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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기뻐하라'의 의미를 묵상합니다.

by 한종호 2019. 12. 28.

신동숙의 글밭(43)

 

'기뻐하라'의 의미를 묵상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 전서 5:16-18)

 

제 기억 속의 세월호는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입니다. 잊혀지지 않으며, 잊혀져선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 땅 어디에선가 그와 같은 불합리한 일들이 모습을 달리하고서 엄연히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겨울바닷속처럼 다 헤아릴 수 없는 유족들의 가슴 속으로 따뜻한 햇살 한 줄기 비추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분들을 만난다 하더라도 따뜻한 말 한 마디, 따뜻한 눈길이 끊이지 않는 파도처럼 우리들 사이에서 잔잔하게 일렁이기를 소망합니다.

 

당장에 오늘 내 곁에 우리 집안에서 일어난 일도, 함께 사는 가족의 마음 속 일도 정작 관심을 두지 않으면 먼 나라 딴 세상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마음으로 바라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곳으로 햇살이 비추듯 사랑은 흘러갑니다. 응달지고 후미진 그곳을 환하게 밝히는 것은, 햇살을 닮은 관심 어린 작고 따뜻한 눈길일 테지요.

 

하나님이 명령형으로 말씀하신 '기뻐하라', 이 말씀 앞에선 늘 여러 감정이 일어납니다. 우리네 삶에는 변화무쌍한 날씨를 닮은 희노애구 애오욕(喜怒哀懼 愛惡慾) 7정의 성정이 늘 함께 합니다.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는 예수의 성정과도 모순이 없어야 진리의 말씀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항상 기뻐하라'의 뜻이 웃음과 즐거움의 겉모습을 뜻하는 의미만은 아님을 묵상합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로 온 나라가 슬픔과 비탄에 빠져 있던 그 무렵, 다니던 교회의 주일 학교에선 예정대로 남노회가 주최하는 <신앙 그림그리기 대회>가 있었습니다. 따뜻한 봄햇살을 받으며, 공원을 신나게 뛰어다니던 유·초등부 주일 학교 학생들. 해맑은 몸짓들을 한 곳으로 불러 모으는 교사들의 낭낭한 목소리. 알록달록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주일학교 어린이들. 그날의 주제 중 하나가 '노아의 방주'였습니다. 어린이 그림대회라곤 하지만, 상장이 걸린 부분이라 함께 간 부모와 담당 교사들이 알게 모르게 거들거나 큰 애들한테는 지나가는 바람처럼 훈수라도 두고 싶은 그런 날이었답니다.

 

슬픈 동화처럼 세월호 얘기를 들려줬더니, 유치부 아들은 회색빛 검은빛으로 노아의 방주를 그리다 말고는 다 그렸다며 뛰어가 놀기가 바쁩니다. 입상자 중에는 딸아이가 있었습니다. 마트 진열대 위에 사탕껍질처럼 색색깔의 예쁘장한 그림이었습니다. 딸아이의 그림이 입상했다는 기쁨은 그때 잠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색색깔 그림의 그림자는 긴 세월 만큼이나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날의 주일 학교 학생들은 세월호를 모릅니다. 저 혼자서는 세월호에 희생된 학생들과 유족들을 위한 전교인의 기도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다린 주일 예배, 주일 말씀 중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세월호라는 단어가 목회자의 입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일도 지금껏 그늘이 되어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주일 설교는 언제나 세상의 아픔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지나서 언뜻 스치는 말에 희생자 중에 우리 교인이 없기 때문에.

 

그림그리기 대회, 그날 수백 명이 모인 교회 학교 어린이들. 슬픔을 담은 그림은 눈을 씻고 봐도 아들의 그림 한 장 뿐이었습니다. 마치 하얀 종이에 튄 먹물 한 방울 같이 생뚱맞은 어둠이 드리운 슬픈 배 그림 한 척. 집 근처 대형교회의 벽면이 매끈한 유선형으로 주변의 일반 건축물과는 다른 생소한 모습이라 물었더니, 노아의 방주처럼 지었다고 합니다.

 

 

 

 

 

 

노아의 방주 같은 안전한 교회당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그저 홍수 속 출렁이는 세상의 검은 물결일 테지요. 그 험난하고 악한 바다에는 차마 들어갈 수 없다고 믿는 성도들. 그저 불쌍한 세상 속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물고기를 잡듯 한 생명을 낚아올리려는 전도지와 물티슈. 세상의 아픔과 슬픔 앞에 굳게 문을 닫아 걸고, 입에 담지 않으려 애써 외면하고, 제 손으로 제 귀를 막고, 제 손으로 제 눈을 가리는, 그런 두 손을 모아 새벽기도의 재단을 쌓던 목회자와 중직자들. 그들의 손아귀에 자녀를 맡긴 성도들, 해맑은 주일 학교 어린이들. 5년 동안 제가 본 교회의 모습입니다.

 

물론 시멘트 틈새에도 함께 아파하는 이들의 마음이 야윈 꽃처럼 피어있기도 했습니다. 전혜성 박사의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운다>는 책에서 감동을 받고, 섬기기 위해서 섬김을 배우려고 다니게 된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담벼락은 세상의 물길을 막기 위한 댐처럼 높기만 했습니다. 물길이 스며들까 휩쓸릴까 두려움에 몸을 사리며 평안과 천국을 구하는 안전지대, 성도들에게 교회는 노아의 방주였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기뻐하라', '기쁘다'는 우리의 입말입니다. '기분이 좋다'라는 말은 '기의 분할이 좋다', 온몸의 기가 막힘 없이 원할하게 돌 때 우리는 '기분이 좋다'고 말합니다. 어느 한 곳이든 기와 혈이 막힌 곳이 있다면, 그곳은 아픈 곳, 병든 곳이 될 테지요.

 

가끔 성도들을 볼 때면, '항상 기뻐하라'의 의미를 웃음과 즐거움의 표면적 의미로만 이해하고 한계를 짓고 마는 건 아닌가 여겨질 때가 있답니다. 당장에 자녀가 독감에 걸렸는데,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라' 하십니다. 그때의 기쁨은 달리 해석되어져야 하는 순간입니다. 자녀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는 부모의 마음과 나으리라는 희망이 깃든 긍정의 마음이 그 순간  '기뻐하라'의 의미일 것입니다. 아픈 자녀를 앞에 두고 귀와 눈과 입을 막으며 아픔을 외면하고서 해맑게 웃는 부모는 없을 테지요.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 깊이 묵상을 하다보면, 세상은 나와 다른 별개의 존재가 아님을 느낍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에서 파생된 개체로, 이웃은 '또 하나의 나'가 됩니다. 그처럼 교회 밖의 세상은 이웃이 되고, '또 하나의 나'가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곳입니다.

 

저의 헤아림으로 본 '기뻐하다'는 '깨어 있다'의 의미입니다. 삶에는 타이밍이란 것이 중요합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즐거워 하기 위해선, 상황 판단이 정확해야 하고 순간을 온전히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물며 눈치라도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지 않고선 어느 시점에서 함께 울어야 하며, 함께 웃어야 할 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가 소통하는 페이스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감의 표시인 '좋아요'를 누르는 짧은 순간 조차도 감정을 나타내는 이모티콘의 선택을 두고 잠시 고민을 합니다. 함께 눈물 흘릴 지, 웃을 지, 화내요와 멋져요, 하트를 남길지. 깨어 있지 않고선 '좋아요' 공감의 이모티콘 하나도 허투루 선택할 수 없는, 흔하고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깨어 있어야 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그런 날씨처럼 시시각각 변화하는 민감한 마음을 두고서 맹목적인 믿음과 순종의 미덕만을 강요하는 설교는 양심을 가리는 어리석은 무지일 뿐입니다. 물론 '기뻐하다', '깨어 있다'의 의미가 일희일비(一喜一悲)의 가벼움은 아닙니다. 함께 아파하는 중에도 희망의 씨앗을 볼 수 있는 긍정의 마음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어진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기쁨을 기꺼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의로운 마음입니다. 이웃의 모습에서 나를 보고, 나아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밝은 마음입니다.

 

역사와 현실을 가린 교회 건물 안에서 자라나는 어린 영혼들에게 전깃불이 아닌 태양빛이 비추어 깨어 있는 영혼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일처럼,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일이 기의 막힘 없이 돌아가는 기분 좋은 자연의 순환이 되도록. 늘 깨어 있음으로 곧, 항상 기뻐함으로 우리의 의식과 마음과 영혼이 깨어서 숨을 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또 하나의 말씀이 있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누가복음 10 : 27) 사랑하면 믿음과 순종은 저절로 따를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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