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와 함께 한 ‘떠돌이 신학자’의 생애

 

문동환(87세)은 1921년 만주 북간도 명동 출생이다. 서로 인접해있던 명동이나 용정 모두 구한말, 일단의 유학자들이 새로운 교육현장을 일구어나가겠다는 대단히 이례적인 개혁적 열정을 가지고 떠나 정착했던 곳이었다. 고종은 이 지역의 선비들에게 교육재정까지 지원해줄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나라 안은 어지럽고 힘들었으니, 밖에서라도 새로운 동량을 길러내라는 조선조 마지막에 해당하는 왕의 애처로운 심사였다.

 

1921년이라면 이미 일제의 제국주의 지배가 극에 달해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조선반도에서 벌어졌던 시기였다. 나라가 망하고 만주지역에 떠도는 이들이 넘치기 시작하고 장래를 제대로 도모하기 막막했던 세월이었다. 그러나 문동환이 태어나 자란 북간도 명동이나 용정은 좀 달랐다. 정세도 그랬고, 그가 자라나던 명동과 용정의 기운은 민족주의적 기상이 드높았기 때문에 그곳은 걸출한 인물들을 꽤나 많이 키워냈다. 온 마을이 교육, 교육 하고 있었으니 이곳에 정착했던 이들의 2세들이 그저 아무렇게나 자라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시인 윤동주는 단연 용정의 아름다운 별이었고, 문익환, 안병무 등 이후 한국의 민중신학에 토대를 닦은 인물들이 줄을 이었다. 문동환 역시 이러한 기운을 타고 태어났는지, 일찍이 교사가 되어 민족교육의 혁신적 변화에 기여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목사가 될 것인가, 교사가 될 것인가 했던 그는 결국 두 가지 모두를 하게 되는데, 이러한 소년시절의 꿈과 이상은 그의 평생을 걸쳐 일관되게 이어져나갔다. 그래서 문동환은 훗날, 교사가 되고 목사가 되었으며 대학 강단에서 가르치게 된다. 꿈을 잃지 않은 청년은 어지러운 현실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감수성이 뛰어난 자애로운 형님 문익환과 함께 민족 사랑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형님은 아주 어진 분이셨어. 어학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 구약을 공부하면서 성경을 번역했는데, 번역이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에 장준하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해. 그 때 긴급조치 9호가 떨어지고 형님 마음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터져 나와 악을 보고 견딜 수가 없었던 거지. 그러면서 서슬퍼런 독재권력에 맞서기 시작했지. 어려서부터 형님과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은 헛된 삶이라는 것을 배우면서 자랐어. 형님은 그 가르침을 죽을 때까지 온몸으로 실천하면서 사셨지.”

 

한편, 문동환이 자라나던 시절 용정학교 학생들은 “일본(日本)말”을 “왈본(曰本)말”이라고 해서, 일(日)자를 발로 밟아 넓적하게 한 왈(曰)자로 부르면서 놀리기도 했다는데, 그만큼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과, 이를 위한 교육의 가치를 몸에 익히면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안에서는 일본의 등살과 위세에 눌려 자칫 주눅이 들기 쉬운 형편에 있었다면, 이들 북간도의 청년들은 드셌다. 좀체 기가 죽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 문재린과 어머니 김신묵 역시 문동환에게 일생을 통해 영향을 끼치는 일상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뿌리 뽑힌 채 떠돌이처럼 살아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민족목회의 현장에서, 고난 받는 조선백성들에게 펼쳐진 복음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학자들이 주축이 되었던 곳이었지만 명동이나 용정은, 근대교육에 열을 올렸고 좋은 선생님이라고 소문이 나면 어떻게든 모셔오는 열성을 보였다. 아버지 문재린도 이러한 환경에서 민족교육과 목회를 했으니 이곳의 신학적 관점이라는 것이 구태의연하기란 어려웠다.

 

“나의 아버지는 고지식할 정도로 순수하고 지극히 겸손하신 분이었어. 민족애와 독립정신으로 불타 있는 명동이라는 민족공동체에 살면서 그의 마음은 민족애로 불타고 있었지.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북경에 유학 보내면서 정치를 공부하라고 권했지만 자기는 정치를 할 자질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셨어. 고지식하고 정직하기만 한 그가 어떻게 정치를 할 수 있었겠어? 그래서 생각한 끝에 민족의 건강에 이바지하려고 청도에 있는 독일 계통의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을 했었거든. 그러나 일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학교가 문을 닫자 아버지는 목사가 되는 길을 택하셨지. 이렇게 성실하게 일하신 아버지를 하나님은 여러 모양으로 귀하게 써주셨어. 아버지가 당시 김약연 목사를 위시한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은 이유는 그분의 순수함 때문이야.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머리가 그지없이 총명하셨지. 새로 창립된 YWCA 회장이 되어 동네 부녀자들을 위한 야학을 세우시고 밤마다 부녀자 교육에 전념하셨지. 그 동안 남편은 유학을 가고 시아버지는 일찍 사별하셔서 가정의 모든 책임을 지게 되셨지. 과부가 된 두 시어머니, 시할머니를 모시고 자녀를 기르면서도 야학에서 가르치셨거든. 그리고 여자 결사대에도 참여해서 민족운동에 기여하셨지.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경학원에 가서 배우는 일에 등한시하지 않으셨지. 해방 후 남한에 와서도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일에 심혈을 기울이셨고 두 아들이 감옥에 간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셨지. 우리 아버님이 세상 떠나시면서 마지막 하신 말씀이 ‘원산은 지났다. 아직 평양은 멀었지.’였어. 그런데 우리 어머님이 돌아가시면서 마지막 한 말씀은 ‘통일은 다됐다.’였어. 어머니는 감옥에 가 있는 나와 형님의 몫까지 감당하신 분이야. 참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지.”

 

그런 점에서 보자면 문동환은 훗날 자신이 전개해나간 민중교육신학이나 이민자들의 삶에서 압축해낸 떠돌이 신학의 모태를 여기서 이미 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용정 초등학교와 은진중학교를 나온 뒤,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된 것은 오로지 민족 교육의 내일을 어떻게 일구어날 것인가를 위해 선택했던 길이며 그로서 교사의 삶은 그에게 천직이 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왔던 그는 용정의 만보산 초등학교나 명신여자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지만, 해방이 된 이후 그는 다시 신학의 길에 몸을 묻게 된다. 김재준 목사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조선신학교(한국 신학대의 전신)에서 그는 신학수업을 받았으나 결국 민중의 바다로 내려가지 않으면 진정한 구원은 없다고 확신하게 된다. 전쟁 중에 미국으로 유학 갔던 그는 프린스턴에서 신학석사를 마치고 이후 하트포트 신학대에서 종교 교육박사를 마친 뒤 한신대 초빙으로 귀국하게 된다.

 

문동환의 귀국은 한국 신학에 중요한 자극이 되었다. 그는 신학교의 권위주의적 삶을 타파하면서 철저하게 민주주의적 환경을 만들어나가는 노력을 했고, 이후 1969년에서 1970년 사이에 미국 진보신학의 요람인 유니온 신학대에서 잠시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흑인신학, 남미 해방신학을 접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억눌리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하나님에 새롭게 눈을 뜨면서 민중신학의 교육적 차원을 열어나간다.

 

민족교육의 세례를 받았던 문동환이 제1기의 문동환이었다면, 일본과 미국 유학 이후의 문동환은 첨단신학의 문동환이었다. 그러다가 제3기 문동환은 억압과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나게 된 오늘까지의 문동환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앞의 시기에 형성된 문동환이 있었기에 그 이후의 문동환이 가능했겠지만, 보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당시 한국사회의 억압적 현실과 신학이 어떻게 만나야 할 것인지를 그는 매우 명백하게 깨우쳤던 것이다.

 

 

 

                                   사진/김승범

 

문동환이 나이 40이 되어 돌아간 고국은 정치적으로 매우 위급한 시기에 처해 있었다.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는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있었고 민중의 한은 급기야 전태일의 분신에서 목격하게 되듯이 극에 달했다. 신학은 더 이상 관념과 추상의 세계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신학은 현장에 달려가야 했고, 행동해야 했으며 이러한 신학의 주체들은 민중과 함께 고난 받아야 했다. 키 크고 잘 생긴 미남 교수 문동환은 이러한 역사의 와중에서 이 땅의 문동환으로 성장해나갔다.

 

문동환은 학교에서 내어 쫓기고 거리로 몰렸으나 그의 신학은 더더욱 깊어져 갔다. 고난의 현장이 관념적 성찰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문동환은 인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 자신에 대한 의식에 도달하게 되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에게 어떤 일깨움을 주시는지 각성해가게 된다. 교육과 신학이 일치했고, 신학과 역사가 일치했으며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현장이 곧 신학의 출생지가 되었던 것이다.

 

책상에 앉아 서적에 둘러싸인 신학자가 아니라, 현장의 요구에 절실하게 대답하는 그런 실천신학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문동환의 성숙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그의 형 문익환, 그의 벗 안병무와 함께 민중신학이 이 나라 역사 속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변화의 힘을 뿜어낼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민중들은 끊임없이 자본과 권력의 술수에 걸려들어 세뇌당하고, 본래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바를 망각한 채 이를 위해 노력하는 자신의 벗들을 도리어 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모순된 현실과 문동환은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옥에 갇히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된다. 고난의 밑바닥에 처해 있는 민중의 실체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은 이러한 밑바닥의 삶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알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감옥은 그에게 또 하나의 교육 현장이었고, 선교신학의 모태가 되었다. 옥중서신으로 성장해간 바울의 모습이 문동환에게서도 어리는 그런 지점이었다.

 

이렇게 문동환의 발자취를 읽어나가노라면, 우리는 그가 자신의 만주 명동과 용정시절을 결코 잊지 않고 있으며 서구신학에 지배당한 한국 신학과 교회가 자신의 역사적 현실, 자신의 언어로 자기를 말할 수 있는 신학의 태동에 열정적인 기대를 걸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단지 신학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달리 말해서, 제도 기독교의 틀에 담아낼 수 없는 역사의 숨결을 말하고 노래하며 주장했다. 그래서 그의 기독교 이해는 기존의 기독교 이해와 충돌한다. 인간의 생명과 자유, 해방에 기여하지 않는 기독교는 본래의 예수 운동과 다르다는 줄기찬 주장으로 문동환은 기성 교회로부터 배척받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배척이 문동환을 위축시키지 못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의 물신적 지배와, 시장의 힘과 결합한 교회에 대해 싸움의 기세를 낮추지 않았다. 이에 대해 부단히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교회는 교인들에게 다만 당장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진통제의 역할밖에 하지 못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즈음 세계화라는 것이 크게 화두에 오르고 있는데, 한 때는 이 세계화가 인류를 빈곤에서 구한다고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댔거든. 제1세계의 대 자본가들이 제3세계에 자본을 대주어 산업화를 도와주면 제3세계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속삭였어. 말하자면 다국적 기업이 제3세계에 자본을 나누어주고 산업화하는 기술을 제공해서 도와주면 온 세계가 부유하게 된다는 것이지. 그 결과 제3세계에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고 공장들이 돌아가 무엇인가 이룩하는 것처럼 보였어. 그러나 지나고 보니 이것은 다 속임수였음이 드러난 거지. WTO 나 IMF을 통해서 모든 법을 다 다국적 기업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서 이윤을 흡수해가거든. 뿐만 아니라 기업을 위한 그 나라의 법과 조건들이 자기들에게 불리할 때는 언제나 자금을 다른 곳을 빼 돌려 그 나라의 경제에 일대 혼란을 일으켜. 결국 날이 갈수록 제1세계와 3 세계 사이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서나 빈부 격차가 늘어나게 돼. 그들에게 있어서 주는 것이 주는 것이 아니고 섬기는 것이 섬기는 것이 아니야. 모두 자기 배를 채우는 일이지.”

 

그는 자본의 물신적 지배를 유지하게 하는 자본주의체제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질서에 반하는 것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의 지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자기가 살고 있는 땅에서 내어 쫓아 떠돌이 유랑자로 만들고 있는가를 고발한다. 그렇게 해서 도달하게 된 그의 신학이 “떠돌이 신학”이다.

 

“미국에 가봤더니 한국에서의 민중이란 말이 전 세계적인 시야에서는 ‘떠돌이’란 말로 써야한다, 그렇게 느껴졌어. 산업문화와 신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떠돌이들을 양산하고 있거든. 한국에도 동남아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오잖아. 중국만 해도 2억이야.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많은 수거든. 아! 이 사람들이 떠돌이구나, 이젠 민중신학을 인류사적인 각도에서 봐야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떠돌이들인 민중을 살펴봤더니 엄청난 게 미국이었어. 전 세계적인 떠돌이들의 참상을 생각해보고 왜 그렇게 떠돌이를 양산됐는가 생각해보고 성서를 봤더니 성서에도 떠돌이 천지더라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 세 가지는 사실, 모든 떠돌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들이야 먼저, ‘네게 땅을 주마’했잖아. 그건 ‘당신 없으면 아무도 존명할 수 없다.’는 것이지. 그리고 ‘창성하는 후손을 주마’는 서로 위하고 아끼는 공동체가 있어야 삶의 기쁨이 있다는 거야. ‘네 후손을 통해서 민족이 서로 축복을 하면서 살게 하리라.’는 민족이 서로 축복하면서 살아야 땅도 공동체도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이지.

 

이것이 바로 창조주가 이룩하시려는 역사 경륜이야. 그런데 이 약속은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어. 이 떠돌이들은 애굽 바로 왕의 노예가 되어 쓰라린 고생살이를 해. 남자들은 애굽 군병들의 채찍 밑에서 쓰러지고, 태어난 남자 아이들은 나일 강에 던저져. 남은 과부와 고아들의 삶이란 비참하기 그지없었지.

 

그 후 모세라고 하는 한 청년이 머리를 들고 일어서. 이런 악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마음에 단(斷)을 하고 일어섰어. 주먹을 휘둘러 포악한 애굽 군병을 쳐 죽이잖아. 그리고 싸우는 동족을 깨우치려고 했어. 그러나 존명하기에 급급한 떠돌이들은 모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에게 항거했지. 다급해진 모새는 미디안 광야로 도주해갈 수밖에 없었지 무려 40년 동안 말이야. 미디안 광야에서의 칩거 후 모세는 다시 가서 떠돌이들을 구출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떠돌이들은 애굽을 떠난 길고 긴 고생살이가 그들을 깨우쳐 악을 악으로 보고 새로운 내일을 갈망하게 되는 데 십계명이 바로 그들이 깨닫고 단을 내린 내용이지. 결국 저들은 홍해를 건너 과부, 고아 등 떠돌이가 안심하고 사는 평화롭고 정의로운 새 내일을 창출한 것이야. 어두움이 빛에 패배를 당하고 만 것이지. 그러나 어둠의 세력은 다시 격하게 다가 왔거든.

 

다윗 왕에게서 시작한 힘의 철학에 노예가 된 왕들이 야웨의 이름까지 도용하면서 민중들을 수탈하여 세상은 다시 어둠에 뒤덮인 캄캄한 밤이 되었지. 이렇게 되자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예언자들은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고 결국 저들은 주전 4-500년에 남북조가 다 망하여 정처 없는 떠돌이가 되어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지.

 

예수님은 30년 동안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수많은 떠돌이들의 한을 껴안고 아파하시다가 어두움의 사자인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나눔과 용서, 섬김과 화해의 삶으로 가는 곳마다 새로운 생명공동체의 횃불을 밝히셨잖아. 그리고 이 횃불이 지중해 연변으로 확산되니까 당황해진 어둠의 세력은 서둘러 이 횃불을 끄려고 했거든. 예수를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고 비방을 하는가 하면 그는 악마의 괴수 바알세불의 힘으로 악령을 추방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유언비어를 확산시켰지. 이것을 본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채찍을 들고 악마의 소굴인 성전을 숙청하셨지. 이와 같은 도전에 놀란 어둠의 괴수들은 당황한 나머지 예수를 정치범으로 몰아 십자가형에 처하고 그 시체를 무덤 속에 가두어 버려. 그리고 그들은 어둠이 빛을 이긴 줄로 착각하고 환호성을 올렸지만,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길 수가 없었어.

 

사흘 후에 무덤은 깨어지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거야. 부활하심으로 모두의 눈에 악의 정체가 밝혀져 하루에 3천 명씩이나 빛의 공동체에 들어오거든. 이것을 본 요한복음서 기자는 목소리를 높여 외쳐.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고.

 

그 후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이 빛의 승리를 보아왔잖아. 세계 방방곡곡에서 일어나는 해방운동에서도 그렇고 우리 한국에서도 이 빛은 동학혁명으로 의병항쟁으로, 독립운동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통일운동으로 어둠의 세력들을 밀어냈거든. 이 생명의 빛은 역사의 긴 안목에서 보자면 과정 과정에서 패배와 후퇴 같은 우여곡절이 있긴 하지만 결코 꺼지는 법이 없거든.”

 

그런데 사실 이 떠돌이 신학은 그저 태어나지 않았다. 한국 정치의 격변기에 온 몸을 던졌던 문동환은 정계에 잠시 있다가 1990년대 초반, 미국으로 훌쩍 떠난다. 그의 부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의 부인 페이 문은 미국인이다. 평생을 남편의 활동 속에서 격동의 시기를 거쳤던 그녀는 생애의 나머지는 자신의 고향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아직도 그의 할 일이 많은 조국이었지만 부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떠난다.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70이 넘은 그에게는 매우 새로운 인생여정이었다.

 

그렇게 해서 미국 생활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그는 부인의 고향에서 이방인이 된다. 그리고 이미 이방인, 또는 떠돌이의 서러움을 한껏 안고 살아가는 재미동포들의 삶을 그의 삶으로 살아낸다. 거기서 그는 오래 전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에 와 살아가는 떠돌이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그 어떤 것에도 묶이지 않은 자유한 존재이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존재의 고난과 기쁨에 눈뜨게 된다.

 

그가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에도 여전히 조국통일의 문제에 참여해온 까닭도 떠돌이의 삶에서 깨우친 바 크다. 그것은 그가 어디에 있든 생명의 길로 가려는 믿음의 의지를 지닌 존재라는 의식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그가 있는 자리는 무게를 가진다. 그의 목소리는 정정하고, 그의 주장은 선명하며 그의 논리는 정연하고 따스하다. 민족이 갈라져 살아가는 현실을 이겨내는 힘을 그의 목소리는 담고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어 광야에 가서 40일 동안 금식하실 때 사탄이 시험을 하잖아. 사실, 이 시험은 바르게 살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는 사탄의 시험이요 대부분의 경우 모두 이 시험에 빠지고 말아. 그러나 예수님은 이 시험에 이기셨어. 그리고 삶의 방향을 바로 잡으시어 생명을 살리시는 길에 들어서셨거든. 이렇게 하나님 나라 운동에 나선 그분의 심중에는 간절한 기원이 있으셨지.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이야.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자 즉석에서 이 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은 이 기도문이 예수님의 삶을 지배하는 삶의 목표요 기도문임을 말해 주지. 그러기에 이 두 가지는 서로 상관관계가 있어.

 

시험의 첫째는 광야의 돌들이 떡이 되게 하라는 것이야. 물질이 풍부해야 행복해 진다는 것이지. 사실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 세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이 풍부하게 있어. 문제는 강자들이 이를 독점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일용할 양식에 걱정할 것 없이 살게 해 달라’고 기원하라고 하셨어. 물질이 많음으로 행복해 지지 않는다는 것은 부자 청년의 이야기로 명확히 알 수 있잖아.

 

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천하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게 하면서 사탄에게 절을 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을 해. 그러나 권죄에 앉은 자들은(제사장과 바리새 파 사람들을 포함해서) 자기들을 신격화하여 자기 배만 채우면서 수탈당하는 자들을 천시하고 죄인 취급하거든. 그렇게 함으로 세상을 살벌한 도살장으로 만들어. 그래서 예수님은 아래로 내려가서 서로를 용서함으로 인정공동체를 이룩하라고 하시지.

 

셋째로 사탄은 예수를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 내리라고 했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돌이 발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라고 속삭이잖아. 하나님을 자기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라는 것이지.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야.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게 이용하는 것이지. 우리가 취할 바른 태도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야. 그래야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요 하나님에게 영광이 돌아가는 것이지.

 

문제는 우리들의 삶에 언제나 이 세 가지 유혹이 온다는 거야. 오늘날에는 이것이 화려한 산업문화의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하지.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이와 같은 유혹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어. 그리고 이 세상의 물결에 역행하여 예수님의 뒤를 따를 때에는 우리에게 박해가 있게 마련이지. 그러기에 ‘악’에서 구해 달라고 기원하라고 하신 거야. 예수님은 이렇게 끈질기게 시험을 이기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시다가 악의 세력에 사로 잡혀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지. 그러나 그의 고난은 패배가 아니라 빛나는 승리였어. 하나님 나라가 당시 온 세계라고 알려진 지중해 연변에 널리 확산이 된 것이지. 그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초청하셔. 제자가 되어 당신의 뒤를 따르라고 말이야.”

 

그는 이제 87세를 넘기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강건하고 힘차다. 그의 정신세계는 역동적이며 젊다. 90이 가까워져가는 나이에도 그의 지적 탐구력은 젊은이를 능가할 정도이다. 한번 터져 나오는 육성은 언제나 생명력 출렁이는 열정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런 그를 만나 이야기하고 있자면,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는 영원히 젊은 청년이다. 문동환의 이야기는 그렇게 이 시대의 영혼에 울림을 준다.

 

“지금 일어난 촛불 시위에서 우리는 다시 의의 승리를 볼 수 있어야 해. 이 촛불 시위는 그냥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시위가 아니야. 그 이상의 의미가 있지. 나는 이 촛불 시위를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21세기의 악령에 대한 시위라고 봐.

 

그것은 가는 곳마다 생태계를 파괴하고 빈부 격차를 조장하여 수억의 떠돌이들을 산출하는 다국적 기업을 앞장세운 신자본주의에 대한 시위거든. 생태계를 살리고 모두가 나누어 먹으면서 평화롭게 살자는 생명문화를 갈망하는 자들의 시위요 외침이지. 빛의 승리를 염원하는 시위거든. 이명박 대통령과 그 주변 세력이란 신자유주의를 확산하려는 이들일 뿐이지. 일견 그 어둠의 세력은 감당할 수 없이 커 보일 수 있어.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 없어. 빛이 승리하기 때문이지. 한 처음부터 타오른 생명의 빛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해.”

 

문동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즐거움이 가득했다. 영원히 젊은 청년의 육성은 그런 기쁨을 주는 법인가 보다.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늙어가고, 어떻게 자신의 정신세계를 이루어내는가를 우리는 문동환에게서 너무나도 뚜렷이 본다. 그런 그를 가진 우리는 행복하다. 하나님의 훈련을 받은 존재의 아름다움이 그에게서 빛난다. 영원한 청년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한종호

 

문익환의 목소리가 그리운 것은https://fzari.com/1070?category=615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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