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관의 노래 신학(10)
낯선 땅 여기는 내 고향
(원제:케이세이선)
이정미 글 · 홍순관 개사
이정미 곡 (‘춤추는 평화’ 음반수록)
1. 무겁게 고인 강물 일렁이는 기차소리 그림자 드리우며
오늘도 달린다 낮은 철교위로 달려 가네
슬픈 케이세이선 어디로 달려가나
고향 떠나 모르는 낯선 땅으로 에헤이요 에헤헤이요
2. 강 건너 부는 바람 그리운 고향냄새 여기는 어디인가
흐르는 세월 속에 희미한 고향 얼굴 떠오르네
슬픈 케이세이선 어디로 달려가나
강 건너 저편에 바람만 불어 오네 에헤이요 에헤헤이요
3.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 굽이굽이 아리랑 고개
넘고 또 넘어서 아라가와 강물 속에 비친 얼굴
슬픈 케이세이선 어디로 달려가나
낯선 땅 여기는 바로 내 고향
나 이제 돌아가리 그리운 내 고향
낯선 땅 여기는 바로 내 고향
한 아이가 일본 땅에서 태어납니다. 이 아이는 한국아이였습니다.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모들은 일본 땅에서 거주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아이는 엄마 나라에서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땅 일본이 ‘낯선 땅’이 되었지요.
아이가 자란 곳은 아라카와 강이 있는 근처였습니다. 그곳은 관동대지진 때 많은 조선인이 묻힌 비극적인 장소입니다. 이곳으로 철길이 지나가는데 바로 케이세이선(경성선京成線)입니다. 니뽀리에서 나리타로 가는 긴 철길이지요.
<"JNR C11 289 on Tadami line" by BehBeh. Wikimedia Commons.>
아이는 지나가는 기차를 보며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었을 것이요, 강 건너 불어오는 바람으로 향수를 달랬을 것입니다. 아이는 세월이 많이 흘러 엄마나라인 조국 대한민국을 방문합니다. 그러나 엄마나라가 그만 ‘낯선 땅’이 되고 맙니다. 어른이 될 때까지 일본 땅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면 인간이 사는 이곳 지구촌은 ‘낯선 땅’인지도 모릅니다. 길게 보아 백 년을 사는 인간의 수명입니다. 쏜살같지요. 흐르는 강물 같습니다. 다름 아닌 이내 지고 마는 꽃이지요. 노인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눈 깜짝할 사이가 평생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지나가는 인생입니다.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인생입니다. 하여 어디든지 낯선 땅일 수밖에 없습니다. 해서 낯선 땅을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인지, 아니면 엄마나라처럼 고향처럼 따뜻하게 만들 것인지가 장엄한 자유요,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김 준태 시인의 ‘고향’이란 시가 있습니다.
고향에선-
눈 감고 뛰어도
자빠지거나 넘어질 땐
흙과 풀이 안아준다.
교회가 흙과 풀이 되어 이웃을 안아준다면 그들의 고향이 되겠지요. 교회가 흙이요, 신자가 풀이어야 합니다. 내 이웃들이 눈 감고 뛰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안길 수 있는 집이어야 합니다. 그들이 겪는 고통과 아픔에 동참할 때 그곳은 ‘고향(하나님 나라)’이 됩니다.
그것은 인간이 수렁에 빠지고 벼랑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결국은 그분께서 품 안에 안고 계신 것과 같습니다. 이 ‘낯선 땅’ 지구촌에서 그 분의 나라를 맛볼 수 있다면 우리는 신자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기’가 바로 ‘고향’이 되는 것입니다.
홍순관/가수
'홍순관의 '노래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의 말 (0) | 2015.03.17 |
---|---|
또 다른 숲을 시작하세요 (1) | 2015.03.11 |
소리 (0) | 2015.02.25 |
대지의 눈물 (0) | 2015.02.19 |
푸른 춤 (0) | 2015.02.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