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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

단강의 겨울

by 한종호 2021. 7. 31.



눈이 오면 가장 신나는 게 아무래도 아이들과 개들이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동네 개들은 개들대로 모여들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등허리에 옷 하나 걸치곤 질금질금 되새김질하며 한가로이 쉬고 있는 소나 그 옆 송아지에게 장난을 걸기도 한다. 껌벅이는 소의 큰 눈에도 내리는 눈이 가득하다.


아이들을 가장 아이답게 하는 것도 눈이다. 대번 마음이 열리고 열린 마음엔 날개가 달린다. 날리는 눈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영혼들, 여기 저기 자기 키만 한 눈사람이 세워지고, 툭툭 던지기 시작한 눈뭉치가 어느새 편싸움이 된다. 하하하, 하얀 입김, 하얀 웃음들, 온통 하얀 세상이 된다.


토끼 발자국을 쫒아 올무를 놓기도 하고 틈틈이 올무를 확인하곤 한다. 성급하면 안 되지, 성급하면 안 돼, 빈 올무를 볼 때마다 자신에게 이르고는 한다.


낙엽송 곧게 솟아오른 앞개울 건너 담안 골짜기, 사과 과수원 뒤편 백수네 담배 밭 바로 옆, 백수 네가 돌봐온 산소자리 언덕, 참 잔디 고운 곳. 눈이 오면 그곳은 천연 스키장이 된다. 비료 부대 위에 주저앉아 언덕 꼭대기부터 신나게 달려 내려오기도 하고, 내려오다 넘어지면 신나게 언덕을 구르고, 그렇게 눈사람 되고, 혼자서도 타고 앞자리에 동생도 태우기도 하고, 오줌 싼 듯 모두의 엉덩이는 펑퍼짐히 젖어들고. 


막걸리 빈병이나 플라스틱 소주병 또한 아이들의 스키 도구. 양쪽 발을 하나씩 올리고 앞으로 향하면 왜 그리 속도가 빠른지. 어, 어, 어, 어 대다 중심을 잃고.


종설아, 종하야, 정희야, 밥 먹어라. 골짜기 울리며 엄마, 할머니 불러대는 소리에 아쉬운 듯 집으로 향하면 집마다 굴뚝마다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들.


곱은 손을 불어 녹여 저녁을 먹고 쓰러지듯 잠이 들면 하얀 꿈은 밤새 하얗게 이어지고 다음날도 하얀 세상, 아이들과 개들은 다음날도 바쁘다.

눈이 오면 온통 하얀 세상, 단강의 겨울은.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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