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욱, 그 병폐의 프리즘(1)
전병욱, 한국교회의 욕망과 죄를 보여주는 열쇠 말
<꽃자리>는 왜 다시 “전병욱”에 대해 글을 쓰려는 것일까?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계실 듯 합니다. 10여 년 전, 그의 설교와 신학적 사고에 깊이 스며 있고 거기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에 대해 비판했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통해 한국교회의 모순과 한계가 매우 뿌리 깊게 투영되어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았습니다. 꽤 시간이 흐른 이 시점에도 동일한 병폐와 오류가 압축되어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병욱 말고도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병욱의 경우. 성추행이라는 매우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법적 처벌도 받지 않았고, 그 자신이 이에 대해 본질적인 성찰과 반성도 없는 채로 다시 목회를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비리와 부패
한국교회의 비리와 부패를 폭로한 다큐멘터리 영화 <쿼바디스>에 등장하는 사랑의 교회를 비롯해서 이른바 적지 않은 목회자들의 반윤리적 작태는 한국 기독교를 끊임없이 수치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거대한 기업체도 아닌데 그렇게 큰 건물을 짓고 소유하고 거기에 교회라는 간판을 붙이고 있는 것도 기가 막힐 뿐만 아니라, 논문표절이라는 도둑질을 해놓고도 버젓이 계속 목회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의 모습은 샤르트르의 작품 《구토》의 제목을 연상시킵니다. 횡령과 성추행을 비롯해서 권력의 편에 붙어 이 나라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데 일조한 이들은 또 어떤가요?
이런 한국교회의 몰골은 기독교 자체에 대한 회의와 환멸을 낳고 있으며, 한국교회는 그로써 비난의 대상이 되어온 지 오래입니다. 오죽하면, 원로 목회자 일부는 이제 교회 나가지 않기 운동을 벌여야 할 판이 되었다고 탄식하겠습니까?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성전에 가셔서 그 부패와 독선, 그리고 민중 위에 군림하고 있는 현실을 보시고 “강도의 소굴”이라고 일갈하시고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라고 경고하신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의 대형교회 대부분은 “강도의 소굴”이 되었으며, 알만 한 사람은 알고 있는 소위 진보라는 일부 진영도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예수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자리 나눠먹기, 권력 차지하기 등 욕망과 지배의 성채가 되었습니다(이 부분은 차후에 다른 꼭지로 면밀히 다루고자 합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을 선포한다며, 오랜 역사와 전통 있는 한국교회 연합기관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걸고 기만행위를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오해와 기만의 중심에 자리 잡은 “전병욱 현상”
우리가 날로 경악하고 절망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은, 교회를 다니는 젊은 세대마저도 이에 대하여 저항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보다는 그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너무도 힘들고 좌절을 겪게 하고 있기에, 위로와 격려가 절실하다는 이유 때문에 복음 아닌 것이 복음 행세를 하면서 이들을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진정 예수의 길이며,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깨닫는 것은 신앙의 기본적인 각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출세주의를 부추기고 물질적 성취라는 목표를 위해 요구되는 전략과 전술을 제공해주는 곳으로 타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젊은 세대는 이를 마치 복음이 공급해주는 삶의 에너지처럼 오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오해와 기만의 중심에는 “전병욱 현상”이 있습니다. 성추행범이 목회자로 다시 등장해서 젊은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불러 모으고 있는 것입니다.
성추행범으로 삼일교회에서 물러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홍대새교회를 개척한 후, 2012년 6월 19일 새벽기도회에서 전병욱은 “잘못된 결정은 즉각 돌이키라”는 제목의 설교를 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다가 사울의 적진에 도주해서 목숨을 건지는 사무엘상 21장 10절에서 15절의 대목을 본문으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그가 주목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울이 왕인데, 적은 자신을 왕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듣고, “아 내가 왕이지” 하는 깨우침으로 본래의 사명을 회복하고 돌아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설교를 합니다. 좀 길지만 인용해보겠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고 하다 보면 우리 사명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 땅에 왜 존재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다 잊어버릴 수 있어요. 근데 어느 순간에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때도 있지만,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정신 차릴 때가 있어요. 아! 이거구나. 그때 깨달을 수 있는 거죠. 세상이 얼마나 정확한지 아십니까? 예를 들어 거지들도 잘 알아요. 누가 동정심을 가지고 구제를 하는지. 거지들을 보면 구걸할 때 불경을 외우는 거지 봤습니까? 나는 우리나라에서 한 번도 못 봤어요. 지하철에서 불경을 외우면서 도는 것 봤어요? 없는 것 같아요. 하다못해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면서 구걸하는 것을 못 본 것 같아요. 제가 본 것만 얘기하면 거의 다 찬송가였어요. 어제 본 거지는 복음성가를 부르더라고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익숙하지 않은 노래를 트는 건 거의 못 봤어요. 가요를 불러도 되잖아요.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를 불러도 되잖아요. 근데 그건 것도 못 봤어요. 거의 대부분 찬송가를 부르더라고요. 거지도 알아요. 성도들에게서만 돈이 나온다는 것을. 성도들에게서만 구제가 가능할 수 있다라는 것. 세상이 더 잘 알잖아요.”
구걸하는 걸인들에 대한 일말의 동정이나 이들의 삶에 대한 아픔은 없습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단지 걸인들조차도 기독교에 대해 알고 있다는 투입니다. 이렇게 타자에 의해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대목은 이렇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교회가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 누가 더 잘 아느냐. 그 지역에 있는 부동산 중개업자가 더 잘 알아요. 그 교회가 싹수가 좀 노랗고, 안 될 교회 같다고 그러면 그 동네 상권이 무너지고 오히려 매물이 쏟아지고 그래요. 갑자기 상가가 동이 나기 시작하고 오겠다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러면 더 잘 알죠. 홍대새교회가 잘 될지 안 될지는 주변의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물어봐요. 이 동네 요즘 상가 시세가 어떻게 되나. 점점 빈 방이 없어진다 하면 되는 교회이고, 빈 방이 늘고 있다면 힘든 것이고.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죠. 세상이 더 잘 안다고. 세상이.”
죄로 들어서는 문
참으로 어이없고 정말 허접하기 짝이 없습니다. 교회의 생명과 부동산 가격이 그에게는 한 몸이 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곳에 가서 교회가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사명에 대한 깨우침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윗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왕인가요? 아니올시다,입니다. 다윗은 아둘람굴에서 당대의 고난 받은 이들이 모여들었을 때,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지도자의 역할을 각성하게 됩니다. 따라서 다윗이 다윗인 것은 그가 왕인가 아닌가의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누구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고 살려 하는가에 있습니다. 그렇게 보자면, 걸인의 이야기를 꺼낼 때도 우리는 그렇게 살게 되는 이들이 없는 세상을 어떻게든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다지는 쪽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온통 껴안고 그걸 풀어가는 이들이 되고자 할 때 우리는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부동산 가격 운운도 다르지 않습니다. 전병욱 식이라면 우리는 교회가 고난의 땅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로 이어짐을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보자’라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의 설교입니다.
전병욱은 그래서 한 개인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의 욕망과 죄를 보여주는 열쇠 말이 된 격이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은 종식되어야 합니다. 아니면 우리는 다윗이 왕이 된 이후 그의 진정한 사명을 잊고 욕망의 인간이 되어 죄의 늪에 빠지게 되는 까닭과 그 의미를 모르게 됩니다. 다윗이 왕은 되었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에는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그런 전철을 밟을 수 있습니다. 전병욱은 그 전철을 밟게 하는 길로 젊은이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죄로 들어서는 문이 그 앞에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전병욱을 버리는 한국교회, 아니 합동측 교단이 될 수 있기를 새해인사로 드립니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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