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3)
선악과, 하느님의 갑질?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기 2:16-17 공동번역)
“You may freely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you shall not eat, for in the day that you eat of it you shall die.” (같은 곳, RSV)
1.
선악과 얘기를 설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성서학자들이 땀과 에너지를 쏟아 부었을까? 얼마나 많은 종이와 잉크가 쓰였을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노력과 계산 안 될 정도의 물자가 이 얘기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부어졌다. 그럴만한 가치가 과연 있었을까? 이 얘기가 그만한 노력과 물자를 쓸 정도로 가치 있는 얘기인가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대다수의 구약학자들과 목사들은 당연히 그런 가치가 있다고 대답할 게다. 그 이상의 가치를 가졌다고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본질을 설명하는 얘기이고 사람 사는 세상에 만연한 죄와 악의 기원을 말하는 얘기이므로 모든 걸 다 바쳐서라도 그 뜻을 파악해야 한다고 할 거다. 정말 그럴까?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왜 구약성서에서 선악과 얘기는 애오라지 여기만 등장할까? 그토록 중요하다면 반복해서 얘기하고 설명해서 사람들 뇌리에 단단히 새겼어야 하지 않을까? 선악과 얘기가 고대 중동지역 문헌에서 한 번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구약성서에서도 여기 외엔 이 얘기가 한 번도 안 나온다는 사실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상한 점이 또 있다. 선악과 얘기는 답하기 어려운 물음들을 제기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하느님은 왜 에덴동산에 선악과나무란 걸 갖다 두었을까 하는 기본적인 물음에서부터 그걸 왜 눈이 잘 띠는 동산 ‘한 가운데’에 두고 먹지 말라 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하느님은 첫 사람들이 그걸 먹지 않길 바랐는지 먹길 바랐는지조차 헛갈린다. 전자라면 왜 하필 동산 ‘한 가운데’ 갖다 뒀는가 말이다. 창세기 22장 1절은 하느님이 아브라함더러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했을 때 그게 아브라함을 ‘시험’하려는 거라고 분명히 밝힌다. 여기서 하느님은 사람을 시험하려 했던 걸까? 그럼 하느님은 그들이 그걸 따먹으리란 걸 몰랐다는 얘긴데 전지전능한 분이 어찌 그럴 수 있나 말이다. 뱀은 그걸 먹으면 그들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 어떻게 알았을까? 금령을 직접 받은 아담도 몰랐던 사실을 말이다. ‘선악과’의 정식이름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이니 그걸 먹으면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일 터이다. 그걸 금지한 하느님은 사람이 그런 지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말은 왜 실현되지 않았을까?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당일에 죽기는커녕 930세까지 살았다니 말이다.
이 밖에도 질문들이 많은데 텍스트는 거기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 그럼 교회라도 답을 주었어야 하는데 교회도 거기서 ‘원죄’ 교리를 끄집어낸 것 외엔 답을 제공하지 못했다. 2천 수백 년 동안 수많은 구약학자들이 노력했지만 어느 것도 정설이 되지 못했다. 내가 그것들을 다 찾아보진 않았지만(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나!) 내가 찾아낸 답들은 전부 제각각이었다. 이래저래 선악과 얘기는 신앙에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2.
언제부터인지 선악과 얘길 읽을 때 욥이란 인물이 떠오른다. 언뜻 보기엔 둘은 관련이 없는 얘긴데 왜 욥이 떠오른 걸까? 나도 처음엔 이유를 몰랐는데 찬찬히 생각해보니 두 얘기 모두 중요한 신학적인 질문을 던져놓고 답을 주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음을 알았다.
구약성서 지혜문학에 속한 욥기는 ‘의로운 사람이 왜 고통을 당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룬 책이라고 말들 한다. 왜 하느님은 의로운 사람이 부당하게 고통당하게 버려 두냐는 거다. 이를 신학 용어로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라고 부른다. 욥기는 오랫동안 그렇게 여겨졌다. ‘의로운 사람이 이유 없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책으로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보다 ‘사람이 보상 없이 하느님을 믿을 수 있을까?’가 욥기의 주제라고 말들 한다. 욥기의 주제는 1장 9절에서 사탄이 하느님에게 던진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라는 물음에 담겨 있다는 얘기다. 욥기의 주제는 욥이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그걸 소재로 해서 보상을 바라지 않고 믿는 게 가능하냐를 묻는다는 거다.
욥기 저자는 경건하고 순종적이던 욥을 3장부터 불손하고 저항적인 인물로 돌변시킨다. 세 명의 친구들이 그를 위로하러 왔지만 그의 신성모독적인 태도에 분노하여 그를 위로하려던 마음을 접고 판단하고 정죄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욥의 고통은 그가 저지른 죄와 불순종에서 비롯됐다고, 하느님이 사람을 왜 이유 없이 벌하겠냐고, 그러니 네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잘 생각해보고 회개하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욥은 물러서지 않고 자기는 이런 고통을 당할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양편의 대결은 접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린다. 그래서 욥은 제삼자를 재판관으로 세우려 하지만 여기서 누가 재판관이 될 수 있겠나. 그럴만한 존재는 하느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욥은 하느님을 재판관으로 세우려 하는데, 아뿔싸, 하느님은 이 법정에서 피고이기도 하지 않은가! 욥도 세 친구들의 생각의 차이를 그리 크지 않다. 그도 자기가 당하는 고통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됐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그게 잘못됐다는 거다. 그러니 하느님은 법정에서 피고석이 앉아야 한다. 그런데 동시에 하느님은 이 소송에서 공정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재판관이기도 하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여기서 욥은 진퇴양난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다. 그는 하느님에게 통사정한다. 제발 자기를 힘으로 누르지 말고 공정하게 판단해 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욥도 이미 알고 있다. 하느님이 재판관이자 피고인 재판은 어차피 공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 노령(?)의 세 논객들이 논쟁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 걸 보다 못한 엘리후란 청년이 논쟁에 끼어들지만 대세를 바꾸진 못하고 슬그머니 사라진다. 그 다음엔 누가 등장할 차례인가? 이제 남은 건 하느님 밖에 없다. 얘기 흐름 상 하느님이 등장할 차례다. 하느님이 등장해서 욥의 질문에 대해 대답해야 하는 거다. 누구나 그렇게 예상할 터이다. 과연 그랬다. 하느님이 등장했다. 하느님은 폭풍우 가운데서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라고 누군가에게 외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얘길 듣는 사람은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없고 읽는 사람은 눈에 잔뜩 힘을 줄 수밖에 없다. 왜 착한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지, 과연 보상 없이도 하느님을 잘 믿는 게 가능한지에 대한 기나긴 논쟁에 답이 주어질 분위기이니 말이다. 이 문젠 욥과 세 친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인류의 문제가 아니던가. 그런데 장장 넉 장에 걸쳐서 이어지는 하느님의 연설에 한껏 귀를 세우고 듣고 눈을 부릅뜨고 읽어도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반복해서 들어봐도, 한 글자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꼼꼼히 읽어봐도 거기엔 욥의 물음에 대한 답이 없다. 있는 거라곤 하느님이 삼라만상을 다스리고 운행하느라 얼마나 바쁜지, 사람의 생각과 지혜, 지식이 닿지 않는 영역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세상에서 날뛰는 악인들(베헤못과 레비아단으로 표현된)을 다 쓸어버리고 싶어도 당신은 그러지 못하니 네가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보라는 등의 얘기뿐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구약성서, 그 중에서 지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욥기 38장에서 42장에 걸쳐 있는 야훼의 연설에서 의인이 고난당하는 까닭과 보상 없는 믿음의 가능성 유무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오랫동안 무진 애를 써왔고 다양한 답을 내놨지만 대개는 확신이 결여되어 있다. 그저 ‘이러저러하게 보인다.’거나 ‘이러저러하게 여겨진다.’는 등의 뜨뜻미지근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학자들도 분명 거기 답이 있긴 있을 것이고 그걸 찾아내긴 해야 할 텐데 찾아지지 않으니까 그런 식으로 답을 내놓았을 것이다.
나도 하느님의 연설에서 답을 찾으려고 애써봤다. 그 방면 전문가들의 책도 많이 찾아 읽었다. 하지만 전문가들도 못한 걸 내가 어찌 하겠나, 나 역시 헛심만 쓰고 답을 찾진 못했다. 한땐 욥기에 미쳐서 설교에서도 욥기, 성서공부에서도 욥기를 다룬 적이 있다. 논문제출 자격시험(qualifying Exam)도 욥기가 포함된 지혜문학을 선택했었다. 내 말은 ‘나도 할 만큼은 해봤다’ 뭐 이런 얘기가 되겠다. 하지만 욥기의 질문에 답을 찾진 못했다.
그러던 중 한 생각이 ‘계시처럼’(‘계시’란 얘긴 아니다) 떠올랐는데 욥기엔 본래부터 답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게 그것이다. 그것은 어차피 답이 없는 인생의 수수께끼이므로 굳이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는 뜻일지 모른다는 거다. 세상엔 수많은 착한 사람들이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하는데 어찌 일일이 답이 있을 수 있겠나! 보상 없이 하느님을 믿을 수 있냐고? 이 질문에 누가 있다거나 없다고 대답할 수 있겠나 말이다. 있다고 한들 없다고 믿는 사람을 설득해서 하느님 잘 믿으며 살게 할 수 있겠으며, 없다고 한들 하느님 잘 믿고 사는 사람을 꼬여서 타락하게 만들 수 있겠나? 이런저런 이유로 착한 사람도 이유 없이 고통을 당할 수 있다고 말한들 그게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위안이 될까? 차라리 당신 같이 착한 사람이 고통당하는 건 하느님과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해주는 게 더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욥기라는 책은 자기가 제기한 질문에 답을 주려는 책이 아니라 그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더 넓혀주고 달리 만들어주는 게 목적인 책일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이다.
3.
선악과 얘길 읽으면서 욥기를 떠올린 이유는 하나다. 둘 다 답이 없는 질문만 잔뜩 던져놓았다는 공통점 말이다. 그나마 욥기는 답처럼 보이는 것들을 제공한다. 야훼의 연설에는 답처럼 보이는(혹은 착각하게 만드는) 내용들이 들어있다. 읽고 또 읽으면 그게 답이 아님을 깨닫게 되지만 말이다. 그런데 선악과 얘기에는 그것도 없다. 거기에는 답해야 할 질문이 뭔지도 불분명하다. 흔히 그걸 ‘악의 기원’에 대한 얘기라고 말들 하는데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선악과 얘기는 악의 기원이 무엇이라고 말하나? 뱀? 뱀의 유혹에 넘어간 여자? 여자가 하자는 대로 따라 한 남자? 아니면 선악과나무를 굳이 동산 한 가운데 갖다둔 하느님? 그것도 아니면 이 모두의 합작품? 이 중 어느 것도 답이 아니거나 모두가 답이다. 게다가 그렇다 한들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뭐가 답인들 무슨 소용인가 말이다. 악이란 게 기원을 안다고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선악과 얘기는 악의 기원 문제를 포함해서 거기서 답을 얻으려 해온 문제들에 답을 주는 얘기가 아니란 생각 말이다. 그러니까 우린 그동안 선악과 얘기를 근본부터 잘못 읽어온 게 아닐까? 그 얘기가 말하려는 것과 전혀 상관없는 우리 자신의 문제에 대한 답을 거기서 찾으려 했던 게 아닐까? 곧 이 얘기에는 하느님이 선악과나무를 에덴동산에 갖다 둔 이유나 왜 하필 그걸 동산 한 가운데 둔 이유, 사람이 그걸 따먹으리란 걸 하느님이 알았는지 여부, 선악을 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왜 하느님은 사람이 그걸 아는 것을 원치 않았는지 등등의 물음에 답을 주려는 의도가 애초부터 없었던 게 아닐까? 물론 이 얘기의 저자도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이 뭔지 궁금했겠지만 얘기를 전한 목적이 그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성서는 내가 궁금해 하는 물음에 답을 줘야 하는 책이 아니다. 알고 싶은 걸 다 알 수 있게 하는 백과사전도 아니다. 그런데 우린 너무도 자주 그런 오해를 한다. 과연 이 얘기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뭘까?
(출처: Ariel Grimm (https://www.flickr.com/photos/in2thewoodz9))
이 얘기의 하느님은 ‘무조건적’이다. ‘막무가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일방통행적이다. 하느님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사람에게 주면서 왜 그래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걸 먹으면 하느님처럼 되니까 금지한 거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준 건 뱀이다. 하지만 그 설명이 맞는지 틀리는지 아담과 하와는 알 수가 없다. 그들이 아는 건 선악과를 먹으면 안 된다는 것뿐이다. 거기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설명되지 않았다. 나는 이런 점이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야훼 유일신 신앙의 핵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고대 중동지역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라는 두 개의 중심을 갖고 있었다는데 그들의 종교는 ‘거의’ 없이 다신교였다. 두 가지 예외가 있었기에 일부러 ‘거의’란 말을 썼다. 첫째 예외는 주전 14세기 아마르나시대 이집트 왕 아케나텐의 종교다. 아케나텐은 이집트에선 전무후무하게 유일신 종교를 갖고 있었다. 그게 그의 통치기간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의 왕위를 계승한 자는 선왕의 종교를 버리고 다신교로 돌아갔다. 그 뿐 아니라 선왕에 대한 모든 얘기를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그 시기를 ‘어두운 암흑의 시대’로 본 것이다. 둘째 예외는 이스라엘의 야훼 유일신 종교다. 야훼 종교도 처음부터 확고하게 유일신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 ‘발전’해갔던 것도 아니다. 야훼 종교는 처음부터 ‘다듬어지지 않은’ 유일신교였다. 다신교와는 근본부터 달랐다는 얘기다. 우리에겐 다신교보다 유일신교가 더 익숙하지만 구약성서 시대엔 사정이 달랐다. 중동 전역에서 대부분의 시기에 다신교가 지배적이었다. 유일신교는 앞의 두 경우가 전부였다.
다신교는 말 그대로 신이 여럿이 있다고 믿고 일신교는 신이 하나라고 믿는다. 그런데 둘의 차이는 신의 숫자에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크고 넓고 깊다. 다신교는 또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여러 신들이 존재하지만 자기 지역은 특정한 한 신이 다스린다고 믿는 종류이고, 다른 하나는 한 지역을 여러 신들이 각각 맡은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며 다스린다고 믿는 종류다. 예컨대 두 도시국가가 전쟁을 벌였다 치자. 그 중 승리하는 편의 신이 패한 편의 신을 수하에 거느리게 되는데 이때 패한 편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어온 신을 버리고 승리한 편의 신을 받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전자의 예라면 한 지역에서 농사를 관장하는 신이 따로 있고 다산(多産)을 주관하는 신이 따로 있으며 그 밖의 여러 기능을 관장하는 신들이 따로 있어서 사람들이 필요할 때 자기들이 바라는 일을 주관하는 신에게 가서 비는 게 후자의 예가 되겠다.
그러니까 다신교와 유일신교는 신의 숫자뿐 아니라 믿는 신의 성격도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신교는 기본적으로 믿던 신에 문제가 생기면 그 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믿는 게 가능하다. 그게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자연스럽다. 전쟁의 예에서 보듯이 자기들을 보호해준다고 믿어온 신이 다른 신에게 패하면, 다시 말해서 다른 도시국가와의 전쟁에서 패하면 아무리 오랫동안 그 신을 믿어왔더라도 주저 없이 버리고 다른 신에게로 갔다. 자기들을 보호해줘야 할 신이 전쟁에서 졌는데도 불구하고 그 신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던 거다. 여기에는 ‘의리’란 게 필요 없었고 따라서 그게 있을 자리도 없었다. 한편 다양한 신들이 다양한 역할과 기능을 담당한다고 믿는 다신교에서는 특정한 한 신에게 배타적으로 충성을 바칠 이유가 없었다.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충성심을 배분하면 됐다는 얘기다. 농사를 지을 때는 농경의 신에게 제사를 바치면 됐고 자식을 낳고 싶으면 다산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면 됐다. 여행을 할 때는 여행을 관장하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길을 떠나면 그뿐이었다. 그 어떤 신도 배타적인 충성을 요구하지 않았고 사람 편에서도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유일신교는 그렇지 않았다. 유일신은 다신교의 신들과 달리 믿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원했다. 전적인 충성과 배타적인 사랑을 원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충성을 바쳐야 할 다른 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유일신의 성격에 기인한 바가 컸다. 유일신교의 신은 다른 신들과 다툴 이유가 없었다. ‘졸개 신들’(lesser gods)들이나 천사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의 파워는 유일신이 갖고 있던 파워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유일신교의 신은 다신교에서 여러 신들이 하는 역할과 기능을 혼자 다 맡고 있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러니 전적인 충성과 배타적인 사랑을 바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유일신은 자기를 믿는 사람들에게 ‘전적인 신뢰’를 요구한다. 그게 유일신 종교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속된 말로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자기만 믿으라는 거다. 믿음직하지 않아 보여도 무작정 믿어야 했다. 믿어야 하는 이유도 주지 않고 믿을만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무작정 믿으란 거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신뢰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왜? 자기는 유일신이니까! 신이라고 할 만한 존재는 자기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졸개 신이거나 가짜 신이니까! 게다가 자기는 사람이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높고 깊으니까! 다신교에는 하느님의 신비라거나 알 수 없는 신이라거나 숨은 신, 또는 붙잡을 수 없는 애매한 현존(Elusive Presence - 사무엘 테리엔의 구약신학서 제목) 같은 개념이 있을 수 없다. 그건 오로지 유일신교에만 있는 개념들이고 거기서만 의미 있는 개념들이다.
선악과 얘기의 하느님은 유일신교의 신이다. 그가 아담, 하와가 선악과 따 먹은 걸 몰랐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저녁에 동산을 어슬렁거리며 걷는 등 순진한 사람처럼 그려져 있지만 선악과 얘기의 하느님은 첫 사람들에게 배타적인 충성과 전적인 신뢰를 요구한 절대적 유일신이다. 그것은 첫 사람이 이런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욥기 얘기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창조세계 질서를 말하면서 착한 사람이 고난을 당해도 무조건 하느님을 신뢰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유일신을 믿고 신뢰하는 것은 보상의 유무와는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선악과 얘기는 그걸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무조건 지켰어야 했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에는 선악과 얘기를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선악을 아는 지식을 맞바꾼 얘기로 이해했었다.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무조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전적인 신뢰의 요구를 선악과를 먹고 얻을 지식에 대한 욕구와 맞바꾼 얘기라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는 사람에게 유일신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요구했지만 그걸 저버린 얘기로 읽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혹시나 해서 한 마디만 덧붙인다. 선악과 얘기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배타적 신뢰에 관한 얘기라고 해서 그걸 ‘반계몽주의’를 권장하는 얘기로 읽는 건 옳지 않다. 한국교회는 신앙을 지성적으로 이해하고 납득하려는 태도를 환영하지 않는다. 목사들도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지 않은 목사들도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반계몽적임에 분명하다.
선악과 얘기는 지성을 포기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라는 얘기다. 우리는 신앙에 대해 최대한 따져 물어야 한다. 그렇게 해도 다 알 수 없는 게 신앙 아니던가. 유홍준 선생은 문화유적은 아는 만큼 보인다 했는데 묻는 만큼 알게 되는 게 신앙이다. 그렇게 묻고 또 물어도 하느님이라는 신비의 바다 밑바닥에 닿기는커녕 얕은 물가에서 물장구치는 정도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 글 제목이 ‘선악과, 하느님의 갑질?’인데 여긴 물음표가 있음을 잊지 말라 주시라. ‘갑질’이란 말은 요즘 유행하는 별로 고상하지 않은 용어지만 글의 내용에 어울린다고 여겨서 썼다. ‘갑질’은 쌍방 간의 계약서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갑’이란 말에 ‘행동’을 지칭하는 저속한 표현인 ‘질’을 붙여서 만들어진 말이다. 이는 우월한 위치에 있는 편이 열등한 위치에 있는 쪽을 함부로 대할 때 쓰는 말이다.
하느님이 갑질을 한다고? 그렇다. 선악과 얘기에서 하느님은 갑질을 했다.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갑질’ 하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게 얼마나 추악하고 비열한지는 당하는 ‘을’이 가장 잘 알게 마련이다. 이 얘기에서 을의 위치에 있는 아담, 하와, 뱀은 꼼짝없이 갑인 하느님의 처벌을 감수해야 했다. 물론 하나님이 한 행위가 추악하고 비열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수퍼갑인 유일신으로서 절대 권력을 행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아닌가. 이번에 땅콩회항사건을 일으킨 대한항공에서는 사주의 말이 곧 메뉴얼이었다고 한다. 하느님과 대한항공 사주를 비교하는 건 좀 거시기하지만 유일신 종교의 신은 바로 대한항공의 사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하고 계획을 세우고 행동을 하는지 그 누구에게 설명할 필요도, 동의를 얻을 필요도 없는 존재, 바로 이런 존재가 유일신교의 신이니 말이다.
유일신교의 신은 갑질 하는 존재다. 반면 다신교의 신들은 갑질을 못한다. 그들에게는 그만한 권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유일신교 신자는 찍소리 못하고 신이 하는 대로 복종해야 하나?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도살장에 끌려나는 소처럼 따라가야 하나? 유일신교의 신은 매사에 원칙도 계획도 없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나? 그렇지는 않다. 유일신교 신자도 신이 어떤 원칙에 따라서, 어떤 계획을 갖고 행동하는지 탐구하고 또 탐구해야 한다. 이유와 목적을 신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하지만 신에게는 그걸 사람들과 나눌 의무는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의 ‘계시’는 ‘은총의 사건’이 아닌가. 출애굽기 19장 33절의 표현을 빌면 야훼는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부어주고 싶은 사람에게 긍휼을 부어주는 ‘수퍼갑’이니 말이다.
이게 무슨 신이냐고? 이런 독재자 같은 신을 왜 믿어야 하냐고? 믿기 싫으면 안 믿으면 된다. 다만 구약성서의 야훼 하느님은 기본적으로 이런 분이란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믿는 신은 구약성서가 보여주는 수퍼갑 유일신 야훼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믿는 신은 유일신교의 신과 다신교의 신들 중간 어디쯤에 있는 ‘어정쩡한’ 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 우리가 믿는 신은 성서의 하느님이 아니라고? 반드시 그렇다고만 할 수 없는 이유는, 구약성서의 수퍼갑 유일신이 굳이 하지 않았어도 될 행동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속박해버렸기 때문이다. 바로 이게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언약’(covenant)이 아닌가. 구약과 신약성서를 가리키는 영어 ‘old testament’와 ‘new testament’에서 ‘testament’란 말이 바로 이 ‘언약’에서 나온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을 거다.
곽건용/나성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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