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노력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절망에서 출발하지 않고도 성공에 이를 수 있다. 실패를 거듭한다 해도,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해도, 일이 애초에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돌아간다 해도, 다시 기운을 내고 용기를 내야 한다.”(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신성림 옮김, 예담, p.82)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입추가 지나면서 아침저녁으로 바람결이 달라졌습니다. 새벽이면 홑이불을 끌어당기게 됩니다. 그렇게 보아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뭇잎도 그 무성하던 초록이 조금 풀이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매미소리도 조금 애잔해졌습니다. 참매미, 말매미, 쓰름매미, 유지매미 소리가 뒤섞여 숲을 가득 채우더니 이제는 제풀에 꺾인 듯 소리 크기가 줄어들었습니다. 계절은 이렇게 어김없이 순환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러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시 104:24) 볼 눈과 들을 귀가 있으면 세상은 온통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난 주일 예배 전에 소개한 척 로퍼의 ‘자연이 들려주는 말’을 다시 소개하고 싶습니다.

나무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뚝서서 세상에 몸을 내맡겨라.
너그럽고 굽힐 줄 알아라.
하늘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음을 열어라. 경계와 담장을 허물어라.
그리고 날아올라라.
태양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돌보아라.
너의 따뜻함을 다른 사람이 느끼도록 하라.
냇물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느긋하게 흐름을 따르라.
쉬지 말고 움직여라. 머뭇거리거나 두려워 말라.
작은 풀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겸손하라. 단순하라.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존중하라.
(<아일랜드 축복 기도>, 로사 신현림 엮음, 사과꽃, p.25)

자연 역시 우리에게는 ‘텍스트’입니다. 고요함에 머물면서 겸허하게 들으려 할 때 자연은 삶의 지혜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연의 소리를 듣거나 배우려 하기보다는, 자연을 닦달하여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얻으려 합니다. 이때 자연은 자원이 됩니다. 한동안 자연은 자기를 착취하는 인간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그 착취가 정도를 넘게 될 때 자연의 보복이 시작됩니다. 빙하가 녹아내리고, 빙하 속에 갇혀 있던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방출되고, 그 때문에 지구의 온난화가 가속화되고, 지구의 한쪽에서는 물난리로 야단이고, 다른 쪽에서는 거대한 산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터키의 산불은 어지간히 잡혔다고 하지만, 그리스의 휴양지인 에비아섬은 산불로 인해 오렌지빛 불길과 잿빛 연기로 뒤덮였다고 합니다. 외신이 전하는 사진 한 장이 사람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공포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살아온 자기 집에 불길이 닿는 것을 바라보며 뒤돌아선 81세 할머니는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계셨습니다. 죄송스러운 표현입니다만 뭉크의 그림 ‘절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기후 위기는 지금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풍요의 신화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습니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가석방을 두고 어떤 이들은 환영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분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경제 논리가 법적 공정을 해쳤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정의를 부정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들으십시오! 저로서는 올바른 것(to dikaion)이란 ‘더 강한 자(ho kreittõn)의 편익(이득: to sympheron)’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플라톤, <국가>, 박종현 역주, 서광사, p.82)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같은 진실을 보여줍니다. 힘이 곧 정의인 세상은 암울한 세상입니다.

성경은 공의와 정의가 세상의 토대라고 말합니다. 공의는 미슈팟(mishpat)을 번역한 말인데, 재판관이 법에 따라 엄정하게 판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규범, 법령이라는 뜻도 내포합니다. 히브리인들은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 하여 치우쳐 두둔해서도 안 되고, 유력한 사람이라 하여 법을 임의로 적용해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뢰 사회의 기초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법적 정의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정의는 쩨다카(tsedaqah)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것은 억압받는 사람에 대한 애타는 동정과 연결되는 개념입니다. 율법은 가난한 자에게 담보물을 잡았을 때는 해가 지기 전에 그것을 돌려주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입니다”(신 24:13b). 이 둘은 함께 가야 합니다.

 

“정의는, 그것이 아무리 정확하게 행사된다 하더라도 비인간화될 때 죽고 만다. 정의는 그것 자체만이 신격화될 때 죽는다. 모든 정의 너머에 하느님의 동정이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정의의 논리는 비인격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정의를 향한 관심은 사랑의 행위다.”(아브라함 J. 헤셸, <예언자들>, 이현주 옮김, 삼인, p.323)

 

정의와 사랑은 함께 가야 하지만, 사랑을 명분으로 정의를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사진/김승범

 


지난 주중에는 여러 건의 장례가 진행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 슬픔 속에 잠긴 유족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장례를 치를 때마다 고인의 삶을 차분하게 돌아보게 됩니다. 함께 지나왔던 시간의 자취를 들추노라면 호탕한 웃음소리도 들리고, 함께 나누던 음식의 맛도 떠오르고, 찬양 속에 함께 머물던 기억도 소환됩니다. 이 광대한 우주 가운데서 지속적인 만남을 유지하며 산 사람은 정말 특별한 인연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나의 존재는 그 동안 만나왔던 이들과의 교섭 속에서 빚어진 무늬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떠난 분들은 이미 우리 곁에 없지만 그분들은 우리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당연한 말이지요? 사람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 놓인 외줄을 타고 삽니다. 가끔은 괴롭고, 또 가끔은 권태롭지만 산 자의 땅에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입니다. 테레사 수녀의 말처럼 잠시 그분의 일을 하다가 가는 게 인생입니다. 그 일에 충실할 때 삶은 든든해집니다.

외국의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잠시 다니러 왔던 청년들이 다시 학교 현장으로 돌아가기 전에 저를 찾아와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이번 학기부터 새롭게 외국에서의 학업을 시작하는 이들도 여럿입니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그곳에서 어떻게 지낼까 염려되기도 하지만, 그렇게 자기 삶을 기획하고 도전하는 젊은이들의 패기가 아름답습니다. 기도를 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자기 세계를 떠났던 아브람입니다. 그는 안전 보장의 끈을 끊었기에 온전히 하나님의 보호 아래 살아야 했습니다. 형 에서에게 돌아갈 복을 가로채고는 두려움 속에서 고향을 등져야 했던 야곱의 신산스러운 마음도 떠오릅니다. 벧엘에서 그는 돌베개를 베고 누웠다가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는 천사들의 모습을 보았고, 어느 곳에 가든지 동행하시겠다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기억 속에 새겨졌을 그 약속의 말씀은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위기로부터 그를 지키는 든든한 방패였을 겁니다.

먼 길을 떠나는 젊은이들에게 가끔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도의 성자 선다씽의 일화입니다. 힌두교 신자였던 그는 어느 날 환상 가운데 주님을 만난 후 예수의 제자가 되어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히말라야 설산을 넘나들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노년이 되었을 때 누가 물었다지요? 몸도 건강치 않은 분이 어떻게 그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산을 넘으실 수 있었느냐고.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체로 이런 뜻의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산을 넘기 전에 정신의 키를 산보다 높이면 산을 넘을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야 할 세상이기도 합니다. 요즘은 많이 부르지 않지만 예전에 많이 불렀던 찬송가 445장이 떠오릅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의 길 되시고/나에게 밝은 빛이 되시니 길 잃어버릴 염려 없네”.

앞에서 인용한 빈센트 반 고흐의 말처럼 우리가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거듭되는 실패로 퇴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지향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지향 그 자체가 용기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상황이 어려울 때도 노래를 부릅니다.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우렁우렁한 찬송 소리가 캄캄한 어둠 속에 처한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비대면 상황 속에 있지만, 중심이신 주님과의 연결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한 주간 동안도 주님의 빛을 받아 건강한 기쁨 누리실 수 있기를 빕니다. 주님의 평화.

2021년 8월 12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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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통하는 한 언어



오후에 초등학교에 다녀왔다. 교장 선생님을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이가 지긋하신, 소탈하신 분이셨다. 자신의 교육철학, 현 교육제도의 문제점, 은사와 제자라는 말, 교육자로서 갖는 보람 등을 말씀하셨다.


어린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교장 선생님의 웃음은 유난히 맑고 많으셨다. 나이가 인간의 순박함을 지워간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쉬운 생각이지 싶다.


전교생이 80명이 채 안 되는 이 곳 단강초등학교. 이곳의 어린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몇 가지 일을 생각해 본다.


무엇보다도 어린이 문집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일 년에 한번쯤이라도 전교생의 글을 모아 하나의 작은 책을 만드는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좋은 선물 되겠지 싶다. 서툴더라도 건강한 글들이 실리리라. 어쩌면 농촌에 대한 가장 꾸임 없는, 정직한 묘사와 고발이 되리라. 때로, 아니 많은 경우 어린이들은 어른보다 정확히 보니까 보람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가끔씩이라도 동화를 써서 어린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어도 좋겠지 싶다. 가능하다면 이곳 농촌 이야기를 담고 싶다.


또 하나는 도서관의 운영이다. 언제라도 어린이들이 책을 빌려 볼 수 있도록 하여 이곳의 어린이들과 학생들이 좋은 책을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티 없이 자라는 어린이들이 좋은 책을 읽는다면 더욱 좋은 결실이 있겠지.


무엇보다도 어린이들을 만나고 싶다. 가슴으로 말이다. 흙과 함께 살면서 흙을 싫어하지 않도록, 끝내 흙을 떠나지 않도록, 흙을 사랑으로 지켜갈 수 있도록 가슴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참된 만남을 위해선 수화 배우듯 말없이도 마음으로 통하는 한 언어를 배워야겠지.

<얘기마을>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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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응달진 씽크대 주방 집기들이 
아파트 베란다로 다 나왔다

물속에서도 물기를 머금을 줄 모르던 집기들이
모처럼 누워서 축 늘어져 해바라기를 한다

어떻게 햇살을 담뿍 머금었는지 
눈이 부시도록 빛을 내뿜는 걸 아름답게 바라보면서도

해바라기 씨앗처럼 까만 점이 생길까
샛노란 꽃잎처럼 피부가 탈까

쓸데없는 걱정부터 앞서는 나는 아직 멀었다
살면서 해바라기 한 번 실컷 못하고서 

그늘진 눈가에 실주름만 진다
해를 등에 지고 일하는 사람들의 해바라기처럼

8월의 햇살에 익어가며 씨앗에게 자릴 내어주는 꽃잎과
밭고랑을 닮은 굵은 주름살 앞에 늘 부끄러운 마음의 골마다 주름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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