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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가라앉은 목소리

by 한종호 2020. 1. 1.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67)

 

가라앉은 목소리

 

송구영신예배를 앞두고 끝까지 망설인 시간이 있었다. 도유식이었다. 두어 달 전 성북지방 목회자 세미나 시간에 강사로 온 감신대 박해정 교수는 교회에서 도유식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회복되기를 바라는 시간으로 도유식을 꼽았다. 진정한 예배를 고민하는 자리였다.

 

경험에 의하면 도유식은 참 은혜로운 예식이다. 기름을 이마에 바르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의 의미가 있겠다 싶다. 물론 내 짐작이다. 하나는 성별이다. 주님은 모세에게 성막과 성막 안에 있는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바르게 하셨다.(레위기 8:10)


다른 하나는, 치유이다. 초대교회에서는 아픈 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야고보서 5:14)


또 하나 빠뜨리고 싶지 않은 것이, 환대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편 23:5)

 

이런 의미가 담긴 시간이라면 송구영신예배와는 그 중 잘 어울린다. 살아가며 입었던 몸과 마음의 병과 상처를 치유하고, 새롭게 맞이하는 한해를 주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환대를 받으며 시작한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일까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망설였던 것은 혹시라도 도유식을 낯설게, 의아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소수라 할지라도 그런 마음을 갖는 이들이 있다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익숙하지 않은 시간을 가지면 그 자체를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고, 그 불편함을 불편하게 풀어내는 이들이 있다. 도유식만 해도 그렇다. 천주교에서 온 것 아니냐며 경계하고 부정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개신교에서는 오래된 신앙 전통까지를 모두 부정하는 경향이 크다. 굳이 신구교를 구분할 필요가 없던 시절에 남겨진 신앙 유산까지를 말이다. 재의 수요일에 재를 이마에 바르는 것, 세족 목요일에 세족식을 하는 것, 다양한 형태의 기도생활을 하는 것 등 우리에게 전해진 소중한 영적 자산을 스스로 부정할 때가 있다. 그것이 얼마나 속이 좁은 일이며 얼마나 큰 손실일까 싶은데도 말이다.

 

설마 감신대에서 예배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근거 없는 말을 할까 싶기도 했거니와, 그동안 목회를 하며 받아들일 만한 자리에선 얼마든지 가져왔던 도유식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두 분의 장로님을 만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눴다. 교우들의 정서를 알고 싶었다. 이야기를 들은 장로님들은 도유식의 의미를 편하게 받아들였고, 그런 과정을 거쳐 도유식 시간을 갖기로 한 것이었다.

 

 

 

 

 

마침 예루살렘에서 직접 구한 올리브유(어노인팅 오일)를 한 후배가 전해준 것이 있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만큼은 아니더라도 기꺼이 그 올리브유를 쓰기로 했다. 옛 물건을 애장하는 권사님께 오래된 도자기 접시를 빌렸다. 접시받침대로는 낡고 오래된 작은 나무쟁반을 택했다.

 

짐작했던 대로 도유식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한 사람씩 차례대로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어른은 물론 자녀들까지 모두가 참여했다. 엄지에 묻힌 기름을 십자가 형태로 이마에 바르며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교우들도 “아멘!”으로 화답했다. 마지막 교우를 마친 뒤에는 부목사를 통해 나도 이마에 기름을 발랐다.

 

긴 시간 같은 자세로 서서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끝날 때쯤이 되었을 때는 다리가 뻣뻣했고, 말이 엉기기도 했다. 그래도 내게는 새해를 맞는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진심을 담아 기도하고 축복하는 자리였다. 몸이 아픈 장로님이 지팡이를 짚고 나와 섰을 때는 내가 하는 행위와 전하는 말에 주님의 은총이 오롯이 담기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했다. 전에는 안수기도의 시간을 오래도록 갖기도 했다는데, 내게는 도유식이 안수기도의 의미이기도 했다.

 

예배를 마치고,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니 새벽 1시가 넘었다. 씻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목이 칼칼하다. 말을 해보니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며칠 뒤 집회를 인도할 일이 있어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감사했다. 누군가를 축복하느라 목이 가라앉는 일이 세상에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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