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용의 말씀 안으로(2)
빼앗긴 성탄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태복음 1:18~23)
"Happy Xmas(The War is over)"
by John Leonnen
So this is Xmas. And what have you done.
Another year over. And a new one just begun.
And so this is Xmas. I hope you have fun.
The near and the dear one, The old and the young...
A very Merry Xmas. And a happy New Year.
Let's hope it's a good one Without any fear
And so this is Xmas. For weak and for strong.
For rich and the poor ones.
The world is so wrong
And so happy Xmas. For black and for white.
For yellow and red ones Let's stop all the fight.
A very Merry Xmas. And a happy New Year.
Let's hope it's a good one Without any fear.
And so this is Xmas. And what have we done.
Another year over. A new one just begun.
And so happy Xmas. We hope you have fun.
The near and the dear one. The old and the young.
A very Merry Xmas. And a happy New Year.
Let's hope it's a good one Without any fear.
War is over, if you want it. War is over now.
Happy Xmas
벌써 12월입니다. 이미 11월 말부터 시작된 TV광고와 백화점의 장식등이 12월에 있는 ‘그날’이 곧 우리 눈앞에 다가왔음을 알려줍니다. 방금 읽어드린 존 레논의 “Happy Xmas”도 바로 12월에 있는 그 날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바로 그날은 우리 교회의 가장 큰 축제가 되어야할 성탄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입니다.
12월로 접어들기 전부터 온통 세상은 성탄절 분위기로 바뀝니다. 곳곳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캐럴 송과 성탄 장식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분명 성탄절은 예수란 인물의 탄신일임에도 요즘 성탄절 소식은 교회보다는 다른 곳에서 먼저 접하게 됩니다. 거리 구석구석 화려한 포스트에서, 매일 매일 우리 눈을 고정시키려 몸부림 치는 커다란 TV 속에서, 언제나 우리 옆에서 친근한 음악을 선사해주는 심야 라디오 디스크자키의 달콤한 멘트 속에서, 우편함을 가득 채워 쓰레기 분리의 지겨움을 선사하는 오색찬란한 각종 광고지 속에서, 언제나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교회보다 한발 앞서 인사합니다.
이런 조짐이 11월 중순부터 우리 사회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가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대체로 교회는 잠잠합니다. 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귀한 성탄 찬양은 오직 12월 25일 그날 하루만을 위해 존재하나 봅니다. 다들 벙어리인지, 아님 귀머거리인지, 교회는 고작 우리의 본질을 일깨워주기 위해 오신 이의 날을 하루 이틀 안에 해치워버리는 상당히 경제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성탄의 분위기를 매년 느끼며 적잖은 안타까움을 느끼곤 합니다. 그리고 때로 그 느낌은 성탄을 잃어버렸다는, 아니 빼앗겨버렸다는 분노로 바뀌기도 합니다. 성탄을 빼앗긴 교회, 성탄을 잃어버린 신앙... 그것이 현대 교회의 자화상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성탄은 초대교회 성도에게 그리 중요한 의미를 갖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탄생보다는 부활에 더 큰 비중과 가치를 두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바로 예수의 행적에 대해 가장 오래된 기록 중의 하나라 여기는 마가복음에 예수의 탄생기사가 빠져있다는 점에서도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로마의 박해시기를 거쳐 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1세(272~337)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적인 종교로 인정받음으로써 점차 예수의 탄생일은 점차 비중 있게 다뤄지기 시작합니다. 통일된 로마제국의 종교이념으로서 그리스도교가 자리를 잡아갈 무렵인 336년경에 이르러 로마인의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였던 태양일 축제(동지)에 맞추어 지금의 12월 25일이 예수 탄생일로 고정됩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의 날짜 지정은 로마식의 그리스도교의 토착화 과정의 부산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날짜의 기원도 아니며, 그 날짜의 진위여부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날짜에 대한 ‘의미 부여’이며, ‘가치 부여’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원과 이유가 어쨌든 간에 성탄은 예수의 오신 날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우리에게 구원행위를 통하여 새로운 삶의 의미를 주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육체의 모습을 입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그분은 온 몸으로 보여주시다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따라서 성탄절은 그런 예수의 의미와 목적을 재확인하며 기억하여 계승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서두에서 이미 이야기 했듯이 우리의 성탄절은 상업주의에 멍들어 시퍼렇게 변색되어갑니다. 그 와중에 교회가 보여주는 초라한 모습은 교회의 구석구석마다 각 기관끼리 모여앉아 미리 준비한 선물을 교환하며 깔깔거리며 즐거워하는 지극히 성탄에 반하는 모습일 뿐입니다. 혹자는 깊은 밤을 깨우며 그분의 오심을 노래로 전달하는 새벽 송에 큰 의미를 두며 안위를 받기도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교회 신자 집들만 방문하며 그들이 준비한 음료와 선물에만 기뻐하는 이기적 모습을 내 비칠 때는 그것 역시 위장된 안위일 뿐이라는 것이 금세 탄로 나게 됩니다. 더군다나 지금의 대형교회들은 이런 저런 번거로움을 이유로 이 같은 통과의례마저 간략히 생략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에게 성탄절이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더 이상 우리는 제대로 된 성탄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는 이 땅에 오심으로 이 땅의 그릇된 모습과 방향에 채찍을 들어 포효하셨지만, 그의 유지를 받든다는 교회는 그분의 하신 일을 따라 하기는커녕 그분의 의미마저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탄의 주인공은 더 이상 예수가 아닙니다. 성탄의 주인공은 무덤에 갇히었다 3일 만에 부활한 뒤 하늘로 올라갔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한 사나이가 아니라, 매년 앞장서서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빨간 옷의 사나이, 흰 수염에 두둑한 뱃살을 자랑하는 바로 산타일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산타는 오래 전 가난한 이의 벗으로 그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니콜라우스도 아닙니다. 그들은 더욱더 많은 물건을 소비자들에게 안기기 위해 고용된 일용 세일즈맨일 뿐입니다. 그들은 이미 성탄이 있기 몇 달 전부터 철저한 훈련을 거친 후 고객들 앞에 다양한 매체를 타고 등장해 성탄절은 다정한 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날, 1년 동안 덕본 이들에게 답례품을 주는 날, 가족들과 혹은 연인과 함께 그윽한 분위기의 호텔에서 한 끼 외식을 하는 날, 좀 더 잘 나가면 그 연인과 함께 커피 향으로 무드가 익는 안락한 스위트룸에서 남은 여장을 푸는 날, 그리고 수많은 선물과 상품권들은 이해와 타산에 의해 덕 볼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는 날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성탄절 특수’란 말이 있듯이 성탄은 연인들과 가족들이 그럴듯한 영화 한편 보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대중예술의 꽃이라 불리는 광폭의 스크린에서는 예수란 사나이와는 전혀 다른 변종의 구세주들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면 어김없이 안방극장을 방문하는 대머리에 조금은 어리숙해 보이는 표정이 전매특허인 브루스 윌리스의 무자비한 살인행위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구세주를 영접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로만 성탄절은 장식되지 않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이상을 뛰어넘어버립니다. 지금도 내전(內戰)에 시달리는 세계 여러 나라들, 여전히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친구들에게 성탄절은 그야말로 의미 없는 많은 날 중 하나일 뿐입니다. 여전히 인류의 구세주가 왔다는 그 날에 수많은 사람들이 총탄의 희생자가 되고 있으며, 선진 부국의 식당에서 쏟아지는 음식찌꺼기만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식량문제에 여전히 많은 어린 아이들이 부황기의 얼굴로 죽어가는 그 날도 바로 12월 25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장 저주스러운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표정 없는 이성의 힘으로 역사상 비교할 수 없을 호황기를 누리고 있으며, 지금의 농업기술은 이미 전 인류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농작물을 수확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통계 앞에서도 수없이 굶어주는 주검을 우리는 목격해야합니다. 그들을 구할 수 있는데도 구하지 못하는 이 원통한 우리의 현실을 어찌 저주받지 않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교회는 잠잠입니다. 지금 교회는 그 옛날 예수란 이가 당시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권세 있는 발언’은 잊은지 오래 같습니다. 이미 교회는 벙어리가 된지 오래이며, 이런 성탄의 퇴색 속에도 흐뭇한 선물 교환과 그해 전도 왕에게 멋진 상품권 안기는 것으로 모든 것을 퉁치려 합니다.
그래도 교회는 잠잠입니다. 수없이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먹고살기 위해 고향을 탈출했다 까닭모를 정치계산에 밀려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수많은 난민의 두려움 속에서, 한 술의 죽이 없어 힘없이 눈을 감는 우리의 또 다른 자녀들 속에서 아기 예수 역시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는 잠잠합니다. 우리에겐 그 귀한 잠을 참아내며 완주한 새벽송이라는 면죄부가 있기 때문일까요?
교회는 잠잠합니다. 주인과 객이 뒤바뀐 이 참담한 현실을 타개할 그 어떤 꿈도 꾸지 않는 채! 지금도 우리는 잠잠함으로 우리의 신을 모독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성탄을 잃어버렸습니다.
성탄의 의미로 오신 분을 우리는 임마누엘이라 부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입니다. 우리가, 지금의 교회가 이 임마누엘의 신앙을 참으로 온 몸으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성탄은 산타의 몫일뿐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저주까지 퍼부어가며 욕했던 존 레논이 부르는 이 캐롤이 되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여러분들은 무엇을 하셨나요?
한 해가 지나고 막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답니다.
그처럼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여러분 모두에게 즐거운 일들이 함께 했기를 기대합니다.
가까운 이나 다정한 이나, 나이 든 이나 젊은 사람 모두에게...
즐거운 성탄과 행복한 새해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그날이 참 좋은 날이라 희망합시다.
그 어떤 두려움도 없는...
그처럼 이번 크리스마스는 약한 이나 힘 있는 이나
부유한 이나 가난한 이들 모두를 위한 날이길 바랍니다.
그래요, 세상은 그처럼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피부가 검은 이나, 하얀 이, 그리고 노란 이나 붉은 이들…
그 모두에게 행복한 크리스마스이길 바랍니다.
자, 이제 모든 싸움을 끝내도록 합시다.
즐거운 성탄과 행복한 새해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그날이 참 좋은 날이라 희망합시다.
그 어떤 두려움도 없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여러분들은 무엇을 하셨나요?
한해가 지나고 막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답니다.
그처럼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여러분 모두에게 즐거운 일들이 함께 했기를 기대합니다.
가까운 이나 다정한 이나, 나이 든 이나 젊은 사람 모두에게…
즐거운 성탄과 행복한 새해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그날이 참 좋은 날이라 희망합시다.
그 어떤 두려움도 없는…
만약 여러분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전쟁은 끝낼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 그 전쟁을 끝낼 수 있습니다.
Happy Xmas!”
그가 홀로 외쳤듯이 우리도 외치길 바랍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모든 싸움을 끝냅시다. 모든 전쟁을 멈춥시다. 그분이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속물의 세상을 하나님의 딸과 아들로 살아가는 법을 보이신 분이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할 말을 하며, 해줄 일을 해나갈 때 잃어버린 성탄은 다시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할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이제 고함이라도 칩시다. 무엇이 옳고 그르며, 무엇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지를!
그리고 그들이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로 실망의 눈빛만을 쏘아붙이고 있다면, 우리가 나섭시다. 작은 소리가 큰 함성이 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여전히 기회가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러한 꿈을 꿉니다. 언젠가 정말 성탄다운 성탄을 우리가 볼 수 있을 것임을.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기원합니다.
이길용/서울신대 교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017년 세종교양도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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