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18)
소임(所任)에 대하여
지금 나는 담임목사다. 교회의 규모에 따라 함께 일하는 이들이 있다. 부목사도 있고, 수련목회자도 있고, 심방 전도사도 있고, 운전 관리 사무 등을 맡은 몇 명의 직원들도 있다. 담임목사는 행정 책임자이기도 해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계획하고 확인하고 지시하고 조율하는 일도 해야 한다.
설교나 기도 못지않게 행정이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다. 교회 일도 사람이 모여서 하는 것, 제각기 성향이 다른 이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그 중 어려운 것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성향을 조율하는 일이지 싶다.
젊은 시절 몇 몇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며 누가 시켜서 일하기보다는 자발적으로 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담임 목사가 되어서도 다른 누군가에게 일을 시키는 것을 가능하면 삼가려 한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이해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시켜서 하고, 혼나서 일하는 것은 뻔한 한계가 있는 법, 무모한 꿈을 꾸며 창조적으로 일하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실은 그것이 쉽지가 않다. 편하게 대하면 쉽게 대하려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엄한 사람에게도 저랬을까 싶은, 가벼운 처신을 볼 때면 마음이 아프다. 함께 지내며 내 성품을 알게 된 장로님들이 조심스럽게 조언을 할 때도 있다. 직원들을 엄하게 대하면 좋겠다고, 일을 빡세게(!) 시키면 좋겠다고, 그럴 때면 빙긋 웃고 만다.
어제는 우연히 이웃교회 이야기를 들었다. 부교역자가 얼마 버티지를 못하고 교회를 떠난다는 것이었다. 밤 12시 전에 퇴근을 하면 다행, 잠깐 눈을 붙이고는 또 다시 새벽기도회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그렇게 많담 싶기도 하고, 그렇게 많은 일을 시키는 것도 능력인가 싶으면서, 그것은 일종의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함께 일하던 수련목회자가 목사안수를 받았다. 안수를 받자마자 다른 교회 부목사로 임지를 옮긴다. 함께 했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래도 둥지 속의 새를 세상으로 내보내는 심정이었다. 그런 마음이 들어 안수를 받던 날 아침, 짧은 글을 통해 두 가지를 당부했다. 성실과 겸손이었다.
성실은 열심과는 다르다. 오히려 정성에 가깝다. 겸손은 목회자가 가져야 할 바탕 중의 바탕, 권위는 내가 만들어 내거나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겸손에 대한 교우들의 존경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겸손은 무엇보다도 삼가는 것이다. 삼갈 것을 삼가는 것은 여간 깨어있지 않으면 어렵다. 성실과 겸손이 앞으로 목사로서 끌어야 할 수레의 두 개의 바퀴가 되기를 부탁했다.
훈수 두듯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엇 어렵겠는가, 후배에게 들려준 말 앞에서 나를 돌아보며 ‘소임’(所任)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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