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의 목소리가 그리운 것은…
늦봄 문익환, 그 이름 석 자는 이 나라 신학과 운동과 역사에 박힌 빛나는 보석이다. 퇴색하지 않는 아름다움이요, 늘 푸른 힘을 주는 생기이다. 책상물림으로 앉아 있던 구약성서학자가 들판에 나와 광야의 소리로 변신하자 역사는 꿈틀거렸고, 함께 춤을 추었다. 그리고 고난의 시대를 기운차게 뚫어내었다.
이 나라 신학과 운동과 역사에 박힌 빛나는 보석
그 문익환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어언 20여 년이 지났다. 산천은 변했으나 그 맑은 미소와 청아한 꿈은 아직도 여전히 우리에게 뜨거움으로 있다. 목사이면서 목사로만 머물지 않았으며, 시인이면서 시인으로 그치지 않았고 학자이면서 학자로 멈추지 않았다.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야욕이 없었고, 존경의 상석 위에서 교만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내면에 쏟아져 내린 하나님의 영과 시대의 소리에 맞추어 자신을 던졌고, 그로써 역사로 존재하게 되었다. 모두가 지쳐 스러질 때에 우뚝 선 우리의 마음이 되었고, 막히지 않은 길이 되었으며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떠난 20년의 세월이 먼 듯 하지 않으며, 그는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 같기만 하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존재의 모습은 모두 그러한가 보다.
‘재야인사(在野人士)’라는 말이 주었던 무게가 시대를 울렸던 때가 있었다. 백발 휘날리며 포효하듯 민중의 마음을 흔들었던 그의 모습 한 자락이라도 보이면 권력이 긴장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가 노년의 몸을 청년처럼 움직이면 모두가 어느새 일제히 일어나 오만과 독선, 그리고 독재의 성채를 향해 진군했던 역사가 있다.
손에 수갑을 차고 옥에 들어서도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옥 밖에 있는 이들을 도리어 위로하던 그의 넉넉한 웃음이 우리 모두를 기쁘게 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가 두 팔을 벌리고 소리를 토해내면 그것이 곧 역사의 육성이 되고, 그가 훌쩍 발걸음을 옮기면 그것이 곧 역사의 한 걸음이 되었던 충격이 있었다. 그리하여 문익환은 시대의 선봉이었으며, 우리 모두의 횃불이었고 내면의 감격이었다.
1989년, 김일성 주석과의 전격적인 만남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으나 그 놀라움은 사실 그의 순수한 꿈의 연장이었다는 것, 그래서 김일성 주석과의 뜨거운 포옹이 그 어떤 외교적 제스처가 아니라 그의 몸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사랑과 삶의 모습이었다는 것, 그것을 이해하기까지 그에게 가해진 고통은 그에게 역설적으로 힘이 되었고, 달려갈 길을 줄기차게 달려가는 자로 만드는 동력이었다.
어찌 그 만남 하나로 통일이 되고 남북이 통하며 세상 천지가 바뀌겠는가 만은, 누군가 앞장서서 길을 내지 않으면 결국 길은 언제고 영영 생기지 않는 법. 문익환은 없는 길을 만들어 뚫었고, 그 뒤로 무수한 사람들이 줄을 이어 그 길을 밟았으니 역시 선각자는 달리 있던 것이었다.
소년 문익환을 길러낸 자양분
1918년, 만주 북간도 명동에서 문재린, 김신묵의 첫아들로 태어난 문익환은 민족에 대한 사랑과 새로운 시대의 문명에 대한 깊은 일깨움이 있었던 그곳 이주 조선인촌에서 이미 장래의 문익환으로 자라난다. 북간도 명동은 일제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면서 그곳으로 떠난 일군의 선비들이 모여 만든 동네.
그곳에서 교육과 기독교의 열정은 소년 문익환을 길러내는 자양분이었다. 목사인 아버지 문재린의 모습을 통해서 그는 평생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목사임을 자각하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자신에 대하여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성서를 통해서 만나게 된 믿음의 사람들은 소년 문익환에게 꿈을 불어넣었고, 그로써 그는 성서의 세계에 일찍 탐닉하게 된다. 무척이나 성숙한 소년이었다.
민족혼이 강렬했던 명동의 분위기에서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과 신앙의 세계가 하나가 되는 가장 기초적인 훈련을 그때 하게 된다.
그런 명동인지라 이후 이곳에서는 민중 신학 교육자로서만이 아니라 민중을 위한 정치에 나섰던 그의 아우 문동환, 이후 민중신학의 태두가 되는 안병무 등이 배출된다. 명동은 아이들에게 민족의 존엄을 배우게 한 현장이었고, 기독교 신앙이 역사와 하나로 어울려야 함을 일깨운 자리였던 것이다.
물론 그가 처음 접한 기독교는 그가 이후 구약성서의 예언자적 전통에 서서 외쳤던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로 치면 보수적 신앙의 원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신앙의 틀에서 그의 뼈대는 굵었고, 웬만하면 물러서지 않는 강단이 생겨났다. 이것은 그가 오랜 세월 동안 한눈팔지 않고 히브리 성서를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할 수 있게 한 힘이었고, 결국 그런 예언자적 삶으로 살아가게 한 근력이 되었다.
일본 동경의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그곳에서 신학수업을 했고, 만주 북간도에서와는 다른 자유로운 사상적 흐름 속에 있게 되었다. 일본 동경시대의 그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보수적 신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그로써 한 단계 발전한 신학적 이론의 토대 위에 설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학병 소집을 거부, 만주 봉천 신학교로 이적하여 만보산 한인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게 된다. 아직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그러나 공부에 관심이 깊은 젊은 청년 신앙인이었다.
해방 직전인 1944년, 그는 평생의 가약을 맺은 박용길과의 삶이 시작되고, 해방 후 한국신학교의 전신인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학구열은 중단되지 않아 목사 안수를 받고 난 이년 뒤인 1949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50년대의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프린스턴에서 수업하던 그는 6.25 전쟁이 터지자 귀국, 그가 배운 영어실력 탓으로 꼬박 3년을 판문점과 동경의 유엔 사령부에서 근무한다.
남북 대결과 전쟁, 그리고 분단의 현장에서 보았던 역사는 그가 이후 통일의 길을 향해 가게 되는데 중요한 밑거름의 경험이 된다. 3년간 계속된 전쟁이 휴전으로 미완성된 종결을 하자, 그는 마치지 못한 학업에 대한 열망을 주체치 못하고 다시 유학길에 올라 프린스턴에서 석사 학위를 끝낸다.
한국 기독교계에서 당시 “프린스턴 신학대”라는 이름이 차지했던 영광을 떠올려본다면 청년 문익환이 전란에 휩싸였던 조국에 돌아와 신학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 처지가 어떤 것이었을까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신대와 연대에서 구약학을 강의하는 한편, 한빛교회의 목회자로서 어찌 보면 얌전한 길을 걸었던 그에게 1965년에서 1966년의 유니온 신학대 유학은 의미 있는 충격으로 남는다. 민권운동이 한참이었던 그 시기에 유니온 신학대학은 흑인 해방신학의 산실이었으며,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요람이기도 했다.
구약의 예언자적 전통의 흐름과 이 해방신학의 만남은 그에게 역사의 지평을 열어주었고, 이후 실천의 능력을 갖도록 하는데 있어서 매우 소중한 체험이 되었다.
밀실에서 시대의 광장으로
이후 그는 십년간 신구교 공동 구약 번역 책임 위원으로 살면서 히브리어와, 그 언어의 세계를 통해서 성장했던 예언자들의 삶 속에 그대로 푹 파묻힌다. 시대의 중심에 살면서 소용돌이치듯 세월을 보냈던 윤동주, 장준하의 꿈속에서의 부름도 마다한 채, 그는 히브리 성서의 번역에 미친 듯 몰두했던 것이다.
그가 윤동주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열등감을 이후 고백하지만, 그의 구약 성서 번역 작업은 그러한 열등감의 극복을 넘어 그에게 새로운 시의 세계를 열어주게 된다. 아무튼, 그는 1976년에 이르기까지 일찍 일본과 미국에 유학을 하고 온 탁월한 성서학자였고, 히브리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예술적 재능을 가진 한 목회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는 그의 이러한 신학적 헌신의 세계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다. 예언의 언어를 번역하고 있기만 해서는 말씀이 육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우시기나 하시려는 듯, 역사는 문익환을 성서번역의 외로운 밀실에서 시대의 광장으로 전격 불러낸다. 진정 부름을 받은 것이었다.
이른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이라고 불린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연루된 그는 처음으로 영어(囹圄)의 몸이 된다. 애초에 이 사건은 그가 연루되지 않게 기획되어 있었다. 필력이 좋은 그가 구국선언문을 기초한 사실은 아무도 불지 않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구약성서의 번역작업이 거의 다 마쳐가고 있다는 중대과제가 있기에, 이 일과 관련되었던 이들은 모두 그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우 문동환은 고문의 고통 속에서도 문익환 이름 석 자가 나오지 않도록 인내했던 동지들의 아픔이 더 이상 계속될 수는 없다고 판단, 형의 이름을 내놓는다.
다른 누가 그리했으면 동지들에 대한 배신이 되었겠지만, 아우가 동지들의 고통을 덜고자 형을 역사의 현장에 끌어들였으니 이를 어찌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이 시기에 이르기까지만 해도 재야 민주화 투쟁의 지도급 인사는 오히려 그의 아우 문동환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졸지에 엮이게 된 문익환은 그간 히브리 성서 번역의 과정과, 해석의 훈련 속에서 다져온 믿음의 내공을 이른바 초식으로 펼쳐보이게 된다.
1977년 전주교도소에서의 24일간 옥중 단식은 약골로만 여겼던 문익환 목사에 대한 당국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재야 민주화 운동을 그를 중심으로 하는 판으로 집결시켜 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가 재야인사로서 뒤늦게 입문하여 스스로를 늦봄이라고 불렀고, 그 사로잡힘의 자리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알렸으니 그야말로 사도 바울의 모습대로 산 셈이다.
옥에 가둘 수 없는 영혼
1977년, 기독교계에서 존경받는 그를 더 이상 구속 수감할 수 없어, 박 정권은 그를 형 집행 정지로 석방시켰으나 이내 그는 유신 헌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 형 집행 정치 취소로 재수감 된다. 이렇게 해서 그의 감옥 생활의 긴 세월이 시작된다.
첫 투옥이 22개월, 형 집행 정지 취소로 재수감 되어 박정희 암살사건으로 유신체제 붕괴에 이르기까지 옥살이는 한 것이 15개월, 1980년 5월 광주 연루혐의로 이른바 “내란 예비음모죄”로 세 번째 투옥되어 31개월 만에 출옥하게 된다.
1985년에는 5.3 인천항쟁사건으로 네 번째 투옥되어 형 집행 정지로 26개월 만에 나오고 1989년 평양을 다녀왔다는 죄목으로 국가보안법에 걸려 다섯 번째 투옥, 형 집행 정지로 19개월 만에 출옥한다.
1991년, 이른바 분신정국에서의 활동 혐의로 형 집행 정지로 여섯 번째 투옥되어 21개월 만에 옥에서 나오게 된다. 이렇게 1976년에서 1993년까지, 17년 세월 동안 그가 옥에서 보낸 세월은 도합 134개월, 그러니까 11년이 넘는 시간을 감옥 생활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오랜 세월의 투옥 생활도 그의 총기와 열정을 잠재우지 못했다. 아니, 도리어 그는 투옥의 고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욱 강한 존재가 되어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도무지 옥에 가둘 수 없는 영혼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펄펄 넘치는 “자유청년”이었다.
그러기에 그에게서는 어두운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힘겨운 영어(囹圄)의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어디에 갖다놓아도 불길이었고, 역사의 산 현장이 되었으며 곳곳에서 시대를 일깨우는 소리요, 무딘 마음을 깨는 타고난 교사였다.
그래서 그가 수감되면 그 자체로서 역사는 격동했다. 문익환을 감옥에 집어넣는 시대가 그냥 온전하게 자기보신을 하고 지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가 온 몸으로 부딪혀 깨려는 어둠의 장벽은 그렇게 하나하나 무너져내려갔다.
그를 가두는 횟수가 늘어나면 날수록 민중은 그로써 깨어났으며, 현실의 모순을 명확하게 보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몸으로 이 시대의 눈을 뜨게 했다. 눈 먼 시대를 자신의 생명을 걸고 개안(開眼)시키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문익환의 명망(名望)은 민주주의와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귀중한 자산이 되어갔다. 그의 명성은 개인적 출세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시대의 고난을 뚫고 가려는 이들에게 자랑이요 용기가 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마치 열정의 암호처럼 사람들의 영혼에 와 박혔던 것이다.
문익환이 하는 일이라면, 문익환이 하는 말이라면, 문익환이 가는 곳이라면 문익환이 목숨을 거는 일이라면, 그것은 곧 이 시대가 반드시 해야 하고 귀 기울여야 하며 함께 가야하고 그로써 생명을 거는 사건이 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혼신을 다한 뜨거움과 그 어떤 위협과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소신대로 사는 모습은 이 시대의 예언자가 과연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모두에게 성찰할 수 있는 재료를 주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의 삶을 껴안고 평생을 살아왔던 그가 어느새 그 자신의 형상을 예언자의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늦봄 문익환 기념사업 이사장 이재정 신부는 문익환의 발걸음을 “가나안땅을 향하여 모진 고난을 무릎 쓰고 걸었던 모세의 길이었으며, 마른 뼈로 뒹굴며 죽어 있던 동족을 살려내기 위하여 골짜기를 헤매던 에스겔의 길이었고, 정의를 위하여 권력에 맞서 몸을 던졌던 예레미야의 길이었으며, 살라진 민족을 다시 하나로 만들어 남북을 통일하려고 설파하던 아모스와 호세아의 길이었다”고 회고한다.
민중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입 한번 열지 않으며 거동조차 하지 않은 무수한 기독교계 지도자들과는 달리, 그는 하나님이 외치라는 소리만 있으면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토해냈던 것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미 그 안에 십자가의 죽음과 삶을 품고 있는 그를 물러서게 할 수 없었으며 죽기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는데 무엇으로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많은 회유와 협박에도 그가 끝까지 자신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러한 예언자 정신의 삶과 믿음 때문이었다.
자신은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서 그 말씀을 대언할 뿐이라는데, 실로 무얼 가지고 그를 꺾을 수 있었겠는가?
미래의 역사를 감격으로 전망
그렇게 살았던 그에게 1992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그건 그에게 감사였다. 노벨 평화상을 받고 안 받고 가 문제가 아니라, 이 땅의 현실이 인류사회로부터 주목받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역사의 한계를 밀어나가는 것이 인류에게 평화의 꿈을 나누게 하는 일이 된다는 것.
그것이 그에게 감사의 이유였다. 1989년 그가 북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만났던 일도 다 이렇게 고난의 민족에게 살 길을 열겠다는 심정 하나로 이루어낸 일이었으며, 그로 인해 고초를 겪었어도 그것이 그에게 아무 상처와 좌절의 원인이 되지 않았다.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것 자체로서 그는 기뻤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신다는 믿음이 더욱 깊어갔던 것이다.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나 마지막 투옥 생활을 마치고 난 1993년, 그는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운동을 제창하였다. 그에게 통일은 이미 온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이미 맛보는 복”과도 같은 개념이었다.
기도하면 이미 주어진 것이니, 그와 마찬가지로 통일도 아직 오지 않았으나 이미 온 것으로 받아, 통일된 조국의 삶을 살아내는 연습과 훈련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언제나 앞서 있었다.
사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우리의 현대 민족사의 반성과 깊은 관계를 가진다. 1945년 해방은 왔으나, 그 해방을 맞이하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기에 우리는 혼란과 위기, 그리고 마침내 분단의 세월을 맞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어느 때인가 통일의 역사가 열리면, 그것이 우리에게 혼란과 위기로 치닫는 일이 되지 않도록, 그래서 통일된 나라의 백성답게 성숙하고 힘 있게 현실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건너지 않은 요단강 저편의 가나안을 미리 보고 산 위에서 이미 기뻐한 모세처럼 그렇게 미래의 역사를 감격으로 전망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생의 사업으로 바로 이 일을 해야겠다고 팔을 걷어 부친다. 통일을 부르짖지만, 각기 방식과 노선이 달라 분열되어 있던 통일운동을 하나로 묶어내고, 그로써 “새로운 통일 운동체”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정세(政勢)에 대한 인식도 서로 다르고, 운동방식에 대한 생각도 차이가 나며 인적 구성이나 조직의 내력도 틀린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어 가면서 통일 운동의 핵을 키워나간다는 일이 어찌 쉬운 것이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에스겔의 계시에서처럼 두개로 나뉘었던 막대기가 하나로 이어지는 그 통일의 꿈을 결코 포기할 수 없어 주변의 오해나 때로의 중상모략, 그리고 비난에도 마다하지 않고 한 길로 뚜벅 뚜벅 나간다.
그의 가슴에는 이미 가야 할 땅이 보였고, 그 땅을 가기 위한 대열만 정비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일의 열매는 그의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후대가 맛볼 열매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이 그에게 상관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진심을 이 시대가 이해하고 그로써 통일의 기운이 대세가 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새로운 통일 운동체”를 꾸리는 것은 흩어졌던 통일운동의 기운을 견고한 하나의 힘으로 만드는 일이었고, 통일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준비였던 것이었다.
그는 이 일에 밤낮으로 매달렸다. 주변에서는 그의 건강을 걱정했고, 때로 그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모략과 중상을 걱정했다.
문익환의 목소리가 그리운 것은…
그러던 중, 1994년 1월 그는 갑자기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고통을 한 바탕 겪더니, 잠을 자고 있던 중 심장마비로 인해 그가 그렇게 사랑하고 뜨겁게 열정을 쏟았던 이 세상을 홀연히 떠난다. 모두에게 놀라운 충격이었고, 한 시대의 통곡이 그의 죽음을 향해 쏟아 부어졌다.
님이 가신 것이었다. 어두운 역사의 밤을 지새우며 예수의 길을 따라, 좁은 길만 찾아다니고 그로써 형극(荊棘)의 삶을 마다하지 않던 그가 졸지에 우리 곁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어디 떠난다고 떠나지는가? 문익환은 그저 떠나고 만 것이 아니라, 이 분단의 시대에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를 두고두고 가슴에 새기도록 하였다.
고난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이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어떤 능력을 주시는가를 보도록 하였다. 민족의 현실과 만난 신앙이 어떤 불꽃을 피워내는가를 목격하게 하였다. 그로써 참된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일깨웠던 것이다.
한반도의 정세가 새로운 고비를 맞이하고 있는 이 때에 , 문익환의 목소리가 그리운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그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것 또한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일신의 영달이나 개인적 야망, 또는 출세의 자랑을 모두 접고 한 시대의 절절한 요구 앞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자신을 던질 줄 아는 “아름다운 이”가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다. 그의 삶이 이 땅에 뿌린 그 무수한 씨앗이 보이지 않게 여기저기서 싹을 틔우며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 그래서 민중의 거대한 함성이 그날 그때에 울리면 “역사의 여리고성”은 무너지고 만다는 것. 그것을 우리는 믿는다.
문익환, 그는 바로 그렇게 그 날을 준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전령(傳令)이자, 그리스도의 날을 예비하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것이다. 그가 흔든 깃발, 우리도 뒤따라 흔들어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고자 하니, 한 시대의 스승으로 그를 가진 우리는 정녕 복 받은 존재들이 아닌가?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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