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82)
방으로 들어온 500년을 산 느티나무
원주 귀래면에 사시는 윤형로 교수님이 서울로 올라오며 전화를 했다. 시간이 되면 잠깐 들르시겠다는 것이었다. 둘째 손자가 태어났는데, 동생을 봄으로 형이 된 큰 손자가 마음이 허전할 때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교회로 찾아오신 교수님은 멋진 선물을 전해 주셨다. 알맞은 크기의 탁자로 마주앉아 차를 마시기에 좋은 용도였다. 나무에 붉은 빛이 감돌아 차를 마실 때 분위기가 그윽하겠다 싶었다. 전해주신 탁자가 더없이 반갑고 고마웠던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태 전이었다. 오랜만에 인우재를 찾아 언덕길을 오르며 느티나무 아래를 지날 때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 느티나무 굵은 가지 하나가 땅에 떨어져 서너 조각으로 잘린 채 나무 주변에 나뒹굴고 있었다. 단오에는 그네가 달려 동네 아낙네들에게 큰 기쁨을 전해주었다던, 동네 어른들 이야기로는 500년을 훌쩍 넘긴 느티나무다. 가장 단순한 모습으로 섰다 싶었는데도 세월의 무게인 양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굵은 가지 하나를 떨군 것이었다. 떨어진 가지가 길을 막고 있으니 누군가가 가지를 움직일 수 있을 만큼씩 잘라 길옆으로 치워 놓은 것이었다.
감당하기 힘든 무게가 나무에게도 있구나 하며 지나치려다 문득 나무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견뎌온 세월이 얼만데 싶었다. 이병철 씨에게 물었더니 누가 떨어진 가지를 챙기겠냐며 필요하면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했다. 병철 씨가 끌고 온 트랙터의 도움을 받아 나무 몇 토막을 인우재 처마 아래로 옮겼다.
어느 날 처마 아래 있는 나무를 보다가 윤 교수님 생각이 났던 것은 교수님이 공방을 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퇴직을 한 뒤 집 한 켠에 공방을 만들고 이런저런 가구들과 소품들을 만들고 있었는데, 취미 이상의 작품들을 만들고 있었다. 특히 버려진 나무들을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보관하고 있던 느티나무의 용도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지난해 가을, 교수님을 제재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병철 씨와 함께 느티나무를 트럭에 싣고 나갔다. 제재소 주인은 이리저리 나무를 살펴보더니 속이 많이 비어있어 생각보다는 나무판이 많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노라고 했다. 실제로 나무를 켜보니 쓸모 있는 부분이 많지 않았다고 했다. 처음에 짐작했던 대로 속이 많이 비어있더라는 것이었다.
나무속이 비고 속에 까만색이 남게 된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병철 씨가 어렸을 적 그 느티나무는 동네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였다고 한다. 나무가 하도 커서 나무 밑동 부분은 아이 서너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병철 씨의 이실직고에 의하면 언젠가 한 번은 나무속에서 불장난을 하다가 나무를 태운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 때 낸 불이 나무를 태워 나무속이 더 비고 까만 기운이 남게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어릴 적 불을 낸 장본인이 불을 낸 나무를 싣고 제재소를 찾아 나무를 켜게 될 줄이야.
여섯 장인가 얻은 나무판 중의 하나로 교수님은 탁자를 만들 생각을 했고, 나무판에 숭숭 뚫린 구멍들을 기술과 수고로 메워 멋진 탁자를 만든 것이었다. 결국 교수님이 전한 탁자는 단강에서 오백년 이상을 살아온 느티나무로 만든 탁자였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탁자가 전혀 낯설지 않고 오히려 친숙하게 여겨졌다. 인우재 아래 그 늠름하고 우람한 느티나무가 내 방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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