 아쉽다, 먼저 번 것이 훨씬 그럴듯한데. 단강리는 끽경자와 섬뜰과 작실 3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이름이 재미있다. 끽경자는 경자라는 여자가 강물에 빠져 죽어 붙여진 이름이고, 섬뜰은 마을의 4면이 강과 저수지 그리고 두개의 개울로 감싸져 있어 섬뜰이 됐고, 작실은 作室이라 쓰는데 ‘집을 짓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다. 내 숙소는 섬뜰에 있는데 여차.. 2021. 7. 28.
귀소본능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방앗간의 방아소리가 며칠째 끊이지 않는다. 방앗간은 설날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고무 함지박을 줄 맞춰 내려놓고 사람들은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대하는 밝은 표정들. 쌀을 빻기도 하고, 가래떡을 뽑기도 한다. 지나치는 길에 잠시 들여다 본 방앗간엔 구수한 냄새와 함께 설날에 대한 기대가 넘쳐 있었다. 강냉이 튀기는 기계가 있는 반장님 댁도 바빴다. 쌀, 옥수수, 누룽지 등이 빙글빙글 손으로 돌리는 기계 속에서 하얗게 튀겨져 나왔다. “뻥이요!” 소리를 치면 둘러선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귀를 틀어막고, 곧이어 “빵!” 대포 소리와 함께 하얗고 구수한 연기가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작실 단강리 섬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김영옥 집사님, 지금순.. 2021. 7. 27.
귀향(歸鄕) 잠깐 이야기를 들었을 뿐, 한 번도 당신을 뵌 적은 없습니다. 그래도 당신 떠나는 날 한쪽 편 고즈넉이 당신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향년 92세, 그 세월의 길이는 얼마쯤일까요. 병원이었건, 양로원이었건, 혹은 노상(路上)이었건 사람들 말 당신 쓰러진 곳 어디라 하더라도 당신은 돌아와 고향 땅에 묻힙니다. “어-야-디-야” 마을 청년 모자라 당신 조카까지 멘 상여를 타고 비 내려 질퍽한 겨울 길을, 오랜만에 물길 찾은 내를, 가파른 산길을 걸어올라 마침내 당신 자리에 누우셨습니다. 꽃가마 타고 와 연분 맺었을 먼저 가신 할머니, 이번엔 당신이 꽃상여 타고 할머니 곁을 찾으셨습니다. 사방 편하게 산들이 달려 당신 살아온 마을을 품고, 흐르는 남한강 저만치 한 자락 굽어보이는 곳, 문득 당신이 행복하.. 2021. 7. 26.
때로는 때론 연극이 보고 싶다. 영화가 보고 싶기도 하다. 때로는 연주회 생각이 나고 합창을 듣고 싶기도 하다. 그림 구경을 하고 싶을 때도 있다. 큰 서점에 들러 책 구경을 하고 싶기도 하다. 문득 생각 없이 인파속에 묻히고 싶기도 하다. 때로는 욕심처럼 - 1989년 2021. 7. 24.
부적 섬뜰속 속회인도를 부탁받았다. 새로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용자 할머니 네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예배를 드리곤 부적을 떼어 달라는 것이었다. 부적을 떼어 달라는 부탁이 하나님을 보다 확실하게 섬기려는 할머니의 뜻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할머니의 믿음은 충분히 본받을 만하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럴듯한 부적을, 부적이라 부르지는 않지만 부적의 의미를 가진 것들을 거리낌 없이 소유하는 이도 적지 않으니까. 부적을 잘못 떼면 부적 뗀 사람이 되게 앓게 된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기억하기 때문이었을까, 부적을 뗀다는 말을 듣고 드리는 예배는 왠지 모를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찬송도 그랬고 기도도 그랬다. 더욱 힘찼고 더욱 간절했다. 예배를 마치고 부적을 뗐다. 기다란 것 하나, 그보다 작은 것 두 개.. 2021. 7. 23.
무지개 다리 “삼라만상은 모두 상이하고 독특하고 희귀하고 낯설구나./무엇이나 변덕스럽고 점철되어 있나니(누가 그 이치를 알까?)/빠르거나 느리고, 달거나 시고, 밝거나 어둡구나./이는 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분이 낳으시는 것이니, 그분을 찬미할지어다.”(제라드 홉킨스, , 김영남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p.88, ‘알록달록한 아름다움’ 중에서)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삼복더위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습니다. 초 ·중복이 지났고 이제 대서 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마른 장마도 끝이 났다지요? 요즘 하늘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새털구름이 드리운 하늘은 뭔가 목가적 세계의 문처럼 보입니다. 저녁 노을 또한 장관입니다. 지난 월요일 늦은 오후에 공원 근처를 걷고 있는데, 여성 몇 분이 휴대.. 2021. 7.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