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라 함께 가자!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6)

 

BWV 244 Matthäus-Passion/마태 수난곡

No.17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마태수난곡 1부 30번~32번

마태복음 26:40~46

음악듣기 : https://youtu.be/sAKUNyWOkc0

30(24)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40. Und er kam zu seinen Jüngern, und fand sie schlafend. und sprach zu ihnen:

40.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대사

예수

40. Könnet ihr denn nicht eine Stunde mit mir wachen? 41. Wachet und betet, daß ihr nicht in Anfechtung fallet. Der Geist ist willig, aber das Fleisch ist schwach

40.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42. Zum andern Mal ging er hin, betete und sprach:

42.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대사

예수

42. Mein Vater, ist's nicht möglich, daß dieser Kelch von mir gehe, ich trinke ihn denn; so geschehe dein Wille.

42.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31(25)

코멘트

코랄

Was mein Gott will, das g'scheh' allzeit,

Sein Will', der ist der beste,

Zu helfen den'n er ist bereit,

Die an ihn glauben feste,

Er hilft aus Not, der fromme Gott,

Und züchtiget mit Maßen.

Wer Gott vertraut, fest auf ihn baut,

Den will er nicht verlassen.

나의 하나님의 뜻이 항상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최선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굳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도우시기 위해

항상 예비하고 계십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에서 구하시고

알맞게 바로잡아 주시는 분이시니.

하나님을 믿고 그 위에 굳건히 서는 이를

그는 결코 버리시지 않습니다.

32(26)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43. Und er kam und fand sie aber schlafend, und ihre Augen waren voll Schlaf's. 44. Und er ließ sie, und ging abermals hin und betete zum drittenmal, und redete dieselbigen Worte. 45. Da kam er zu seinen Jüngern und sprach zu ihnen:

43.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대사

예수

45. Ach! wollt ihr nun schlafen und ruhen! Siehe, die Stunde ist hier, daß des Menschen Sohn in der Sünder Hände überantwortet wird. 46. Stehet auf, lasset uns gehen; siehe, er ist da, der mich verrät.

45.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Wachet und betet/깨어 기도해다오!

 

예수는 기도를 하시다가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아가사 같은 내용으로 또 다시 기도하셨습니다. 이러기를 세 번 하셨는데 왜 그러셨을까 궁금합니다. 미리 말씀드리건대, 정답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정답이 아닌 상황들을 먼저 추려내어 보면 어떨까요? 그러다 보면 예수께서 왜 그러셨는지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기도하는지 자는지 제자들을 감시하고 지적하기 위함은 아니셨을 것입니다. 선한 목자 예수께서 마치 야간 자율학습을 감사하는 당직 선생님처럼 행동하셨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다음은 보다 일반적인 해석인데, 바로 제자들의 영적 안일함을 일깨워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게 하는 기도의 능력을 덧입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예전의 저였다면 이것이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거니와 이와 같은 권위자들의 해석에 대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마태 수난곡을 통해 예수를 보다 가까이 알게 되었을 때 저는 예수의 마음에 관심이 생기게 되었고 이런 해석 역시 틀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참 이기적인 것이, 그는 지금 고난의 수렁으로 던져지며 땀이 피처럼 흐르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그 순간에서 조차 우리는 예수를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는 분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지금 예수 앞에 놓인 십자가와 쓴 잔이 그가 감당하기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던가요.

 

예수의 마음

 

어제 현역 군인이신 권사님의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하관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설교를 하신 부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어머니를 항상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시고 희생하는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한 때 온 가족의 기쁨이 되는 아기였고, 꿈에 부풀어 올라 늘 설레 했던 십대 소녀였으며, 아름다운 사랑과 행복을 꿈꾸던 아가씨였으며, 곱게 차려입고 가족들과 여행을 다니고 싶어 했던 중년 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당연한 사실을 잘 모릅니다...” 평소 강직하기 그지없는 천상 군인이요 충성된 청지기의 모습으로만 보였던 권사님은 설교 후에 어머니의 관 위에 흙 한줌을 뿌리면서 ‘엄마’라고 부르며 어린 아이처럼 울먹이셨습니다. 그 모습에 저 또한 눈물이 났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저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주시기만 하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왜 그의 마음에는 그토록 관심이 없단 말입니까? 우리는 교리에 얽매여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만 붙드느라 ‘한 사람’ 나사렛 예수를 외면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우리는 이 물음을 신학적으로 분석하느라 단순하게 예수께서 사랑하는 베드로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 듣고 싶어서 물어 보셨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아무튼, 예수의 마음, 예수께서 지금 당하고 있는 고민과 슬픔, 그리고 십자가의 수난이 임박한 상황을 생각하면 제자들의 영적 안일함을 일깨워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게 하는 기도의 능력을 덧입게 하려고 세 번 제자들을 찾아 오셨다는 것 역시 가능성이 적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으로 좁혀 볼 수 있겠습니다. 예수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기도하는 도중에 제자들을 찾아 다시 오셨다고 말입니다.

 

완전한 사랑이신 예수

 

영적으로 무지했고 육신은 연약했지만 함께 한 제자들은 예수께서 깊이 사랑하신 사람들이었고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앞에 놓인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동역자들의 기도를 필요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기도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기도의 사람 예수는 그 누구보다 더 중보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고난의 길에서 함께 해 주기를(Compassion)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기도는 가장 강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기도는 ‘소망’을 현실로 초대하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함께 하는 ‘사랑’입니다. 십자를 앞에 두고 예수는 너무나 외로우셨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버림받고 배신당할 것이 예수의 가장 큰 아픔이었습니다. 배신감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단절 때문에 아파하셨습니다. 예수는 사랑이셨습니다. 완전히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일방적인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주는 것도 사랑이요 받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완전한 사랑의 일부로서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단절은 그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두 번이나 찾아오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십자가 위에서의 마지막 외침도 육신의 아픔에 의한 절규가 아니라 사랑하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향한 절규였습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셨음에도 완전한 사랑이셨던 그분에게 사랑하는 이와의 단절은 너무나도 큰 괴로움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사랑하는 이들이 가장 깊은 사랑의 대화인 기도의 방식으로 당신과 함께 해 주길 원하셨고 그래서 두 번 씩이나 제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사랑을 모릅니다. 너무나 모릅니다. 고난당하신 예수의 마음도 우린 너무나 모릅니다. 그는 사랑이셨습니다. 그래서 목숨 다해 사랑하셨고, 그래서 사랑 받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것처럼 예수의 사랑도 다 알 수 없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알 만큼 안다고, 받을 만큼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자리에서 여러분의 신앙은 멈추고 퇴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모든 사랑을 끌어들입니다. 사랑하는 예수와 함께 계십시오. 사랑한다고 속삭이십시오. 늘 예수와 연결되어 사십시오. 그것이 그의 고난과 함께하는 길, 그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함께 부르는 코랄

 

두 번째 기도가 끝나고 코랄이 울려 퍼집니다. 이 코랄은 바흐의 시대에 많이 불렸던 것으로 원곡의 텍스트 1절이 그대로 마태수난곡에 실렸습니다. 아마 모든 청중들이 함께 이 익숙한 코랄을 부르면서 겟세마네 기도의 깊은 의미를 감격적으로 되새겼을 것입니다. 이역만리 외국에서 함께 아리랑 부른다거나 독도에서 홀로아리랑을 부를 때처럼 같은 노래도 부르는 곳에 따라 느낌이 달라집니다. 아마 마태수난곡을 듣는 중에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에서 부르는 이 코랄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매우 특별한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 코랄은 루터교 전통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프랑스 작곡가 클로뎅 드 세르미시(Claudin de Sermisy; 1490~1562)의 선율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이 곡이 루터교에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곡의 찬송시를 쓴 알브레히트 공작 때문입니다.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 공작(Albrecht Herzog von Preußen, 1490-1568)은 초대 프로이센 공작이었습니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공식적으로 지지했으며 1525년 로마 가톨릭에서 루터교로 개종하였고 결국 루터교를 국교로 삼은 최초의 국가 군주가 되었습니다. 루터와 종교개혁의 수호자라 할 수 있지요. 그래서 루터교 신자들은 루터만큼이나 알브레히트 공작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가 쓴 찬송시를 코랄로 노래하면서 그를 기억했습니다. 그가 죽은 지 200년이 지났고 루터교는 이제 독일 전역에서 뿌리를 내려 종교, 문화적인 황금기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바흐라는 위대한 음악가가 그 전통 속에서 등장하였고 신앙의 선조들이 깔아 놓은 신앙적 문화적 토양 위에 서양 음악사의 가장 위대했던 순간들을 펼쳐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 바로 마태수난곡이 놓여 있습니다.

 

마태 수난곡에서 코랄은 모든 청중들이 함께 불렀습니다. 그래서 저와 이 여정을 함께 하는 우리 모두 잠간 읽기를 멈추고 우리말로 코랄을 불러 보겠습니다. 최대한 내용을 살리되 음악과 어우러지고 라임을 맞춰 번역해 보았습니다. 자 이제 맨 처음 표에 있는 유튜브 링크로 들어가셔서 코랄이 시작할 때 함께 우리말로 불러 보시겠습니다. 코랄은 1분 40초부터 시작합니다.

 

 

어떠신가요? 아마 음반을 들으면서 직접 불러보신 분들은 느끼셨을 것입니다. 리히터 음반에서 소년들을 비롯한 모든 합창 단원들이 얼마나 깊은 감격과 정성과 열심으로 찬송을 부르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축구도 국가대표 경기를 TV로 볼 때는 그렇게 선수들을 욕하다가 막상 조기축구회서라도 직접 공을 차보면 국가대표급 선수라면 무조건 그 실력을 존중 아니, 존경해야 함을 깨닫게 되지요. 부디 여러분들의 예배 가운데서도 그렇게 힘차고 정성스러운 찬송가가 늘 울려 퍼지기를 원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여러분들에게 그런 마음이 드셨다면 성경과 따로 구분된 찬송가 한 권을 꼭 마련하시기를 권합니다. 성경과 합본된 찬송가는 무거워서라도 들고 부를 수 없습니다. 발성적으로나 마음가짐으로서나 찬송가는 손에 들고 목을 세운 자세로 가슴과 입을 활짝 열고 불러야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빛으로 찬송을 부를 수 있어야합니다. 구원의 감격과, 예배의 기쁨이 어린 눈빛,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 예수와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들과 나의 생명과 나의 삶을 향한 ‘사랑의 눈빛’ 말입니다.

 

예수의 마음으로

 

43절입니다. 두 번째 기도를 마치고 다시 오셨는데 그들이 또다시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는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굳이 변명을 하지 않아도 그들의 연약함을 이해해 주셨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두시고 다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예수는 다시 오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바로 깨우진 않으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이제는 자고 쉬라”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오셔서 제자들을 깨우신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셨던 것 같습니다. 잠 잘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놓고 ‘이제는 자고 쉬라’고 말씀하시진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예수께서는 앞으로 제자들이 겪어야 할 일들을 생각하시며 사랑과 애잔함과 슬픈 눈으로 잠들어 있는 세 제자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파울 들라로슈(1797-1856)作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종이에 연필)

 

 

얼마나 지났을까요? 비비적거리며 제자들이 하나둘씩 눈을 뜨고 일어납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Ach! wollt ihr nun schlafen und ruhen!” 독일어를 아시는 분들은 눈치를 채셨겠지만 우리말 개역개정과 루터성경은 이 구절을 정 반대로 읽고 있습니다. 우리말 개역개정 성경은 ‘이제는 자고 쉬라’로, 루터번역 독일어 성경은 ‘아! 너희가 지금 자고 싶고 쉬고 싶더냐!’로 번역했습니다. 작은 차이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뜻의 문장입니다. 이는 격변화로 인해 어순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헬라어의 특징과 여러 원문에 딸린 문장부호가 통일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각의 성경이 이렇게 완전히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우리말 새번역과, 킹제임스 성경은 전자와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공동번역과 NIV, NASB, CEV, MSG 등은 독일어 루터번역과 같은 의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전체적인 문맥이나 바로 이어지는 46절에서 “일어나라”는 명령이 45절의 “자고 쉬라”는 명령과 모순됨을 들어 그들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굳이 저의 생각을 고집할 마음은 없습니다만, 성서학적인 해석이 아니라 마태수난곡을 통해 새로이 알게 되었고 지금가지 이 순례의 여정을 통해 함께 해 온 예수의 마음을 통해서 해석하자면, ‘이제는 자고 쉬라’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차차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

 

기도를 마치시고 다시 오신 예수는 안타까움과 사랑의 눈으로 제자들을 바라보셨습니다. 이미 그의 기도는 끝났습니다. 그는 수없이 자신을 굴복시키는 기도와 하나님과 인간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품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그의 기도와 그 마침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하나님과 사랑하는 이들과의 단절 앞에서 그토록 몸부림 쳤던 것이지 결코 자신을 팔고 잡고 죽이려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끝났습니다. 이제는 담대하고 평안하게, 자고 쉬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맞이하고 계십니다.

 

또 하나, 인지상정에 따라 사랑하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면 보통 ‘좀 더 자’라고 속삭이며 이불을 다시 덮어 줍니다. 저는 요즘 사랑하는 가족들과 떨어져서 지내고 있습니다. 365일 5시 새벽기도를 지키는 전통 있는 교회에서 사역하는데 기도 시간의 은혜가 너무나도 귀합니다. 월요일 새벽기도를 마치고 가족이 있는 집으로 올라가 쉬는 날을 보내고 화요일 새벽 3시 30분에는 다시 교회로 출발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가족과 있고 싶고 고속도로 통행료를 절약하고 교통체증을 피하기 위함이지요. 그 시간이 되면 맞벌이를 하는 아내가 피곤함을 무릅쓰고 알람을 맞추고 함께 일어나 저를 배웅합니다. 처음 몇 주를 그렇게 하다가 늘 잠이 모자란 아내를 깨우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미안해서 울리기가 무섭게 알람을 얼른 꺼 주고 조용히 나갑니다.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기도할 때와 기도를 살아낼 때

 

이미 예수는 기도로 승리하셨습니다. 육신으로는 여전히 두려웠지만 영으로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셨습니다. 깨어 기도할 시간은 지금이 아니라 아까 함께 깨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실 때였습니다. 기도는 그런 것입니다. 기도를 간절히 해야 할 때가 있고 마음과 영으로 품어서 삶 가운데로 나갈 때가 있습니다. 기도가 끝났고 영접이 되었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들고 다시금 기도를 마음에 녹여내어 삶으로 행동으로 의연하게 나아가야합니다.

 

 

모든 번역본과 마찬가지로 헬라어 원문에도 ‘이제는’라는 의미의 ‘로이폰’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제는(nun)’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는’ 함께 깨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하셨다면 ‘이제는’ ‘기도가 끝났으니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의연함과 평안함 가운데 잠자고 쉬듯 십자가의 길, 인간 구원의 길로 나아가자’ 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이유를 통해 저는 루터나 공동번역의 번역보다는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을 지지합니다. 이는 물론 성서학을 제대로 공부하지도 못한 저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루터성경과 공동번역 성경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번역입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 마다 루터성경으로 본문을 비교하고 특히 공동번역 성경의 시가서 부분을 너무나 사랑하지요. 감히 훌륭한 성서학자들과 루터의 뜻을 반박하는 것 같아 민망한 마음이지만 마태수난곡을 통해 알게 된 나의 예수는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지금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느냐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Stehet auf, lasset uns gehen! 일어나라, 함께 가자!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마 저 멀리 아래에서 횃불 여러 개가 줄지어, 마치 한 마리 커다란 뱀이 꿈틀대듯 올라오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마치 전쟁터에 선봉으로 서는 장수처럼 예수는 일어나 말씀하십니다. 이는 십자가와 구원의 길의 동행자요 증인으로서 제자들을 초청하신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삶의 무게가 너무나도 고단하여 지치고 쓰러질 때, 내 삶의 자리에서 신앙을 지켜 내기가 너무나도 버거울 때, 하나님과 인간을 향한 예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한 채 폄훼하고 죽이려하는 무리들의 행렬을 마주할 때, 예수의 이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Stehet auf, lasset uns ge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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