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17)
마음에 남는 찬양
마음에 남은 찬양이 있다.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우연히 듣게 된 찬양이었다. 찬양을 들을 때만 해도 그 찬양이 오래 남을 줄은 몰랐다.
지난해 집회 인도차 미국을 방문할 때였다. 신대원 강의를 통해서 만난 오치용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시카고 인근 샴페인에 있는 예수사랑교회에서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교인의 대부분이 학생들이었고, 예배 전 찬양 또한 젊은이들이 인도를 했다. 피아노, 키보드, 드럼, 기타 등의 악기와 마이크를 잡은 여러 명의 학생들, 찬양은 조용하면서도 진지했다.
왜 그 때의 찬양이 마음에 남은 것일까? 몇 번 생각한 적이 있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알겠다. 그 때와 다른 찬양의 모습을 흔하게 보기 때문이다. 박수를 치게 하거나, 두 손을 들게 하거나, 손을 가슴에 얹게 하거나, 아멘이나 할렐루야를 외치게 하는 것은 찬양의 자리에서 흔하게 보는 모습이다.
찬양 인도자가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강요받는 감정은 어색하다. 하지만 은혜의 찬양으로 남은 그 자리에는 어떤 요구도 없었다. 기교가 사라지니 마음이 남았다. 시키지 않아도 찬양 중에 은혜가 되는 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그때의 찬양 중 인상적인 모습이 있었다. 악기를 다루는 이든, 노래를 하는 이든 어느 누구도 자기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스스로를 낮춰 서로에게 귀를 기울였다. 행여 자신이 소리를 높여 다른 이들을 어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조심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것은 찬양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생각하게 했다. 찬양은 공연과 다르다. 내 목소리를, 나를 드러내는 시간이 아니다.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경쟁하듯 소리를 내지르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악기는 악기대로 소리를 지르고, 마이크를 잡은 이들은 목청껏 노래를 한다. 그런 모습은 마치 누구의 영역이 더 넓은지를 겨루는 것처럼 보인다. 만들어내는 음량의 총합을 은혜의 총합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시간 뒤에 남는 허전함이 저들에겐 없는 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찬양은 또 하나의 기도, 두고두고 마음에 남을 찬양을 드리고 싶고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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