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관의 노래 신학(9)
소리
홍순관 글 곡
- 1990년 만듦, ‘춤추는 평화’ 음반수록 -
꽃이 열리고 나무가 자라는
그 소리 그 소리
너무 작아
음∼∼
나는 듣지 못했네
이 노래에 글을 쓰고 곡을 진 시간은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이 곡을 제 몸에 오래 품고 있었나봅니다.
이것은 무언가 도모하고 이루려는 꿈과, 자연을 스승삼아 기다리는 인내가 가슴과 머리에서 맞서고 있을 때 만들어진 글입니다. 일상의 물결과 바다가 만나지는 심정이라고 할까요.
‘소리’는 개인적으로 큰 화두였고 숙제였습니다. 성서 안, 잠언 말씀을 만나 더욱 그렇게 되었습니다.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언 21:13).
이웃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정작 자신의 소리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귀를 막고 듣지 않으신다면, 이 시대의 부르짖는 소리(기도)들은 어디로 갈까요.
뭇 인생의 한 가운데로, 역사의 한 복판으로, 말없이 걸어가시는 그 분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옵니다. 걸음걸음 고뇌에 찬 고운 숨소리가 들려옵니다. 종교가 진리에 귀를 닫고 정치가 백성의 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강대국이 약소국가의 한숨에 귀를 막는다면 이 세상은 종말을 향해 치닫게 됩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을 향해 자연이 탄식하는 소리도 들어야 합니다. 준엄한 역사가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예시의 지혜와 묵시의 소리에 겸허한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귀를 닫는 것은, 마음을 닫은 까닭이요,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듣지 않으려는 무관심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나이 서른에 요절한 시인 기형도는 ‘소리의 뼈’라는 시를 썼습니다. 아주 매력적인 시입니다.
김 교수가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학설을 발표하고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아 신청했다. 그러나 김 교수가 한 학기 내내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자 제각기 일가견을 피력했다.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그것은 ‘침묵’이라고 했다. ‘숨은 의미’라고 보는 이도 있었다.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도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고 한 이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묵살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그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더 잘 듣게 되었다. - 기형도 <소리의 뼈>
개미가 지나가는 소리나,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는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너무 작고 너무 큰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어리석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꽃은 열리고 나무는 자라납니다. 역사는 흐르고 성령은 움직이십니다. 마음과 영혼의 귀가 열렸을 때, 우주를 운행하시는 그 분의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부러운 마음으로 자연이 일하는 소리를 들어봅니다. 지나가는 바람을 구경합니다. 어떤 일을 이루고 사라지는 무심함의 경지는 쉽지 않습니다. 시치미를 떼며 실천하는 즐거움이 일상일 때 비로소 신자가 될 것입니다.
홍순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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