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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다 살아지데요

by 한종호 2019. 3. 24.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83)

 

다 살아지데요

 

아직은 젊은 사람. 도시를 피해, 도시가 요구하는 삶의 방식을 피해 시골로 들어가 둥지를 틀 듯 땀으로 집을 지었다. 집이 주인을 닮은 건지, 주인이 집을 닮은 건지, 동네 언덕배기 저수지 옆 그럴듯한 집이 들어섰다. 창문 밖으로 벼들이 익어가는 모습을 볼 때면 그는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으리라 싶었다.


나무를 깎고, 글을 쓰고, 종이로 작품을 만들고, 닭을 키우고, 아이들 등하교 시키고, 소박한 삶을 살던 그에게서 어느 날 전해진 소식은 참으로 허망한 소식이었다.


누군가의 부탁으로 닭을 잡고 있는 동안 집이 홀라당 불탔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숟가락 하나 건지질 못했다고 했다. 살림도구며, 작품이며,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한 허무 위에 주저앉을 때, 그의 가슴은 얼마나 숯검정이었을까. 문득 삶 자체가 지워지는 고통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불쑥 찾아야지 싶었던 것은 마음뿐, 무심한 전화를 한 것조차 오랜만에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언제 그런 일 있었느냐는 듯이 씩씩하게 전화를 받는 그에게, 애써 씩씩한 척 하지 말라며 농 삼아 인사를 나눈 것은 조금이라도 무거운 마음이 가벼워졌으면 싶어서였다.


그는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불 탄 그 자리에 다시 집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집은 불탔지만 진심으로 아픔을 나누는 이웃들, 그동안 헛살지 않았다는 마음이 그를 일으키고 있지 싶었다. 걱정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이들을 어서 위로하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통화를 끝내기 전, 그가 한 마디를 했다.


“밥그릇 하나에 숟가락 하나만 있어도, 다 살아지데요.”


아픈 수업료를 내야 배울 수 있는 흔치 않은 깨달음이다 싶었다. 통화를 마치고 비오는 창문 밖을 내다보는데, 그의 말이 다시 울려왔다.


“다 사라져도, 다 살아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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