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용의 말씀 안으로(3)
성탄전야의 유혈극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태 2:16-18)
설교 제목을 ‘성탄전야의 유혈극’이라 뽑았지만, 본문을 살피면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헤롯이 새로 태어날 이스라엘의 왕을 처단하기 위해 베들레헴 근방의 사내아이를 살해한 사건은 성탄 이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상징하는 바와 성탄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다시 한 번 재고해 본다는 뜻에서 무리해서 제목을 그리 뽑아보았습니다.
또 다시 성탄의 달이 돌아왔습니다. 저물어 가는 한 해 마지막달의 느슨한 분위기 때문에 올해 성탄도 우리에게 그렇게 진지한 모습으로 다가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축제라는 이름 밑으로 숨어들어가는 성탄의 의미를 어떤 식으로든 다시 되새겨 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익숙합니다. 동방의 점성가 세 사람이 기이한 별을 감지하고, 그것을 좇아 유대 땅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그리곤 당시 유대의 왕이었던 헤롯에게 들려 “새로 난 유대인의 왕이 어디 있는가?”고 묻게 됩니다. 성서에는 이 세 사람의 신분이 박사라고 표현되어있습니다. 원문에 의하면 “동방에서 마고스들이 예루살렘에 왔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고스란 점쟁이를 지칭하는 말인데, 마태의 기술 전체를 통해 살펴보면, 그들은 별을 보고 유대 땅을 찾아왔으니 필시 점성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 점성술은 인류 최초로 문명이 발생되었다고 여겨지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성행하였습니다. 그러니 동방에서 왔다라고 하는 말은 그들이 바로 그 지역 출신임을 뜻하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곤 더 이상의 언급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분이나 이름 등 모든 것이 오리무중입니다. 그러다가 점차 이들에 대한 신화화 작업이 진행되어 서기 500년경에는 이들의 신분은 점성가에서 임금의 지위로 격상되었고, 더 나아가 이들이 준비한 선물인 황금, 유향, 몰약 등 세 가지 예물을 들어 이들을 세 명이라 고정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다 마침내 이들 점쟁이들은 발타사르, 멜키오르, 가스파르라는 이름마저 부여받게 됩니다. 심지어 이들 말고 또 한 사람의 동방박사가 있었는데…. 그는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가 예수의 탄생이 아닌 죽음을 목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를 중심으로 살펴본다면, 이들의 이름은커녕 정확한 신분과 숫자도 알 수 없습니다. 성서는 그저 “동방에서 온 점쟁이들” 정도로만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런대로 우리의 상상을 동원한다면, 그들이 유대 땅에 들어와 당당히 그 지역의 왕을 알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어느 정도 높은 신분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점성술이라고 하는 것이 일종의 학문으로 지금의 미신적 행위와는 달랐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아무튼 이렇게 동방으로부터 유능한 지식인들이 유대 땅에 와서 새로운 왕의 탄생한 곳을 묻고, 헤롯은 유대의 박사들을 통해 베들레헴이 유력한 후보지임을 알려주게 됩니다. 그 후 동방에서 온 점성가들은 베들레헴으로 향해 갓 나신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다는 이야기가 오늘 택한 본문의 배경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돌아갈 때 꼭 들려달라는 헤롯의 부탁을 어기고 몰래 다른 지방을 통해 유대 땅을 빠져나갑니다. 이에 격분한 헤롯이 그 때를 시점으로 갓 태어난 모든 아기들을 몰살하도록 명령합니다. 장차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경쟁자를 미리 없애버리기 위하여서입니다. 그러나 그 때 마침 예수는 천사의 현시로 인해 이집트로 도피하게 되어 그 수난을 무사히 넘기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일을 마태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해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라마의 학살로 인해 라헬이 통곡한다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그 증거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라헬은 언니인 레아와 더불어 이스라엘 12지파 조상 야곱의 아내였습니다. 그리고 요셉과 베냐민이 그녀에게서 출생하였습니다. 베냐민을 낳을 때 겪은 산고로 그만 목숨을 잃은 라헬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8킬로미터 떨어진 라마지역에 묻히게 됩니다. 이 라마 지역에 가나안 땅 점령 때부터 바빌론 유배 다음까지 라헬이 낳은 베냐민의 후손이 살았습니다. 남 왕국 유다가 신바빌로니아에 패망하여 기원전 597년과 587년에 무수한 유대인들이 메소포타미아로 끌려갈 때 라마 주변에 살던 베냐민 부족도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이 때문에 라헬의 무덤에서 구슬픈 곡소리가 들린다고 예레미야 예언자는 노래하고 있습니다.(렘 31:15) 그런데 또 다른 전승은 라헬이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베들레헴 근처에서 죽고 묻혔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창 35:19, 48:7) 마태는 바로 이 전승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어 헤롯이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학살하자 베들레헴, 곧 라마에 묻힌 라헬이 통곡하였다고 풀이한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과연 베들레헴을 라마로 해석한 마태의 해석이 옳았나 아닌가를 놓고 설왕설래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의 역사적 증언인 예수의 탄생 때문에 벌어진 이 끔찍한 학살극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설교 주제로 잡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당시 저는 서울에 있는 한 교회의 전도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중3이던, 이름은 이제 잊었지만 표정과 눈빛만은 여전히 생생한 한 여학생의 질문에서 오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때도 오늘처럼 성탄절이 있는 12월의 어느 한 주였습니다. 학생부 예배가 끝나자 쪼르르 그 학생은 저에게 다가오더니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전도사님!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신 거죠?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그처럼 많은 아이들이 죽지 않았을 텐데요….”
물기어린 눈으로 던지는 중3 여학생의 태도는 자못 진지했습니다. 예수가 오지 않았다면 아이들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학생의 항변에 저는 잠시 주춤거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질문은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그것의 본뜻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저 성탄의 분위기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이들에게 성탄 이후 서슬 퍼런 칼을 들고 설치는 사람들과 그들의 살해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태어난 지 두 돌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었다니! 당시 저는 그 학생의 도전적 질문에 나른했던 저의 성탄에 대한 생각을 재정립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은 환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축제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고 꿈도 아닙니다.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며 역사이며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 정확한 역사의 흔적과 의미, 그리고 현실과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면 영원히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당시 저는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대부분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성탄은 하나의 신화일 뿐입니다. 그저 기분 좋은 추억이요 환상일 뿐입니다. 필터를 사용하여 뿌옇게 구름 위의 모습으로 꾸며놓은 장식 사진처럼 성탄은 그저 아련한 우리의 신화 속에서만 자리하고 있는 무엇입니다. 그처럼 잘 치장된 성탄의 신화 속에서 곧잘 우리는 정겨운 이와의 즐거움과 기쁨을 주고받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살피면, 성탄은 그러한 신화 속에 파묻히기에는 너무도 절절한 역사의 순간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날은 너무도 많은 아기의 피가 서린 날입니다. 그리고 난데없이 아기를 잃고 비통에 잠긴 어미와 아비의 피 토하는 억울함이 진동하는 날입니다. 그날은 세상에 얼굴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고 아직 채 아픔의 통증도 잘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린 아이들이 외마디 비명으로 생을 달리한 날입니다. 그 날은 그들의 싸늘한 시신을 가슴에 묻고 몇 날 며칠을 눈물로 지새웠어야 하는, 혹 그러다 자신들마저 명을 바꾸어야 했던 어미와 아비의 날입니다. 그들의 주검과 피 앞에 우리의 성탄은 도대체 어떤 모습, 그리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요!
오늘 설교의 소재는 예수의 오심과 라마의 대학살이 시간적으로 함께 한다는 사실에 기초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두 사건을 연속선상의 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이 두 사건은 정확히 그 의미와 배후를 살펴본다면 서로 다른 두 개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먼저 예수의 오심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정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우리를 그저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삶 속에 개입하겠다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이 곧 예수의 오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라마의 대학살은 하나님의 사랑 표현을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것으로 해석한 어리석은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끔찍한 사건입니다.
어찌 보면 성탄 역시 우리에게 두 얼굴로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그 날은 기쁨의 날이 되겠고, 제 이익과 욕심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이에게 그 날은 파멸과 공포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구도는 지금 우리의 시대에까지 고스란히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촛불 몇 개와 함께 온다는 사실 보다는 이를 준비하는 우리의 마음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성탄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그날은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이 표현되는 날인가요, 아니면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확인하는 날인가요? 이처럼 우리 인간의 삶에는 언제나 두 가지 면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당시 저는 그 학생의 전투적인 그 질문 앞에 다음과 같은 궁색한 답변만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래도 만약 예수가 오지 않았다면 물론 아이들은 죽지 않았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겠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예수의 의미를 양적인 의미로만 해석한 아주 치졸한 답변이었습니다. 예수가 와서 몇 명이 죽고 몇 명이 안 죽었다는 식의 답변 말입니다. 사실 그러한 방식으로 예수의 오심이 해석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학생의 질문은 성탄을 준비하고 있는 저에겐 부담으로 남아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오는 이 성탄을 도대체 어떻게 준비해야만 할까요?
생각해보면 올해도 어김없이 저질러질 수많은 성탄 전야의 유혈극을 생각하고 여전히 자기 본위에만 빠져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노라면, 흐느끼는 라헬의 곡소리가 그리 멀 게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바라기는 성탄이 신화가 아닌 역사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길용/서울신대 교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017년 세종교양도서) 저자
* 빼앗긴 성탄절 http://fzari.tistory.com/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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