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5)
우리 하느님이 달라졌어요!
야훼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야훼께서는 탄식하셨다.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되는구나.” 그러나 노아만은 야훼께 은혜를 입었다(창세기 6:5-8).
노아는 야훼 앞에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집짐승과 정결한 새들 가운데서 제물을 골라서 제단 위에 번제물로 바쳤다. 야훼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서 마음속으로 다짐하셨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창세기 8:20-22).
1.
잊을 만하면 중동 어딘가에서 노아의 방주 한 조각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떠오른다. 그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성서가 꾸며낸 얘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이 입증됐다고 환희에 차서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성서가 역사적 사실이란 게 그깟 나뭇조각 하나에 좌우된다고 믿는 게 제대로 된 믿음일까? 그게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노아 방주 얘긴 꾸며낸 얘기거나 믿을 수 없는 얘기가 되나? 그깟 나무 한 조각의 힘이 그렇게 큰가 말이다.
우린 노아가 어느 시대 사람인지 가늠하지 못한다. 대략이라도 가늠 못한다. 그를 신화적 인물로 치부하는 학자들이 많은 게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이유다. 성서를 글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사람들에게는 노발대발할 말이지만 그들도 노아의 연대기를 자신 있게 제시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사정이 이러니 발견된 나뭇조각이 노아의 방주 파편인지 여부를 입증할 방법은 없겠다. 그걸 반증할 길도 없지만 말이다. 어찌됐든 나무 한 조각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문제는 그까짓 걸로 성서의 역사성을 입증하려는 태도다. 역사적 사실이 아니면 하느님 말씀으로서 성서의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듯이. 성서가 역사적 사실성 여부에 무관심하진 않지만 전적으로 거기에 좌우되지는 않음을 잊지 말 일이다.
이전 글에서 나는 구약성서의 많은 얘기들이 매우 축약되었거나 빈 공간이 많다고 썼다. 설명이 반드시 필요한 대목에서 불친절하게 설명 없이 넘어간 경우도 많고 복잡한 내용이 짧은 글 속에 함축된 경우도 많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독자들이 안다고 전제하고 설명 없이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독자는 때론 빈 공간을 메워가면서, 때론 압축파일 풀어가면서 읽어야 한다. 두 경우가 공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아 얘기가 딱 그렇다. 이 얘긴 창세기 6장에서 9장까지 상당히 길게 펼쳐져 있지만 그래도 메워야 할 공간과 풀어야 할 압축파일이 적지 않다.
작년(2014년)에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의 영화 <노아>가 개봉됐다. 영화는 개봉되기 전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기독교인들이 기대 반 우려 반으로 개봉을 기다렸다. 그런데 내용이 알려지기 전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영화를 단체 관람하려 했다가 내용이 알려지자 취소했단다. 영화가 성서 얘기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하긴 출처불명의 나뭇조각 하나에도 흥분하는 사람들에게 성서 얘기를 제멋대로 바꾸는 건 용납할 수 없는 ‘폭거’였을 거다. 영화에 대해서는 글 중간에 필요할 때마다 얘기해보겠다. 여기서 한 마디 하고픈 말은, 나뭇조각 하나에 성서에 대한 신앙을 의존하는 게 더 문젤까, 상상력을 발휘해서 얘기 가운데 존재하는 빈 공간을 메워 가면서 읽는 게 더 문젤까? 전자는 ‘불안’에서 나오는 것이고 후자는 ‘용기’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나는 당연히 후자를 택한다. 노아 얘기가 하느님의 의지와 말씀을 담고 있는 하느님 말씀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뭇조각이 발견되든 발견되지 않든 상관없이 말이다. 안타깝게도 이 얘기엔 빈 공간이 많아서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없으니 용기 있게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 빈 공간을 메워가면서 읽어보겠다. 애로노프스키가 영화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2.
흔히 이 얘기를 ‘노아 홍수 이야기’로 부르지만 내용을 잘 읽어보면 얘기는 홍수사건 자체에 초점이 놓여 있지 않다. 이 얘기는 유례없이 세상을 뒤덮은 홍수라는 자연 현상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그 사건 전후에 하느님과 사람의 가슴을 뒤흔들었던 사건에 대한 얘기다. 40일 내내 쏟아져 땅을 뒤덮은 물 못지않게 사납게 출렁거렸던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었고 사람의 ‘영혼’이었다. 창세기 6-9장은 바로 이걸 말하고 있다.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 마음을 들여다보겠나, 자기 마음속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는데. 사람이 못 하는 걸 설화자는 수시로 한다. 설화자는 하느님 마음속 생각을 독자에게 알려준다. 이 얘기가 그렇게 시작된다.
야훼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어떤가? 흥미진진하고 호기심이 솟아나지 않나? 하느님은 ‘탄식’까지 하셨다는데! 대체 사람이 무슨 짓을 했고 얼마나, 어떻게 악했기에 하느님은 사람 지은 걸 후회하고 마음 아파했으며 탄식까지 했을까?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선 텍스트 안에서 답을 찾는 게 먼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창세기 6-9장에선 답을 찾을 수 없다. 다음으로는 앞장과 뒷장을 뒤져볼 일이다. 앞장에선 그럴만한 얘기가 없다. 물론 가인과 라멕이란 악당이 등장하지만 그 정도 악당들 때문에 야훼가 사람 만든 걸 후회했다? 그게 말이 되나? 여러분은 공감이 되시나? 가인이 아우를 죽인 일과 라멕이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죽이고 자기를 해칠 사람은 일흔일곱 갑절의 보복을 하겠다고 큰 소리 친 일이 잘한 짓은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을 다 쓸어버린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좀도둑질했다고 사형에 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고대 해석자들과 후대 학자들은 홍수 심판의 이유를 다른 데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주목한 구절이 창세기 6장 1-4절이었다.
사람들이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그 무렵에, 그 후에도 얼마 동안 땅 위에는 네피림이라고 하는 거인 족이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사람의 딸들’이 누군지는 분명하다. 말 그대로 사람의 딸들, 곧 여자들을 가리킨다. 문제는 ‘하느님의 아들들’의 정체다. 구약성서에는 신화(myth)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천상의 신적 존재와 지상의 사람이 성관계를 갖는다는 얘기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들’이 왕을 가리킨다느니 엘(El) 신을 섬기는 목축업자를 지칭한다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들 신분을 정해줬지만 다 근거는 박약하기 이를 데 없다. 이상한 점은, 구약성서에는 신화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여기처럼 가나안 신화가 구약성서에 흘러들어왔다고 보는 덴 어찌 그리 관대한지…. 열린 마음으로 읽으면 이 얘기엔 신화적 요소들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럴 이유도 없고.
고대 중동과 지중해 지역의 신화에는 신과 사람이 결합했다는 얘기가 널려 있다. 이 얘기도 그 중 하나로 볼 수 있겠다. 얘기는 천상에 사는 신적 존재(흔히 ‘천사’라 불리는 존재)가 지상 여자들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그들과 결혼해서 ‘네피림’이라고 부르는 거인족을 낳았다는 거다. 후대전승은 이들을 타락한 천사라고 부르는데 본래 얘기에도 그렇게 볼 근거가 없진 않다. 그게 야훼 맘에 들지 않았다니 말이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거인 족에 대해서는 구약성서에 별다른 기록이 없다. 민수기 13장 32-33절에서 가나안을 정탐한 일부가 “우리가 탐지하려고 두루 다녀 본 그 땅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삼키는 땅이다. 또한 우리가 그 땅에서 본 백성은 키가 장대 같은 사람들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또 네피림 자손을 보았다. 아낙 자손은 네피림의 한 분파다. 우리는 스스로가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라고 부정적으로 보고한 얘기에 네피림이 등장한다. 여기엔 신화적인 색채가 없다는 점에서 창세기 6장의 얘기와 다르지만 말이다. 그밖에 에녹 1서, 집회서, 희년서 등은 모두 거인 족을 악당으로 묘사한다.
노아 홍수와 관련된 이런 류의 얘기를 다 하려면 한이 없다. 이 얘기의 기원과 문학적 특성에 대해선 한 세기 이상 전에 규명되었다. 이 얘기가 바빌론의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홍수 얘기와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 못한다. 신(바빌론에서는 ‘신들’)이 홍수를 일으키기로 결정했다는 점, 한 사람에게만 그 사실을 알렸다는 점, 그 사람 가족만 구원된다는 점, 그가 신(들)의 지시에 따라 방주를 짓는다는 점, 신(들)의 지시에 따라 동물들을 방주에 태운다는 점, 새를 통해 홍수가 끝났음을 알게 된다는 점, 방주가 산위에 머문다는 점, 감사의 제사로 얘기가 마무리된다는 점 등이 유사점들이다. 이 정도로 비슷하다면 요즘은 ‘표절’로 걸린다. 길가메시 서사시가 발견된 이후로 오랫동안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하느님 계시로서의 성서의 권위가 추락하는 걸 막자는 학계와 교계의 ‘담합’ 때문이었으리라.
이것 말고도 이 얘기는 내적으로도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이 점은 글이 ‘짭쪼름’해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아서 그냥 넘어가면 좋겠지만 그러면 너무 섭섭하니까 간단히 언급하겠다. 창세기 6-9장에 J 문서와 P 문서, 두 갈래의 얘기가 얽혀 있음이 알려진 것도 벌써 한 세기가 넘었다. 벨하우젠(J. Wellhausen)이 정리한 소위 ‘문서가설’(documentary hypothesis) 얘기다. 1970-80년대에 우리나라 구약학계에서 이런 얘길 하면 경을 쳤다. 이 문제로 학교에서 쫓겨난 학자도 있다고 들었다. 그때 이미 서구학계에선 이 가설을 넘어서고 있었는데 말이다. 서구학계에서는 창세기, 나아가서 오경 전체를 하나의 문학 단위로 읽는 추세였다. 그렇다고 해서 비평 이전시대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문서가설을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창세기와 오경을 하나의 커다란 문학 작품으로 읽었다는 말이다. 지금도 이 흐름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 학자들은 문서가설을 더 정교하고 세련되게 다듬기 위해 언급하기보다는 그걸 넘어서서 새로운 얘기를 하려는 ‘발판’으로 활용하고 있다.
홍수 얘기에는 유독 반복이 많은데 J 문서와 P 문서가 얽혀 있기 때문에 그렇다. 곧 홍수가 인간의 죄악 때문이란 얘기, 그래서 하느님이 세상을 멸하기고 결심한 얘기, 홍수의 예고, 노아에게 동물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라고 명령한 얘기, 홍수가 시작된 얘기, 방주 밖의 모든 생물이 죽었다는 얘기, 홍수가 끝나고 물이 줄어들었던 얘기, 배에서 나온 애기, 다시는 홍수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하느님이 약속한 얘기 등이 중복 서술되어 있다. 이 가운데 홍수의 이유, 방주에 들어간 동물의 숫자, 홍수의 기간, 마른 땅을 확인한 방법 등에 대해서 두 문서가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 눈이 띤다. J 문서는 홍수의 이유가 사람의 악행 때문이라고 말하지만(6:5) P 문서는 땅이 부패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6:11). 배에 들어간 동물의 숫자도 J 문서는 깨끗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 숫자를 달리 전하지만(7:2-3) P 문서는 모든 동물이 한 쌍씩이었다고(6:7, 15, 19) 전한다. 홍수 기간에 대해서도 J 문서는 40일 동안 비가 온 후 61일 동안 계속됐다고(7:10; 8:6-13) 말하지만 P 문서는 150일 동안 물이 차 있었고(7:14) 1년 동안 계속됐다고(7:6; 8:13) 말한다. 가장 눈에 띠는 차이점은 J 문서가 마른 땅을 확인하려고 비둘기를 세 번 내보냈다고(8:8-12) 말하는데 반해 P 문서는 까마귀를 한 번만 보냈다고(8:7) 말한다는 점이다.
이 중엔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는 차이도 있다. 홍수의 원인은 사람이 죄악을 저질러서 땅이 부패했다고 종합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방주에 들어간 동물의 숫자나 마른 땅을 확인하러 내보낸 새의 종류가 다른 점 등은 얼버무리기에는 너무 차이가 크다. 성서는 모든 점에서 절대적으로 오류가 없다고 철썩 같이 믿던 시대에 이런 차이점을 발견한 사람의 고민이 얼마나 컸을까를 상상하면 지금도 안쓰럽다. 성서를 역사적, 학문적으로 연구하면서 이런 차이들이 ‘설명’되었다. 홍수 얘기에는 두 가지 문서가 얽혀 있기 때문에 중복과 차이들이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최종 편집자가 왜 이 차이들을 그대로 두었는지를 ‘이해’하는 게 아닐까? 최종 편집자가 시각 장애인이나 바보가 아닌 한 이런 차이들이 있음을 알았을 터인데 왜 그는 조화를 꾀하지 않고 그걸 그냥 뒀느냐 말이다. 왜 그랬을까? 각각의 문서가 전하는 메시지가 공히 중요했기 때문에 얘기의 흐름이 어색해지더라도 후대에 전해야겠다고 여겼을까? 나는 그렇다고 추측하는데 얼마나 맞는 얘기인지 모르겠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
(출처: http://media4lifeministries.com)
3.
짭쪼름하지 않은 얘기는 그만 두고 이젠 짭쪼름한 얘길 해보자. 앞에서 홍수 얘기는 메워야 할 공간도 많고 풀어야 할 압축파일도 많은 얘기라고 했다. 그런데 그 동안 성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여기엔 관심을 두지 않고 서술된 얘기에만 집중해서 거기서 의미를 찾아내려 애써왔다. 하지만 성서학이 일반 문학 비평 방법인 설화비평(narrative criticism)이나 수사 비평(rhetorical criticism), 독자 반응 비평(reader response criticism) 등의 방법론을 성서 텍스트에 적용하기 시작한 1960년대 말 이후로는 독자가 상상력을 발휘해서 성서텍스트의 빈 공간을 메우거나 압축파일 푸는 시도를 과감하게 해왔다. 아르노프스키의 영화 <노아>는 이 방법을 활용해서 홍수 얘기를 스크린으로 옮겼다고 보면 되겠다.
하느님이 사람의 죄악이 너무 커서 그들을 땅위에서 쓸어버리기로 결심했다고 말한 다음 설화자는 “그러나 노아만은 야훼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한다.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아는 우리에겐 이 말이 뜬금없이 들리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할 거다. 대체 왜, 노아에게 어떤 미덕이 있었기에 그 사람만 야훼의 은혜를 입었는지 궁금해서 말이다. 설화자는 이 궁금증을 자기도 이해한다는 듯 바로 다음에 “노아는 그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9절) 라는 말을 덧붙인다. 야훼는 사람과 세상이 속속들이 썩었다는 자신의 평가를 노아에게만 알려주고 그래서 그들을 홍수로써 심판할 터이니 방주를 지어 가족들과 짐승들이 살아남게 하라고 지시한다.
방주에 들어간 사람과 짐승들을 제외한고 숨 쉬는 모든 짐승들이 몰살당한 재난에서 오직 노아 가족만 야훼의 은혜를 입었다면 거기에 합당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그는 의롭고 흠 없고 야훼와 동행하는 사람”이라는 서술은 그가 왜 야훼의 은혜를 입었는지를 설명하는 말이겠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한 점은 대체 그가 뭘 했기에 야훼에게 이런 칭찬을 들었느냐는 거다. 여러분은 안 궁금한가? 고대 해석자들도 여기에 주목했다. 그들은 노아가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했을 거라는 추측으로 이 빈 공간을 메웠다. 시빌의 신탁, 요세푸스의 역사책, 신약성서 베드로후서, 클레멘트 1서 등은 하나같이 그가 회개를 선포했다고 말한다. 창세기 6장에는 없지만 그럴듯하니까 나는 그런 얘기가 있는 걸로 착각했었다. 그러니까 없는 얘길 상상력을 발휘해서 집어넣는 걸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고대 해석자들도 다 그렇게 했으니 말이다. 우리라고 못 하란 법 있는가! 추측이 맞는지 그른지, 받아들일지 말지는 그 다음 문제다. 노아의 의로움은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했기 때문이란 해석은 텍스트적 근거는 없지만 오랫동안 옳다고 여겨져 온 거다.
이보다 더 곤혹스러운 점은 하느님이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하겠다고 알려줬을 때 노아는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점이다. ‘그래, 맞아. 세상은 마땅히 망해야 해! 하느님이 잘 결정하신 거야.’라고 생각했을까? ‘그들이 다 죽는 건 안 됐지만 그래도 다행이네. 나와 내 가족은 살게 됐으니….’라고 생각하며 안심했을까? 아니면 ‘이를 어쩌지? 아무리 죄악이 극심해도 그렇지 세상을 몰살한다는 게 말이 돼? 나라도 뭐든 해야 하는 게 아닐까?’라며 안절부절 했을까?
영화 <노아>는 홍수 계시를 받은 후 노아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를 보여준다. 성서에는 없는 얘기다. 이걸 요나서와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요나는 민족의 원수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걸 바라지 않았다. 하느님은 왜 택한 백성의 원수까지 사랑하느냐는 거다.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얼마나 컸으면 하느님의 지시를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갔겠나. 악인이 구원받는다는 것도 괴로운 일이지만 그들의 멸절을 지켜보는 것도 편치는 않은 일이다. 악인이 심판받아 죽는 게 괴롭지 않고 기쁜 일이라면 노아가 어떻게 당대의 의인이고 하느님과 동행하는 사람이겠는가. 요즘 ‘불신지옥’을 목청껏 외치는 사람들은 교리적으로 옳은지 그른지와 무관하게 그게 기독교인으로서 태도일까?
영화 <노아>는 많은 논쟁거리를 던졌는데 그 중 하나는 노아가 홍수 계시를 ‘말씀’이 아니라 꿈속에서 ‘이미지’로 받았다고 표현한 점이다. 노아가 야훼로부터 홍수에 대한 계시를 확실히 받지는 않았다. 꿈은 하느님의 계시일 수도 있지만 ‘개꿈’일 수도 있으니까. 따지고 보면 모든 계시는 어느 정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꿈의 경우는 분명히 그렇다. 꿈에 하느님이 나타나서 이래라저래라 했다고 해도 그게 하느님인 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나.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하느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해도 말씀한 분이 하느님인지 어떻게 확신하겠나. 악마가 하느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영화는 홍수 계시가 말씀이 아니라 이미지로 주어졌다고 표현함으로써 이 점을 잘 지적했다고 여겨진다. 계시를 받고 그걸 확인하는 과정은 부득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의 노아는 고민에 빠진다. 꿈속의 이미지대로 홍수가 닥칠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서 설화자는 하느님 마음까지 다 읽지만 노아야 어디 그런가, 말씀이 됐든 이미지가 됐든 그는 그것을 해석해야 한다. 말씀은 이미지보다는 덜 하지만 그래도 해석해야 하는 건 같다. 애로노프스키가 말씀대신 이미지를 갖다 쓴 이유는 해석자 노아에게 더 큰 여지를 주기 위해서였을 거다. 노아는 꿈속의 이미지가 계시인지 아닌지 여부를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행을 목격한 데서 확인한다. 그는 아들 함의 배우자를 찾으러 사람들 마을에 갔다가 식량을 구하기 위해 딸까지 팔아먹는 사람들의 사악함을 목격하고 하느님이 세상을 멸절하려 한다고 확신한다. 하느님 계시의 진실성이 사람들 삶의 모습에서 확인된 것이다. 이처럼 계시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건 쉽지 않다. 계시 받은 사람이 성서의 설화자처럼 하느님 마음속 생각까지 알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계시가 와도 고민, 안 와도 고민이다. 안 오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이고, 오면 그걸 어떻게 올바르기 해석할까 고민이다. 제대로 해석해야 실행에 옮길 테니 말이다.
4.
40일이 됐든 150일이 됐든 비가 오는 동안 방주 안에서 노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바깥에서 죽어가는 사람과 짐승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을까? 죽어가는 그들을 보면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왜? 대체 왜 이래야 합니까? 이게 최선입니까?”라고 하느님에게 울부짖었을까? 성서 텍스트는 비가 오는 동안 방주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안에 있던 자들이 바깥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에 대해서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이게 다 채워야 할 빈 공간이다. 그래서 영화는 몇 가지 사건들을 창작한다. 노아와 함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이유는 노아가 함의 반려자인 나엘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얘기, 두발가인이 노아에 대한 함의 증오에 힘입어 방주에 올라탔고 노아와 갈등한다는 얘기, 노아가 셈의 아내 일라가 낳은 쌍둥이 딸을 죽이려 했다는 얘기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성서에 나오지 않는 얘길 꾸며냈다고 해서 영화는 기독교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그들에겐 이런 짓이 성서의 ‘왜곡’이다. 영화는 성서를 ‘왜곡’했다기보다는 ‘해석’했다. 해석은 빈 공간을 메우고 압축파일을 푸는 작업인데, 해석하지 않고 이 얘기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영화 감독은 해석의 작업을 수행했던 거다. 그의 해석이 옳은가 그른가는 다른 문제다. 성서 얘기에 엄연히 빈 공간과 압축파일이 존재한다면 그걸 메우고 풀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모호한 메시지를 재구성해냈다면 그건 왜곡이 아니라 해석이라고 불러야 한다. 영화는 왜곡과 해석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했다고 여겨진다.
비가 멈추고 땅이 마른 후 노아 일행은 밖으로 나왔다. 나와서 그는 의인답게 야훼에게 제사를 바쳤다. 야훼는 번제물의 향기를 맡고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고 한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여기서도 설화자는 야훼의 마음속 생각까지 꿰뚫고 있다. 그러고 나서 야훼는 노아와 그 후손들과 더불어 다시는 홍수로 땅을 파멸시키는 일은 없으리라는 ‘언약’을 세우고 그 증표로 무지개를 세웠다. 하늘에 무지개가 설 때마다 야훼는 홍수로 벌하지 않겠다는 언약을 기억하겠다는 거다. 이 얘기는 글 마지막에 생각하기로 하고 여기선 노아가 술 취해서 벌어진 일에 대해 좀 얘기해보자.
홍수 후에 노아는 밭을 가는 사람이 되어 포도나무를 심었다. 하루는 그가 포도주를 마시고 장막에서 벌거벗고 잠들었다는 거다. 성서에서 술 마시고 취하는 사람 얘기는 여기에 처음 나온다. 그것도 벌거벗고 잠이 들었다니 술 마시는 사람은 늘 행실을 조심할 일이다. 세 아들 가운데 함이 이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본 그는 그걸 가릴 생각은 안 하고 형들에게 이를 알렸다. 형들은 겉옷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쳐서 장막 안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지 않고 덮어줬단다. 이들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지 않았다는 거다. 노아는 술에서 깬 뒤 아들들이 한 짓을 알고 함에게는 저주를 퍼붓고 셈과 야벳은 축복했다는 거다.
이 얘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버지의 벗은 몸(물론 하체, 더 정확히는 생식기를 가리킨다)을 봤다고 해서 “가장 천한 종이 되어 형제들을 섬길 것”이라니! 그게 정말 그런 저주를 받아야 할 ‘악행’인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지 않았다고 해서 함의 후손인 가나안을 종으로 부릴 거라니, 그게 그만한 특권을 누릴 ‘선행’인가? 이건 훗날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것을 내다보고 한 말이거나 정복한 다음에 그걸 과거로 투사해서 한 말이 아닐까? 학자들은 그렇게 추측한다. 노아가 집안에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가부장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야훼의 ‘갑질’을 보고 배워서 그런가? 별 생각이 다 든다. 왜 이러나? 정말 이래도 되나?
나만 이게 곤혹스러운 건 아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해석자들이 이 얘기를 곤혹스러워 했고 어떻게든 말이 되게 해석해보려고 애써왔으니 말이다. 혹자는 이게 동성애 금지명령과 관계있다고 봤고 혹자는 가나안 사람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혐오감의 반영이라고 봤다. 다 일리 있는 해석이다. 나는 노아의 벗은 몸을 보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하느님의 하체를 봐서는 안 된다는 얘길 상징한다고 이해한다. 구약성서에서 가부장인 아버지는 하느님을 상징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에 대해는 졸저 《하느님 몸 보기 만지기 느끼기》 141-144쪽에서 자세히 얘기했다.
노아에 대해서 그가 ‘왜’ 벌거벗고 잠이 들 정도로 술에 취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얘기한 사람이 별로 없다. 물론 누군가는 이에 대해 썼겠지만 과문(寡聞)한 탓인지 학자든 목회자든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서 쓴 글을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는 왜 술에 취했을까?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얘긴 물론 아니다.
혹시 홍수 사건이 그에게 미친 영향에 원인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방주에 들어간 가족과 짐승 외에는 모두 죽었다. 그는 긴 세월 방주를 만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대 해석자들의 말대로 회개를 선포했다면 자기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그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홍수가 끝나고 물이 빠진 다음 방주 바깥으로 나와서 살아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세상을 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어떻게 살았을까? 얘기는 “홍수가 있은 뒤에도 노아는 삼백오십 년을 더 살았다. 노아는 모두 구백오십 년을 살고 죽었다”(창세기 9:28-29)라는 무미건조한 서술로 마무리된다. 그의 생애가 이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가 긴 세월을 어떻게 살았는지, 인류의 몰살을 경험하고 정말 제정신으로 살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얘기다.
살아남은 사람의 슬픔. 살아남은 사람의 고통. 성서는 이에 대해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아는 술 취하지 않고 맨 정신으로 나머지 생을 살 수 있었을까? 정말 그럴 수 있었을까?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는 전쟁이 끝난 훨씬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수용소에서 겪은 참혹한 경험이 그를 놔주지 않았을 거다. 노아는 방주 밖에서 죽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평생 그 광경을 잊을 수 있었을까? 함에 대한 저주는 그의 정신적 불안이 낳은 또 다른 불행이 아니었을까? 이 대목에서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건 세월호 참사다. 참사가 벌어진지 280여 일이 지난 지금, 세월호 특별법을 다뤄야 할 특별위원회는 유명무실하고 국민의 세금 운운하면서 배의 인양도 꺼리고 있단다. 돈은 핑계일 뿐 참변의 원인이 밝혀지는 게 두렵기 때문일 게다. 세월호 가족들은 오늘도 추운 거리를 걷고 있다. 노아 홍수와 세월호 참변이 겹쳐지면서 내 가슴에도 거센 물결이 출렁임을 느낀다. 대한민국은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대한민국 국민은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노란색만 봐도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어떻게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겠나.
5.
마지막으로 홍수로 세상을 멸절한 야훼의 심정은 어땠을까를 묻는다.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은가? 다행히 설화자는 그걸 엿볼 수 있는 작은 실마리를 남겨놓았다. 야훼는 홍수가 끝난 후 노아가 바친 제물의 향기를 맡으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단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나는 처음으로 이 구절을 제대로 읽었을 때 말할 수 없는 분노로 치를 떨었다. 왜냐고?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갔다고 말하는데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나! 홍수 이야기 서두, 야훼가 온 세상을 심판하기로 작정했을 때 그가 뭐라고 말했나.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사람 지었음을 후회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물로 심판하기로 했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심판하고 난 다음에, 그러니까 모든 사람과 짐승을 몰살한 다음에 한다는 말이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라고? 그럼 다시 한 번 심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앞에선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이어서 심판해야겠다더니 뒤에선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라서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두 선언이 글자 그대로 똑같지는 않지만 결국 그 얘기가 그 얘기다. 그런데 앞에선 그래서 심판해야겠다더니 뒤에선 그래서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니, 이게 말이 되냐는 얘기다.
옛 어른들은 사람의 타고난 성격은 고치기 힘들다고 말했다. 다들 공감할 거다. 은혜 받았다고 성격이 고쳐지지는 않는다. 노아 얘기도 같은 말을 한다. 사람의 악한 성질은 홍수 심판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고.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는 홍수 후에 사람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었단다. ‘새로운’ 언약을 맺으려면 뭔가가 달라져야 한다. 그래야 맺은 언약을 ‘새롭다’고 할 거 아닌가. 홍수 사건은 야훼가 ‘부분 수술’로는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해서 감행한 ‘대수술’이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바꿔버린 수술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고칠 수 없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었다. 대수술 후에도 사람 마음은 언제나 악할 뿐이었던 거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홍수 심판 후에도 사람의 마음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말이다. 남은 방법은 하나, 야훼가 변하는 것뿐이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가 아니라 ‘우리 하느님이 달라졌어요!’라는 거다. 야훼는 새 언약을 세우면서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야훼는 다시는 이런 식으로 심판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거다. 야훼의 마음이 변했다. 야훼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사람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가 달라졌다면 그건 하느님이 변했기 때문이다. 달리 해석할 수는 없다.
이걸 우리는 ‘은총’이라고 부른다. 싸구려 은총 아닌 비싼 은총이다. 사람은 안 변했는데 하느님이 변해서 심판 대신 은총을 준다니까 이를 ‘공짜’라고, 횡재했다고 좋아 날뛰는 사람은 ‘은총’이라는 말은 입에 올릴 자격이 없다. 은총은 하느님 마음속에서 격렬하게 일었던 풍랑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은총을 사람에게 주기 위해 하느님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가. 하느님은 홍수라는 수술 칼로 사람의 환부를 도려내려 했지만 그래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자신의 가슴을 도려낸 거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을 안다는 건 그분 가슴의 아픈 상처에 손을 얹는 걸 의미하고 그 손을 자기 가슴에 얹는 것 의미할 게다. 아마 그럴 거다. 아니 분명히 그렇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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