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오의 건강한 작은 교회 이야기(2)
“교회됨”은 “교제함”이다
- 진실한 공동체는 적정 수를 넘지 않는다 -
나는 지난 첫 번째 글에서 “교회”를 설명하는 여러 용어를 살펴 본 후 교회를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주님께 속한 삶을 살도록 가르치고 배우며 교제하는 곳”이라고 정의한다고 소개했다. 교회를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라고 정의하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로 정의하든, 건물과 제도로 정의하든, 교제하고 소통하며 행하는 곳으로 정의하든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다움” 또는 “교회됨”은 무엇일까? 위에 교회를 정의한 것에 의하면 교회됨은 교회의 구성원인 그리스도인 각자가 “주님께 속한 삶”을 사는 것에서 출발하고 완성된다 하겠다. 이를 위해 “가르치고 배우며 교제”하는 “것”이 교회이며, “곳”이 교회이다. 이런 가르침과 배움은 탁월한 설교자나 교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도 각자의 달란트와 은사에 따라 서로 “교제”함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교회됨”은 결국 “교제함” 즉, 성령 안에서 소통하고 사귐이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배와 모임도, 직분과 제도도 결국 이를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몇 명이 모였는가, 몇 명이 예배를 했는가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삶의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가로 규정되는 것이다. 한 교회 성도의 아픔과 눈물이 무엇이고, 내가 도울 수 있는 것과 내가 도움 받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면, 아니 관심조차 없다면 이는 “교회”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신앙적, 인격적 교제야 말로 성경이 가르쳐주는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으로 부르심으로 받아,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모퉁이 돌 되신 예수님을 반석으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성령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에베소서 2:22)가 된다는 의미다.
인격적으로 교제하고 사귀는 “교회됨”은 적정 수를 넘어가면 불가능하다. 교회됨의 적정 수는 얼마일까? 두 가지 요소가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는 교제함 즉, 소통과 사귐이 살아있는 진정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위에 이미 일부 언급했다. 총론적으로 보면 성도가 주님께 속한 삶을 살도록 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교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총론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비전과 가치, 운영, 교육, 사역, 직분 등 다양한 각론들이 한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한 성경적 가치와 실제적 내용들에 대해서는 다음 번 글에 다루도록 하겠다.
둘째는 지속가능함 즉, 지역교회로서 지속 가능하게 유지, 발전, 분화해 나갈 수 있는가이다. 쉽게 말해 지역교회로서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편적 지역교회는 모임 공간과 전임 사역자에 대한 생활비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교회의 자립은 모임 공간을 운영하고 전임 사역자에 대한 생활비를 책임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간 운영과 생활비의 적정성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별도로 다루도록 하겠다.
많은 분들이 건강한 작은 교회를 이야기할 때 진정한 공동체성을 강조하다 보니 적절한 교회 운영의 측면을 간과한다. 내가 이야기 하려는 교회는 특별한 교회나 특수한 교회가 아니다. 보편적 지역교회로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그런 교회다. 2~3가정이나 10가정 이내로 모여 소위 “가정교회”를 이루는 것도 물론 “교회”라 할 수 있고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보편적 지역교회는 이런 작은 규모로는 발전, 분화는커녕 유지되기도 어렵다.
반면, 현재 한국교회는 운영적/사역적 측면을 강조하다 보니 진정한 공동체성은 간과하고 큰 교회가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주장하며 무한정한 성장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회사가 아니다. 봉사 단체도 아니다. 운영이 잘되고 있는가, 어떤 사역을 하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됨 즉, 교제함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성장도 한계가 있고 공간/건물의 크기도 한계가 있어야 한다.
어떤 분들은 유기체로서 “사람”도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도 있다며 교회 대형화를 옹호한다. 그러나 사람도 커도 한계가 있다. 아무리 큰 사람도 3미터는 넘지 않는다. 크기도, 무게도 “적절”할 때 건강하고 적절할 때 유기체성이 살아 있는 것이다. 또 어떤 분들은 성경에 베드로가 전도할 때 3천 명, 5천 명이 회개했다며 대형 교회를 옹호한다. 그러나 회개한 그들이 한 공간에 모여 “교회”를 이룬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는 예루살렘 교회 뿐 아니라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도 대부분 “가정 교회” 형태로 아주 작은 단위로 산재해 있었다. 이후 로마에 의한 국교화와 제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지역별 예배당이 만들어질 때도 한 목회자가 담임하는 수 천, 수 만 명을 수용하는 예배당은 없었다.
현재 한 교회에 교구를 두어 부교역자들이 담당하도록 하는 이런 식의 교회는 노회/지방회 등 교회별 연합의 형태와 기능을 한 대형교회에 둔 것으로 노회/지방회 나아가 총회/교단이라는 공교회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공교회성을 훼손하는 것은 한 교회의 대형화뿐 아니라 분점/지점 형태의 교회 분립/개척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공교회성의 훼손에 대해서도 이후 별도로 다루도록 하겠다.
이진오/더함공동체교회 목사, 교회2.0목회자운동 회원
'이진오의 '건강한 작은 교회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음”은 십자가의 정신이다 (0) | 2015.03.11 |
---|---|
“단순함”은 본질에 대한 추구다 (1) | 2015.03.05 |
단순함, 작음, 더불어 함께 (0) | 2015.02.23 |
대형교회와 브랜드교회, 그 불편한 유사점 (3) | 2015.02.12 |
“敎會”에서 “交會”로 (1) | 2015.01.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