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용의 말씀 안으로(1)


예수를 따른 다는 것


예수의 일행이 길을 가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예수께 “저는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하고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말씀하시자 그는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하셨다. 또 한 사람은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하고 말씀하셨다.(누가복음 9:57-62)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는 신앙을 갖게 됨으로 마음에 지극한 평온을 얻을 수 있었노라”고. 또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가 내 안에 있어 나는 어두운 밤길에서도, 지독한 풍랑 속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혹은 이렇게 고백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그 일 때문에 나는 실패하던 인생이 반전하여 성공과 영광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그리고 때론 이런 소리도 들려올 겁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내 삶이 얼마나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찼는지 말로 다 헤아릴 수 없다.”라는... 그리고 이러한 믿음에 대한 소식과 소리는 먼 나라 얘기만이 아닌 바로 가까운 우리 이웃들로부터도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입을 모아 노래합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배워 바른 길가니 우리의 삶과 생이 언제나 즐겁고 평온하다”고!


그래서 우리는 그 같은 신앙인의 즐거운 삶을 따라가고자 부단히 노력합니다. 입으로는 쉬지 않고 예수를 닮기 원한다고 조아리며, 아울러 그 때문에 촉발된 평온과 기쁨, 즐거움, 행복이 언제나 우리 안에 가득 넘쳐나길 소망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선택한 구절에서 예수 자신의 입을 통해 나오는 ‘예수를 따른 다는 것의 의미’는 조금 다른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세 번의 경우를 통하여 자신을 믿고 따른 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일러주시고 계십니다. 그 세 번의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친히 찾아와 길가는 그의 앞을 막아서고 이렇게 고합니다.


“선생님! 당신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이 사람에 대한 정보는 앞에 인용한 선언 말고는 전무합니다. 다만 우리는 유추를 통해 그의 대강의 모습을 그려 볼 따름입니다. 격정적이고 열의 있는 고백은 아마도 그가 혈기 넘치는 젊은이였음을 상상하게 해 줍니다.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혹은 친히 예수의 설교를 접하고 마음에 일어난 감동과 격동을 감출 길 없어 이 한 몸 위대한 스승을 위해 투신하겠노라고 굳은 다짐을 하고 그것을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한 젊은이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 구절을 통해 떠올릴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젊은이는 길가는 자신의 선생이 될 사람의 발걸음을 막아서며 이렇게 선언합니다.


“당신이 어디로 가시든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젊은이로 추정되는 이의 소박하고 뜨거운 결심 앞에 예수가 전하는 언어는, 그러나 뜻밖에도 무척 서늘합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습니다.”


도대체 예수는 무슨 의도로 이런 답변을 그에게 던지신 것일까요? 왜 그분은 자신을 평생 따르겠노라고 다짐하는 이가 지닌 가슴의 열정을 이토록 식게 만드는 차가운 답변을 내 놓은 것일까요? 참으로 고약한 답변입니다. 마치 체념한 이의 언어처럼 예수의 대답은 이 이름 모를 젊은이의 뜨거움을 순식간에 가라앉혔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의 눈에 별안간 자신의 길을 막고 자신이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을 평생 따르겠노라고 다짐하는 젊은이가 처음에는 고맙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길에 대한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앞뒤 재지 않고 성급하게 추종의 고백을 던지는 그에게 자신을 따른 다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일러주어야 할 책임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여보게 친구,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네의 결심과 의지는 내 고맙게 여기네. 허나 나를 따른 다는 것의 의미를 아나? 그것은 외로움이 연속일세. 무수히 따르는 군중 속에서 가슴에 심은 진리 하나 부여잡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최후까지 투신해야만 하는 무척 고독한 투쟁일세. 때로는 사람들은 이렇게 진리를 부여잡고 사는 사람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대접하곤하지. 왜냐고? 그렇게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언제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일세. 그들의 관습과 전통, 혹은 버릇들마저 새로운 가치관에 의해 바꿀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터전과 울타리로부터 그처럼 진리를 전하는 이들을 몰아내기 일쑤이네. 때로는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겠지. 허나 사람들은 극히 속물적이고 이기적이기 마련이라네. 늘 그런 진리의 영역은 먼 나라 이야기로 돌리고 당장의 현실에서 나만의 이익에 충실하기 마련일세. 우리는 그런 이들을 상대로 그동안 지니고 누려왔던 특권을 포기하라고 외쳐야만 하는 걸세. 따라서 이러한 일은 한순간의 격정과 열정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네. 오히려 끊임없는 인내와 외로움의 무게를 감당하겠다는 ‘생활화된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일세. 생각해보게, 여우같은 짐승들도 돌아갈 제 집이 있다네. 심지어 하늘을 나는 작은 새들도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진리를 전하는 이들은 머리 둘 곳도 없다네. 왠지 아나? 그들이 진리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들은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네.”


예수는 짧은 언어 속에 자신을 따른 다는 의미를 가능한 포괄적으로 담아내려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는 뜨거운 가슴을 느끼며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되겠노라 다짐하는 자신의 동료가 될 사람을 향해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의 본래적 외로움을 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이러한 의도는 두 번째의 경우에 또다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번에는 오히려 예수께서 더 적극적이십니다. 예수께서 곧 다른 이를 향하여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나를 따르시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오히려 예수께서 서늘한 답변을 접하게 됩니다.


“선생님, 제가 먼저 물러가서 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


아마도 당시 예수의 추종명령을 받은 이 사람은 막 부친상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장례를 손수 완수하겠노라고 전언합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의 관습상 지극히 당연하고 또 타당한 일입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장례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상을 당한 경우에는 일상 속에서 언제나 반복해서 외워야 하는 신앙 고백문과 심지어 정해진 시간에 드려야 하는 기도마저 면제받을 정도이니까요. 이러한 관례는 후대에 이르러 상을 당한 이는 모든 율법과 계명으로부터 자유롭다는 해석까지 나오게 됩니다. 더군다나 직계 가족의 장례는 무엇보다 중하여 언제나 몸을 깨끗이 해야만 하는 제관조차도 부모와 가족의 장례는 손수 치러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중요하고 또 소중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겠다는 이의 심정은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네 죽은 자들을 장사 지내게 내버려두고, 당신은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알리시오.”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이 대답은 상당히 이례적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뜻밖의 답변을 던지신 예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지금껏 아무런 도전 없이 언제나 그럴듯한 진리로 대접받고 있던 통념을 단박에 무너뜨리시는 그분의 의도! 오히려 아직 제대로 된 사회적 규약과 법칙이 정비되어있지 않아 자신의 신분과 안녕, 그리고 복지를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가족 간의 돈독한 유대감일 텐데, 그래서 장례나 기타 가족의 경조사 참여는 본질적으로 심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마치 시기하는 이들의 언어처럼 써늘하게 토해내는 예수의 대답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예수의 대답은 하나님의 나라는 기존의 통념과 질서와는 다른 성질의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기존의 질서와 관습에 의존하여 살기보다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무장하여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이들의 의지와 행동,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는 자리한다는 예수의 설명을 우리는 이 대답을 통해 읽게 됩니다.


이러한 예수의 의도는 세 번째의 경우로 곧바로 연결됩니다. 이번에는 제 3의 인물이 등장하여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주님, 그러나 먼저 제가 제 집에 있는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쟁기에 손을 얹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나라에 맞지 않습니다.”


예수의 의지는 초지일관 오직 하나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 성격은 기존 질서와 관습과는 철저히 단절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존의 관습과 전통에 의존해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질 수 없으며, 그것을 끊어버리는 결심 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요원하다는 것을 예수의 대답은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늘어지는 낭만주의의 달콤한 꿈속에 있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예수의 뒤를 따르겠다는 것은 내 일신상의 즐거움과 기쁨만을 동반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는 신앙을 갖게 됨으로 마음에 지극한 평온을 얻을 수 있었노라”고. 또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가 내 안에 있어 나는 어두운 밤길에서도, 지독한 풍랑 속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혹은 이렇게 고백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그 일 때문에 나는 실패하던 인생이 반전하여 성공과 영광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그리고 때론 이런 소리도 들려올 겁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내 삶이 얼마나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찼는지 말로 다 헤아릴 수 없다.”라는... 그리고 이러한 믿음에 대한 소식과 소리는 먼 나라 얘기만이 아닌 바로 가까운 우리 이웃들로부터도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입을 모아 노래합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배워 바른 길가니 우리의 삶과 생이 언제나 즐겁고 평온하다”고!


그래서 우리는 그 같은 신앙인의 즐거운 삶을 따라가고자 부단히 노력합니다. 입으로는 쉬지 않고 예수를 닮기 원한다고 조아리며, 아울러 그 때문에 촉발된 평온과 기쁨, 즐거움, 행복이 언제나 우리 안에 가득 넘쳐나길 소망합니다.


그러나 고백컨대, 저는 예수로 인하여 제 마음이 즐겁지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만남으로 저는 이전에 없었던 고민과 번민, 그리고 혼란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예수란 분을 내 삶의 근저에 초대함으로 저는 설명할 수 없는 아픔 또한 느껴야만 했습니다. 보다 솔직히 터놓아보자면, 예수를 알고 난 후, 내 삶에 즐거움보다는 번민과 고민의 나날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 때문에 저는 보지 못하던 많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내 한 몸의 안위와 평온, 그리고 다분히 이기적인 가치관 속에 아늑한 일상을 보내던 내게 예수란 인물은 잊혔던 많은 이웃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이전에 내가 보지 못했던 수많은 이웃이 나의 무관심 속에 그들 역시 나처럼 느끼고 누려야 할 삶의 안위와 평온을 갖지 못했음을 보았을 때 내 마음은 무너지며 요동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가 내 어미며, 형제요, 자매인가?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사람이 나의 가족”이라고 일갈하신 예수의 의도가 제 가슴에 박히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란 분은 내게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전에는 뜻하지 않게 생기게 된 선물에 큰 즐거움으로 펑펑 나름대로 기분을 내며 한턱 쏘기도 했지만, 이제 내 손에 들린 선물을 보며 나보다 이것이 더 필요한 사람은 없는지 살피게 되었고, 또 그들이 어디 숨어 이 같은 선물이 주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지 자꾸 두리번거리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맛있는 식사를 앞에 두고, 아직 한 끼를 누리지 못해 배곯고 있을 또 다른 나의 자매와 형제의 모습을 기억해내곤 눈물을 뿌려야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때론 그런 적도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반복적으로 읊조리던 복음송 속에 실감나는 예수의 모습을 발견하고 섬뜩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때론 저도 아무 반성 없이 예수를 닮기 원한다고 노래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닮을 예수의 모습을 제대로 목도한 다음, 난 그 노래의 무서운 의미를 온 몸 깊숙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닮기 원한다고 반복적으로 노래하던 그분 예수는, 이 천년 전에 갓 서른을 넘은 나이에 포근한 가정하나 제대로 꾸며보지도 못하고, 단지 하나님 나라를 설교했고, 또 그에 응당 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가장 흉측한 극형 중 하나인 십자가에 달려 명을 달리했습니다. 나무 위에 달려 신음을 토해내는 그분의 모습을 읽게 된 순간, 난 내가 닮아야 할 그분의 고통에 놀라 멀리 뒷걸음질 쳐야만 했습니다. 그분이 십자형 틀 위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받아야 했던 고통과 아픔, 그리고 슬픔을 목격했을 때. 난 신앙이 전혀 낭만이 아니며, 또 한순간의 꿈도 아닌 절절한 현실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가 느껴야 했던 그 섬뜩함! 그 후 전 예수를 닮겠다는 노래를 함부로 부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그보다 앞서 결정되어야 할 많은 것이 있어야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저는 신앙이 감성의 영역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신앙이라는 것 역시, 내가 신앙적으로 살아야 하겠다는 것 역시 역사적 결심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고백하건대, 저는 예수란 분을 만남으로 더 큰 번민과 고민, 그리고 아픔과 갈등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고개 들어 내 신앙의 그림자에 묻어있는 의미를 읽어보노라면, 그렇게 예수 때문에 받아야 했던 아픔과 슬픔, 그리고 번민, 고통 갈등... 그 모든 것이 꼭 아픔, 슬픔, 번민, 고통, 갈등만은 아닌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예수 때문에 받아들인 아픔, 슬픔, 번민, 고통, 갈등이 나를 더 키우고, 나를 더 즐겁고, 나를 더 평화롭게 하고, 나를 더 즐겁게 하고,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내 안에 예수 때문에 촉발된 갈등과 격정은 숨죽이지 않고 있지만, 꼭 그 아픔이 아픔만은 아니었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고도 지금의 저는 또다시 고백합니다. 예수란 분으로 인해 제게 찾아온 것은 참으로 섬뜩한 고민이었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 예수는 신화나 전설이 아닌 역사이며, 따라서 나무 위에 달리기까지 우리에게 전하고자 애썼던 하나님의 나라 역시 현실이며 역사인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를 따른 다는 것의 의미가 자리합니다. 이처럼 예수를 따른 다는 것은, 그의 고민과 고통, 슬픔과 아픔이 내 것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길용/서울신대 교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017년 세종교양도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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