돕는 사람의 온전한 행복

신동숙의 글밭(57)


돕는 사람의 온전한 행복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은 모두가 다른 얼굴 다른 삶의 모습을 보입니다. 한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 없으며, 한 순간도 똑같은 순간이 없는 생생히 살아있는 삶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웃들 중에는 도움을 주는 손길도 있고, 도움을 받는 손길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서로가 조금씩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의 10대~20대를 지나면서 진학을 하고 또 취업을 위해 우리는 선택의 순간과 종종 만나게 됩니다. 대나무의 마디처럼 만나게 되는 그 순간에 어떠한 씨앗을 가슴에 품느냐에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삶의 모습은 달라질 것입니다. 대나무가 위로 곧은 것은 곁길로 가지 않고 높은 하늘만 선택했기 때문인지, 곁에 선 대나무에 제 마음을 비추어보며 그리고 둘러싼 하늘을 바라봅니다.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서 살아가려는 삶이 있습니다. 그리고 뭔지는 잘 모르지만, 대상이 분명하진 않지만 세상을 향해 돕는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원을 세우는 삶이 있습니다. 똑같이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일을 하며 하루를 살아가지만, 시간이 갈수록 삶의 모습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지런히 바쁘게 일상의 삶을 꾸려가는 모습이 미덕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급속도록 그래프가 올라가던 경제 성장 속도에 발맞추어 소중한 하루를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가쁜 숨을 쉬어야 했던 생활인들. 그리고, 언젠가부터 몰아쉬던 가쁜 숨을 천천히 내려놓으려는 잔잔한 물결들이 삶 곳곳에는 일렁이고 있음을 봅니다. 


저 역시도 20대 초반에는 취업에 대한 고민이 인생의 무거운 짐으로 가슴을 누르던 터널과 같은 시기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 터널의 시기는 지금도 앞으로도 언제나 찾아오고 또 지나가며 삶의 마지막까지 그렇게 이어질 테고요. 그러한 삶 속에서 매 순간마다 저는 언제나 초보자이며, 어린아이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시를 씁니다.


20대 취업을 앞두고, 부지런함보다는 게으른 모습이었습니다. 방 안에 혼자 앉아 있었으니까요. 공부만 시켜놓으면 알아서 척척 살아갈 줄 알았던 딸이었기에 지켜보던 부모님이 답답함에 가슴을 치시던, 혼돈과 공허함의 시기를 지나고 있던 무렵입니다. 저는 어둔 내면을 보고 있었고, 제 몸은 묶여 있었습니다. 식물과 같은 모습. 제게 주어지는 모든 한 순간의 선택이 영원의 숙제로 다가오는 그 무거움. 이제는 그 게으름과 무력감의 순간에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멈춤.


학업과 일상이라는 컨베이어 벨트를 멈추고, 고요히 머무는 순간. 제 인생이 처음으로 멈추고 내면으로 시선이 향하게 된 전환점입니다. 종종 주위를 둘러보면, 그런 멈춤의 시기를 겪은 분들도 계시지만, 여전히 일상의 수레바퀴 위에서 발을 내려놓지 못하여 주저하거나 두려워하고 있는 눈빛도 언뜻 마주치게 됩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영혼으로부터 초대장은 날아올 테고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복을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저에게 다가온 멈춤의 순간. 고요히 머물러 내면으로 시선이 향하던 그 순간. 따뜻한 온기를 구했고 삶의 행복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금방 사라질 온기와 표피적인 행복이 아니라, 진정한 빛과 온전한 행복을 구했습니다. 더욱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갔고, 그럴수록 나와 너는 둘이 아닌 하나의 뿌리임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주어진 내면의 느낌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흐려진 것이 아니라 마치 뿌려진 씨앗이 자라는 모습처럼 더욱 선명해집니다. 내가 노력해서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느낌이었다면 금방 사라졌을 것입니다. 멈추고 고요히 머무는 순간, 저절로 주어지는 은총이 실체임을 봅니다. 이미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에 고요히 머물러 평온함과 쉼을 얻는 관상觀想의 기도.


삶의 물줄기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었습니다.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살아가는 삶에서 보이는 한계들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고층 아파트 부촌에서 물질적으로 가난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간다 할지라도 하늘의 공기, 미세먼지는 어디든 넘나듭니다. 함께 호흡하며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더불어 아름다운 삶을 지향점으로 자연스레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할 때 제 마음은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행복은 도움을 주려는 마음과 가까움을 보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받으려고만 하면 작아지고 옹졸해집니다. 반대로 사랑을 주려고 하고 도움을 주려는 마음은 스스로의 가슴에 햇살을 품은 듯 넉넉한 가슴이 하늘처럼 내 속에 펼쳐지는 풍경을 봅니다.


제가 선택한 삶은 도움이 되는 삶, 섬기는 삶이 커다란 물줄기가 되었습니다. 제 자신이 온전히 행복하기 위해서 선택한 삶. 그 와중에도 물살이 오고 가듯, 스치는 이기심과 이타심은 서로가 잔잔히 부딪히며 윤슬처럼 반짝이는 모습입니다. 그러면서도 강물은 유유히 흘러갈 테고요. 우리의 삶이 눈물겹도록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은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 위에 내려앉아 부딪히며 빈 곳을 채우는 하늘과 햇살의 반짝임이 아닌가 헤아려봅니다.


명상의 집에서 만난 안셀모 신부님의 모습이 반가운 것은 돕는 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원을 십 대 때 세운 그 발심입니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토마스 머튼의 영성 강의. 이어지는 점심 식사 시간에는 맨 마지막에 식사를 하셔서 참석자들이 한 두 개씩 먹었던 생선 튀김을 못 드셨답니다. 적게 먹는 저보다 더 조금만 덜어 오셔서 국에 밥을 말아서 드십니다. 처음으로 나누는 인사가 반갑고 따뜻합니다. 


제가 난생처음 참석한 미사를 두고 옆에 앉은 대구에서 오신 분이 얘기를 하십니다. 저보고 오늘 처음 왔는데, 제일 큰 미사를 드렸다고 하십니다. 단상 위에까지 올라가서 예수님의 신상과 신부님을 중심으로 우리 모두가 빙둘러 서서 다 함께 성찬 미사를 드린 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지 않았기에 제 차례가 되어서는 이마에 십자가 성호를 그으시며 안수 기도를 해주십니다. 세례를 받으신 분들은 한 명씩 각자가 받은 빵을 차례로 적셔가며 나누는 모습입니다. 맨 마지막에 신부님이 성찬빵 부스러기를 닦듯이 긁어모아서 성찬잔에 담으시더니, 물을 조금 부어 헹궈서 드십니다. 그리고 행주로 깨끗이 닦아서 뒷설겆이까지 말끔히 마치는 모습입니다. 수도자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또 살아가야 하는지 성찬 미사의 그 한 단면을 통해서 잠시 엿볼 수 있었습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자가 아닌 섬기는 자로 살아가려는 수도자의 삶. 나를 비우고 진리와 빛의 하나님으로 채우려는 삶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온전히 행복한 모습은 아닌가 짐작해봅니다. 누구나 자기에게 주어진 일상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 또한 온전히 행복한 삶일 테고요. 나와 너가 둘이 아니고 하나의 뿌리이기에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더불어 살아가려는 그 마음에 싹 트는 돕는 마음. 그 마음 자리에서 꽃이 피고 사랑의 열매가 맺히는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리고 하던 일을 잠시 멈추어 고요히 머무는 그 마음 자리에서 평온과 사랑과 쉼이 있는 온전한 행복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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