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양다리 걸치다

다윗 이야기(2)

사무엘, 양다리 걸치다

– 다윗 이야기의 시작 -

 

 

1.

 

새 판을 짠 이는 사무엘이었다. 멍석 깔아놓고 사울과 다윗을 왕으로 만든 이는 사무엘이었다. 그가 주도하지는 않았고 백성들 성화에 밀려서 했지만 이스라엘에 전에 없던 왕이 생겨나고 군주제가 태동하도록 판을 깔아놓은 사람은 마지막 판관(judge)이자 동시에 제사장(priest)이고 예언자(prophet)였던 사무엘이었던 거다.

 

그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그 일을 했을 거다. 구약성서에서 인간사 모든 일의 궁극적 원인이자 동력은 야훼 하느님이니까 그가 아니라도 누군가 그 일을 했을 거란 말이다. 하지만 세상사가 누가 해도 마찬가지라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그걸 행한 사람의 기질과 성격과 개성에 따라 사건의 색깔이 달라지니 인생 살만한 게 아니겠는가. 사울 없이 다윗 없고 사무엘 없이 사울과 다윗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면 인본주의라고 비난받을까? 무대 뒤에서 역사라는 극을 연출하는 이가 하느님이라고 해도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를 빼고 어떻게 역사를 논하랴,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연 이가 사무엘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이스라엘 역사에서 판관시대의 막이 내리고 군주제시대가 열리는 기원전 10세기는 다른 시기에 비해서 주목을 덜 받아왔다. 이 시기를 다룬 <사무엘서>와 <열왕기상> 전반부 기록이 이후 시기에 비해서 ‘역사성’(historicity)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사야나 예레미야처럼 책에 이름이 붙어 있는 예언자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역사성이 떨어진다고 믿어지는 이유다. ‘전설’ 비슷한 얘기로 전해지는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예언자도 없었다. 이 시기에도 나단과 갓 같은 예언자가 있었지만 갓의 경우는 겨우 이름만 남아 있는 정도고, 나단은 다윗시대에 그가 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신앙적, 정치적으로 일관성이 없어서 예언자로서 ‘순수성’이 의심받는 형편이다. 나단에 대해 회의적인 학자들은 그가 실재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할 정도다.

 

민중신학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던 1980년대에는 평등공동체 시대였던 판관시대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좋은 시기’였고 사울에서 시작해서 다윗과 솔로몬을 거쳐 정착한 군주제시대는 ‘나쁜 시기’라는 도덕적 판단이 진보적인 성서학계에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군주제가 느닷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건 아니다. 사울이 왕이 된 것도 그럴 이유가 없었는데 하느님이 마지못해 허락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은 무대 위에서 열심히 연기하는 배우는 보지 않고 무대 뒤에서 지휘하는 연출자만 바라보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배우를 보러 연극을 가지, 연출을 보러 가진 않는다. 연출은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그려보는 것이다. 물론 하느님이 마지못해 왕을 허락했다는 신명기역사가의 신학적 진술에 담긴 의미를 물어야겠지만 우선은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제대로 봐야 한다. 그것은 안 하고 무대 뒤를 기웃거리는 짓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2.

 

판관시대에서 군주제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다양한 이해집단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대립하고 있었다. <사무엘서>를 꼼꼼하게 읽으면 이 점이 눈에 들어온다. 거기엔 단편적이지만 이 갈등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대표적인 게 군주제를 반대하는 집단과 찬성하는 집단이다. 설화자는 양자의 입장을 모두 전하는데 이 때문에 서술이 어색한 데가 있고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화자는 양편 입장을 모두 전해야겠다고 여겼던지 어색함을 무릅쓰고 그랬다. 예컨대 설화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게 왕을 달라고 한 이유로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사무엘이 늙었고 그 아들들은 그의 길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세워 자기들을 다스리게 해달라는 것이다(사무엘상 8:5, 앞으론 별도의 언급이 없으면 <사무엘상>의 인용이다). 그러니까 사무엘의 아들이 변변했더라면 왕을 세울 필요가 없었는데 그렇지 않으니 왕을 세우자는 얘긴데, 이게 타당한 주장인지는 의심스럽다. 왕이란 게 그만한 이유로 세울 정도로 하찮은가?

 

다른 하나는, 외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왕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고별사에서 사무엘은 살려달라는 이스라엘의 호소를 듣고 야훼가 사방으로 에워싼 원수들에게서 이스라엘을 구해줬지만 그들은 “그런데도 암몬 왕 나하스가 우리를 치러 오자 야훼 하느님이 우리의 왕인데도 그것을 보았을 때에 당신들[이스라엘 백성들]은 ‘안되겠습니다. 우리를 다스릴 왕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사무엘에게 말했다는 거다(12:12). 곧 군주제를 도입한 게 외부의 위협 때문이란 건데 과연 그랬을까? 내재적 요인은 없고 외부적 요인만 있었을까?

 

사울 이전에도 이스라엘에 왕이 될 뻔한 인물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내재적 요인이 있었음을 보여주지 않나 싶다. 예컨대 기드온과 그의 아들 아비멜렉(‘내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뜻이다)이 그런 사람이다. 므나쎄 지파 사람 기드온은 낙타를 몰고 나타나 이스라엘 주민들을 약탈했던 미디안 족속으로부터 므나쎄, 납달리, 아셀 지파 사람들을 구원했던 판관이다(사사기 7장). 그래서 그들은 기드온에게 “장군께서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 주셨으니 장군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대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사사기 8:22)라고 청했다는 거다. 그는 이를 거부했지만 이때 이미 ‘대를 이어’ 다스려 달라는 요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를 이어’란 요구가 곧 왕이 되어 달라는 게 아니면 뭐겠나. 게다가 그의 아들 아비멜렉은 실제로 세겜 사람들에 의해서 왕으로 받들어졌다고 한다(사사기 9:6). 훗날 그들과 불화가 생겨서 비참하게 생을 마쳤지만 말이다. 이 얘기들은 사무엘 이전에도 이스라엘에 지속적(세습적?)인 지배체제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얘기들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군주제가 외부로부터의 낯선 수입품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고 볼 수는 있겠다.

 

사무엘과 사울이 함께 등장하는 ‘사무엘-사울 복합설화’(Samuel-Saul Complex, 사무엘상 7-15장)를 초기의, 역사적으로 신뢰할만한, 친군주제 자료(pro-monarchic sources, 9:1-10:16; 11장)와 후기의, 포로기의,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꾸며낸, 반군주제 자료(anti-monarchic sources, 7:2-8:22; 10:17-27; 12장)로 나누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학자는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이다. 오경의 문서가설로 유명한 바로 그 학자 말이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바빌론 포로기 이전 시기의 정점이 군주제 성립 시기라고 보고 그것이 ‘무질서한’ 판관시대에 질서를 부여한 점에서 야훼의 축복이라고 평가했다. 1980년대 한국 진보 성서학계와는 정반대로 평가한 거다.

 

벨하우젠의 주장은 후대 학자들에게 비판받았다. 반군주제 자료들이 포로기의 산물이라는 주장이 특히 그랬다. 마틴 노트(Martin Noth)는 반군주제 정서가 포로기가 아니라 군주제 성립 시기의 분위기를 반영한다고 주장했고, 멘델존(I. Mendelsohn)도 가나안 왕권에 대한 우가릿 자료들의 증거에 비추어 당시에도 반군주제 정서가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서 <사무엘서>에 친군주제니 반군주제니 하는 자료 층이 있다고 상정하는 것 자체를 의문시하는 학자들도 있다. 예컨대 군네벡(Antonius Gunneweg)이나 이시다(Tomoo Ishida)는 사무엘-사울 복합설화가 여러 개의 독립전승들의 복합체라고 주장했다. 반대로 성서설화들이 하나의 커다란 문학단위라고 보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이 설화 역시 단일 문학작품으로 보는 견해도 힘을 얻었다. 에스링거(Lyle Eslinger)를 그 예로 들 수 있다(Kingship of God in Crisis: A Close Reading of 1 Samuel1-12 [Sheffield: Almond, 1985). 이런 복잡하고 재미도 없고 얘기는 이 정도로 끝내고 이제 본격적으로 사무엘 얘기를 읽어보자.

 

3.

 

사무엘은 불안했다. 백성들이 자꾸 왕을 달라고 하니 말이다. 근 2백 년 동안 왕 없이 지내왔는데 왜 이제 와서 왕을 달라고 하나 말이다. 자기가 문제없이 잘 다스리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의 아들 요엘과 아비야가 돈벌이에만 정신이 팔려 뇌물을 받고 공정하지 않게 재판하곤 했지만(8:2-3) 그렇다면 그들을 갈아 치우면 되지 왜 왕을 달라고 고집 부리는가 말이다. 이스라엘에 무슨 세습의 원칙이 있었다고 말이다. 하긴 사무엘은 제사장이기도 했으니 그 직책은 세습됐지만 동시에 그는 판관이 아닌가. 판관 직책은 세습된 경우가 없었다. 세습은커녕 할 일 마치면 보통사람으로 돌아가는 게 판관이란 직책이었다. 언약궤를 빼앗겼던 게 일대 사건이었지만 그래도 결국 되찾았다(사무엘상 4-6장). 그럼 됐지, 왕이 생긴다는 게 얼마나 큰일인데 그걸 그렇게 쉽게 요구하느냐 말이다.

 

사무엘은 왕을 달라는 백성의 요구를 거부하는 게 옳았다. 그런데 군주제와 첫 임금 사울에 대한 그의 태도는 일관적이지 않았다. 때로는 사울에게 호의적이었다가 금방 적대적으로 바꾸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사무엘의 일관성 없는 태도의 이유를 규명하는 게 이 시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사무엘은 출생부터가 남다르다. 불임이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던 거다. 이 점이 이스라엘의 선조에게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삭을 비롯해서 그런 사람이 적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에게 ‘야훼께 빌어서 얻은 아기’라는 뜻인 ‘사무엘’이란 이름이 붙여졌다(1:20). 이렇게 그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끝에 태어나서 어린 시절에 나실인으로 하느님에게 바쳐졌다. 그는 젊은 시절까지 실로의 중앙 성소에서 엘리 제사장 밑에서 수련생활을 하다가 그가 죽자 뒤이어 제사장이 됐다. 그는 일종의 성전 엘리트였던 거다. 당시 사무엘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 전체의 공동체가 아니라 에브라임과 베냐민 지파 일부를 포괄하는 중부 가나안 지역에 한정됐었다. 엘리는 전쟁 지도자와는 거리가 먼 판관이자 제사장으로서 그의 직책은 세습되어야 했지만 그의 아들들이 모두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었기에 사무엘이 그 자리를 계승했던 거다. 실로 성소가 블레셋에 의해 파괴된 후에 그는 미스바, 길갈, 베델, 라마 등을 순례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린 판관이자 제사장이자 예언자였다.

 

실로 성소에는 야훼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있었다. 거기에 야훼는 거룹들 사이에 앉아 있는 걸로 형상화되어 있었다(4:4). 학자들은 거기에 그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고 추측한다. 거룹이 야훼의 형상은 아니었으니 십계명 중 둘째 계명을 어기는 것은 아니었을 터이다.

 

당시 야훼는 전쟁의 신으로 섬겨졌으리라고 추측된다. 물론 다르게도 봤겠지만 그 중 두드러진 것이 전쟁의 신이었다는 얘기다. 왜 그랬을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늘 해야 하는 게 전쟁이었으니까 말이다. 왕으로서 야훼라는 믿음이 ‘거룩한 전쟁 전승’(holy war tradition)과 만나서 하나의 종교이념을 형성했던 것이다. 군사적 지도력과 종교적 권위가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하겠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걸(8:5; 10:19) 어떻게 봐야 할까? 그게 정말 야훼의 왕권을 거부하는 뜻이었을까? 정말 그랬을까? 그렇다면 야훼가 그걸 허용한 것이 뭘 뜻하나? 그건 야훼의 왕권에 대한 백성들의 불신을 야훼 자신이 받아들였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야훼가 정말 그랬을까? 구약성서를 보면 사람의 행위를 야훼가 막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야훼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걸 막지 못했고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도 막지 못했다. 이런 예를 들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야훼의 ‘왕권’을 거부하는 것은 성격이 다르다. 그건 기본을 부인하는 것이니 말이다.

 

설화자(신명기 역사가)는 그렇게 해석한다. 백성들의 요구에 사무엘이 안절부절못하자 야훼는 “백성이 너에게 한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8:7). 게다가 마치 야훼가 백성들의 태도를 오랫동안 불만스러워 했다는 듯이 “그들은 내가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하는 일마다 그렇게 하여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더니 너에게도 그렇게 하고 있다”(8:8)라고 말했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그렇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이스라엘이 야훼의 왕권을 거부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들에게 그럴만한 ‘배짱’이 있었을까? 당시에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어떤 족속도 감히 자기들이 믿는 신을 제치고 사람을 그 자리에 올릴 배짱을 갖지 못했다. 안 그런가?

 

사무엘은 야훼의 지시를 받아 왕이 백성들에게 행사할 권한을 나열한 다음 백성들을 엄중히 경고한다. 그들은 왕의 종이 될 거라며 “그 때에야 당신들이 스스로 택한 왕 때문에 울부짖을 터이지만 그 때에 야훼께서는 당신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것”(8:18)이라고 말이다. 이때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한 말에 왜 왕을 달라고 했는지 이유가 드러난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도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그 왕이 우리를 이끌고 나가서 전쟁에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8:19-20).

 

그러니까 그들에겐 전쟁에서 승리할 군사지도자가 필요했던 거다. 곧 사울 중심의 군사적 지도력을 사무엘 중심의 종교적 권위로부터 독립시키길 원했다. 제사를 드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종족을 지키는 게 더 중요했다. 기존 제도가 새로운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은 블레셋에게 야훼의 궤를 빼앗겼고 실로 성소가 블레셋에 의해서 무참히 파괴된 ‘참사’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4:1-11).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찌하여 야훼는 블레셋에게 이토록 무참하게 패하고 말았을까? 평소와 달리 전쟁터에 야훼의 궤까지 갖고 나갔는데 말이다. 블레셋 사람들도 이스라엘이 야훼의 궤를 들고 나왔다는 소식에 두려워 떨었다지 않나(4:7-8). 야훼의 궤가 이스라엘에 승리를 보장한다는 건 ‘미신’에 불과했을까? 이스라엘의 착각이었을까? 그렇다면 궤를 갖고 갔던 블레셋에 내려진 재앙(사무엘상 5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궤는 전쟁터에선 무력하고 이방신의 신전에서만 힘을 발휘할 수 있었나? 궤를 이방신의 신전에 놔둔 적이 없어서 그걸 몰랐을까?

 

4.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패한 이유를 설명하는 에피소드가 전후 문맥과는 무관하게 사무엘상 13장에 들어와 있다. “당시 이스라엘 땅에는 대장장이가 한 명도 없었다.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드는 것을 블레셋 사람들이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보습이나 곡괭이나 도끼나 낫을 벼릴 일이 있으면 블레셋 사람에게로 가야만 하였다. 보습이나 곡괭이를 벼리는 데는 삼분의 이 세겔이 들었고 도끼나 낫을 가는 데는 삼분의 일 세겔이 들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사울과 요나단을 따라나선 모든 군인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었다. 오직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손에만 그런 무기가 있었다”(19-22절). 이 얘기가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개연성이 있다고 보는 이유는, 이 얘기가 이스라엘에 하등 보탬이 되지 않은 얘기란 사실 때문이다.

 

우선 이스라엘에는 대장장이가 한 명도 없었고 블레셋 사람들은 히브리인들(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히브리인들’일까?)이 칼과 창 만드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는 말이 놀랍다. 칼과 창을 만들려면 그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는 뜻일까, 아니면 노하우를 전해주지 않았다는 뜻일까?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농기구를 벼리려면 블레셋에 가서 돈을 주고 했다고 하니 그땐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나 보다. 그들과 전쟁을 벌인 얘기가 <사무엘서>에 그렇게 자주 나오는데도 말이다. 우리의 남북관계와는 성격이 달랐다고 볼 수 있겠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평소엔 자유롭게 왕래하고 거래도 하는 사이였던 거다. 이 얘기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다면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군사적으로는 절대적으로 의존했고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정도로 종속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럼 전쟁은 하나마나였을 것이다. 기댈 데라곤 야훼가 대신 싸워주는 것뿐이었을 텐데 그마저도 맘대로 안 돼서 야훼의 궤마저 빼앗겼으니 이젠 야훼가 자기들 편이라는 믿음만으론 전쟁에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들은 야훼의 영과 지시를 받아 실질적으로 전쟁터에 나가 전투를 수행할 지도자를 원했고 그 역할에는 사무엘보다 사울이 더 적합하다고 결론 내렸던 것이다. 이걸 야훼에 대한 ‘배신’이라 부르는 게 옳을까? 오늘 같으면 어땠을까? 자기들이 믿는 신이 대신 싸워주길 기대하고 전쟁터에 나갈 군대가 있을까? 부시도 그렇게는 안 했을 거다. 안 그런가?

 

사무엘에겐 백성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명분이 없었다. 다른 선택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무엘도 정계를 은퇴해서 초야에 묻히고 싶진 않았으리라. 그럼 어떻게 했어야 할까? 킹은 못 돼도 킹메이커는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왕을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려 했다는 말이다. 백성들도 그것마저 반대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는 왕이 될 사람을 찾아 나섰다. 설화자는 이 일이 야훼의 계획에 따라 일어났고 사무엘은 그의 지시에 따라 사울을 왕으로 세웠다고 서술하지만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감안하면 더 잘 이해될 거다. 사무엘이 사울에 대해 모순적 태도를 보인 것은 왕을 세우는 데는 동의했지만 그를 자기 권위 아래에 두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울과 백성들(또는 그 대표자들)이 그걸 원치 않았고 또 사울도 자기 권력을 공고히 하려 했으므로 둘 사이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결국 사무엘은 사울의 제위기간 중에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점지했던 것이다. 설화자가 사울이 왕이 된 얘기를 세 가지 서로 다른 버전으로 전하며 갈 짓자 행보를 하는 것도 이 갈등 때문이다. 사울은 첫 번째로 아버지의 나귀를 찾으러 갔다가 사무엘을 만나 이스라엘을 다스릴 ‘영도자’로 기름 부음을 받았고(10:1), 두 번째로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인 가운데 짐짝 사이에 숨어 있다가 발견되어 왕으로 선포됐으며(10:24), 마지막으로 암몬 족속을 물리치고 와서 길갈에서 왕으로 선포됐다(11:14-15). 세 번이나 왕위에 오른 사람이 사울 말고 또 누가 있는지 나는 모른다.

 

사무엘과 사울의 갈등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일종의 주도권 다툼이라고 봐도 괜찮겠다. 둘 사이의 갈등은 사울이 사무엘 없이 자신의 주도로 제사를 드렸을 때와 그가 ‘헤렘의 법칙’을 어겼을 때 극적으로 드러났다.

 

5.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려고 준비하던 때였다. 전쟁을 개시하려면 야훼에게 제사를 드려야 했고 이를 사무엘이 주관했던 모양이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레 동안 자기를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사울은 사무엘의 말대로 이레 동안 사무엘을 기다렸으나 그는 길갈로 오지 않았다.”(13:8). 이스라엘 군인들 중에는 불안해서 슬금슬금 달아나는 자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사울은 사무엘 기다리길 포기하고 자기가 직접 번제를 올렸다는 거다. 사무엘의 지시대로 이레 동안 기다린 후에 말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엘이 나타나서 사울을 꾸짖었다. “(임금께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명령을 어기지 않으셨더라면 임금님과 임금님의 자손이 언제까지나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야훼께서 영원토록 굳게 세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임금님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야훼께서 임금님께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에 야훼께서는 달리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세우셨습니다”(13:13-14).

 

우선 사울이 뭘 잘못했는지가 분명치 않다. 그는 사무엘의 지시대로 이레 동안 그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고 군인들이 하나둘 슬금슬금 빠져나가니까 할 수 없이 자기가 주관해서 번제를 드렸다. 어디가 잘못됐다는 걸까? 이런 상황에 사무엘이 오길 계속 기다려야 했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사울이 아니라 사무엘이었다. 유명한 중세 유대인 성서해석자 다비드 킴히(David Kimchi)는 사울이 ‘밤중까지’ 기다렸어야 했는데 ‘아침까지만’ 기다린 게 잘못이라고 이해했는데 매우 창조적인 해석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킴히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억지로 보인다. ‘이레’ 라는 날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무엘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그렇다면 이레라는 날짜를 한정할 이유가 없었으니 이것도 이치에 안 맞는다. 제사장이 아닌 왕이 제사를 주관한 것이 문제였을까? 그럴듯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는 건 왕이 제사를 주관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왕이 제사를 주관한 예도 있다. 다른 사람을 들 것도 없다, 위대한 솔로몬이 바로 그런 왕이니 말이다(열왕기상 3:3). 솔로몬은 괜찮고 사울은 안 됐을까? 설마….

 

이레 동안 자기를 기다리라는 사무엘의 말이 정말 야훼의 지시였는지도 분명치 않다. 사무엘은 그게 야훼의 명령인 게 당연하다는 듯 말하고 사울은 그걸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야훼가 직접 그런 명령을 내렸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다. 독자는 이레 동안 기다리란 지시가 주어졌을 때가 아니라 사울이 그걸 어겼다고 말할 때 비로소 그런 지시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 지시를 야훼가 직접 줬다고 말하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나만 그런가?

 

마지막으로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사울이 번제 드린 게 이 정도의 징벌을 받을만한 잘못인지 물어야겠다. 이게 왕조(아직 ‘왕조’라 부를 것도 없지만)가 끊어질 만큼 엄중한 죄였을까? 사울 대신 다른 영도자로 세울 만큼 치명적인 잘못이었나 말이다. 이 얘기는 두 사람이 주도권 경쟁을 벌인다는 인상을 준다. 사울이 버려지는 시나리오를 미리 짜놓고 그 이유를 갖다 대는 느낌도 든다. 사울에 번제를 드리자마자 사무엘이 나타나서 그를 꾸짖는 것도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더 기이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 군대가 승리했다는 사실이다. 사무엘의 말대로라면 사울이 졌어야 하지 않나? 물론 사무엘이 명시적으로 질 거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사울이 이겼다면 그가 대단한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던가, 또는 주도권이 사무엘에게서 사울로 넘어간 사실을 보여주지 않나 싶다. 안 그런가?

 

그 다음에 사무엘은 사울이 ‘헤렘의 법’을 어긴 걸 질타했다(15장). 이스라엘은 전투에서 이기면 군인은 물론이고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짐승들까지 모두 죽여야 했다. 그걸 ‘헤렘의 법’이라고 부른다. 이번에도 아말렉과의 전투에 나서는 사울에게 사무엘이 와서 야훼의 말을 전하며 다짐을 받았다. “야훼께서 나를 보내셔서 임금님에게 기름을 부어 야훼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세우게 하셨습니다. 이제 야훼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한 일 곧 길을 막고 대적한 일 때문에 아말렉을 벌하겠다. 너는 이제 가서 아말렉을 쳐라. 그들에게 딸린 것은 모두 전멸시켜라. 사정을 보아 주어서는 안 된다.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젖먹이, 소 떼와 양 떼, 낙타와 나귀 등 무엇이든 가릴 것 없이 죽여라”(15:1-3). 하지만 사울의 군대는 이겼지만 ‘헤렘의 법’을 지키지 않고 아말렉 왕 아각과 짐승들 중에서 기름진 것들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왔다.

 

이에 사무엘은 사울이 야훼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으므로 야훼가 그를 왕으로 세운 걸 ‘후회’한다고 말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된다. 그가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15:11). 이 말을 듣고 사무엘은 괴로운 마음으로 밤새 야훼께 부르짖었다는데 뭐가 그리 괴로웠는지 이해할 수 없다. 둘은 거의 앙숙관계가 됐는데 말이다. 그래도 자기가 왕으로 세운 사울이 하느님 후회의 대상이 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까? 그의 앞날이 훤히 내다보여서 측은했을까? 다음날 그가 사울에게 갔을 때 사울은 그를 보자 자기는 야훼의 명령을 따랐다고 말했단다. 누가 물어봤나? 이 또한 납득할 수 없는 부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에 사무엘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나의 귀에 들리는 이 양 떼의 소리와 내가 듣는 소 떼의 소리는 무엇입니까?”(14절)라고 묻자 사울은 이런 이해 못할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아말렉 사람에게서 빼앗은 것입니다. 우리 군인들이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야훼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을 남겼다가 끌어왔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것들은 우리가 진멸하였습니다”(15절). 이게 무슨 말 같지 않은 말인가.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헤렘의 법’을 몰랐을까? 사무엘이 전투 개시 전에 단단히 다짐까지 받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느님에게 제물로 바치려고 좋은 짐승들을 남겨뒀다니, 생전 처음 전투에 나간 것도 아닌데 이걸 말이라고 하나 말이다. 이에 사무엘은 사울의 과거를 길게 회고한 다음 유명한 말은 남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22절). 여기서 그는 결정적으로 사무엘에게 버림받는다. 사울은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렸지만 되돌리기엔 늦었다. 사울은 사로잡아온 아말렉 왕 아각을 처형했지만 외양간을 고쳤다고 도망간 소가 돌아오진 않는 법이다.

 

이 얘길 이렇게 끝내기엔 뭔가 찜찜하다. 사울이 어긴 ‘헤렘의 법’이 절대 어겨서는 안 되는 중요한 법이었다고 치자. 그 때문에 야훼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걸 후회했고 그를 버렸다고 치자. 그래도 남는 두 가지 의문은, 첫째로 이 죄는 회개해도 용서가 안 되는가 하는 점이다. 사울은 사무엘의 꾸중을 듣고 회개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간청하였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야훼의 명령과 예언자께서 하신 말씀을 어겼습니다. 내가 군인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였습니다. 제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나와 함께 가셔서 내가 야훼께 경배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15:24-25).

 

물론 회개한다고 해서 다 용서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회개가 진실한 것인지도 물어야 한다. 용서 여부는 전적으로 야훼에게 달려 있고 사울의 속마음을 모르니 진실성 여부도 독자가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용서의 은총이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은 건 분명하다. 이는 다윗만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다윗은 야훼에게 바쳐져서 오로지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먹어도 괜찮았는데 사울은 헤렘의 법을 어겨서 버려졌다. 아무리 모든 게 야훼 맘대로 라곤 해도 맘이 편치는 않다. 안 그런가? 이렇게 말하면 내가 하느님 자리에 올라갔다고 비난받으려나?

 

마지막으로 사울이 지은 ‘죄’와 그가 받은 ‘징벌’에 균형이 맞는지 물을 수 있다(이에 대해선 오래된 논문이지만 Rolf Knierim, “The Messianic Concept in the First Book of Samuel,” in F. Thomas Trotter, ed., Jesus and the Historian [Philadelphia: Wesminster Press, 1968], 36).이 점은 그가 이레 동안 기다리라는 사무엘의 말을 어겼을 때도 해당된다. 마을 면장도 아니고 한 나라의 왕인데 그를 내쫓으려면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사무엘이 오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제사를 주관한 일과 헤렘의 법을 어긴 일이 왕조가 끊어질 정도의 중죄였을까? 사울만 그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말이다. 가나안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 사람들을 다 몰아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강성해진 다음에도 가나안 사람을 모조리 몰아내지 않고 그들을 부역꾼으로 삼았다”고 하지 않나 말이다(사사기 1:28). 이래저래 사울에게는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사울을 내리고 다윗을 올리는 게 신명기 역사가의 관점이니 억울해도 할 수 없지만 말이다.

 

6.

 

이스라엘서 군주제가 자리 잡던 때의 상황이 이랬다. 마지막 판관 사무엘은 사울과 다윗, 두 사람 모두에게 기름을 부어 그들을 왕으로 세웠다. 사무엘은 전통적 질서를 대표하는 사람이었고 사울과 다윗은 새로운 상황에는 새로운 제도(군주제)가 필요하다는 집단이 후원하는 사람들이었다. 둘 중 하나에 도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 1980년대에 한국 진보신학계에서 그랬듯이 판관시대의 지파공동체(이스라엘에 열두 지파가 모두 참여한 지파공동체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그보다는 지역적으로 인접한 몇 개의 지파가 연합한 공동체가 존재했다고 보는 게 옳다)는 평등하고 좋은 제도였고 사울에서 시작해서 다윗에 이르러 정착한 군주제는 불평등하고 나쁜 제도였다는 식의 단순비교는 적절치 않다.

 

사무엘은 파산하고 있는 지파동맹과 실로 성소를 중심으로 유지되던 권위를 재건하려다 실패한 지도자였다. 그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대신 그와 타협하여 일시적으로 전통적 권위를 지킬 수 있었다. 타협 조건은 전투에 나갈 때 자기가 주관해서 제사를 드릴 것, ‘헤렘의 법’을 지킬 것, 그리고 야훼와 백성들 사이에서 자신의 중재자 역할을 인정할 것 등이었다(12:11-25 참조). 하지만 이 타협은 오래 가지 않고 깨졌다. 백성들은 탁월한 군사 지도력을 발휘하는 사울에게 이미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왕을 물색했고 그 과정에서 선택된 인물이 다윗이었다. 사무엘은 그에게서 더 나은 절충을 모색하려 했던 모양이지만 다윗은 사울보다 몇 걸음 앞서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전통질서로 회귀하기는커녕 더 과감하게 새로운 질서를 모색했다. 그러자 사무엘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소간 쓸쓸하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사무엘이 죽었다. 온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고 그의 고향 라마에 그를 장사하였다”(25:1).

 

곽건용/LA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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