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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노란 유채꽃과 노란 리본

by 한종호 2020. 4. 16.

신동숙의 글밭(130)


노란 유채꽃과 노란 리본


노란 유채꽃이 한껏 노랗게 피어나는 4월의 봄날에, 노란 리본을 달았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환해지는, 수학여행길에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마음을 마음으로 떠올리다 보면, 깊은 바다 속에서도 봄이 피어오를 수 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바다의 그 깊이 만큼 하늘의 그 공평한 햇살은 깊이 내려가서, 바다도 하늘도 더불어 푸르고 따스한 봄날이기를 기도합니다.


마지막까지 학생 곁을 떠나지 않은 자애로운 선생님이 엄마처럼 함께 계셨기에. 식어가는 친구의 몸을 친구와 친구가 서로를 꼭 끌어 안으며 형제 자매처럼 함께 있었기에. 함께 걸었을 생의 그 마지막 길에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피를 나눈 가족처럼 다 함께 있었기에.


제 프로필 사진에 노란 리본을 달던 날, 시를 적기 시작하였습니다. 지우고 또 고치고 내리 이틀을 세월호 304명의 목숨들과 함께 숨을 쉬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완성한 듯한 시를 결국 수장하고 말았습니다. 그 옛날에도 그랬습니다. 아프게 적었던 시는 한 번도 세상 밖으로 나온 적이 없습니다. 시를 쓴 제 자신 조차도 이제는 내용을 모릅니다.



내 안에 출렁이는 바다에는 그들을 위해 건져 올릴 단어가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밀려드는 무력감에 몸도 마음도 식물인간이 된 것 같았습니다. 만약 글에도 숨이 있다면, 숨이 멈추고. 글 한 자 쓸 수 없는, 깊은 잠이 일상을 뒤덮은 듯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 뉴스와 그날의 뉴스가 뒤범벅이 되면서, 높은 해일처럼 제 몸을 뒤덮은 듯했습니다. 슬픔과 아픔과 탐욕과 거짓과 부조리와 일말의 양심과 책임과 진실이 뒤섞인 짠 바닷물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 그렇게 제 안에 바다에서는 세월을 모르고 멈춘 듯했습니다. 하지만 자연 속에 흐르는 세월은 그 숨을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강변에는 벚꽃이 흩날렸고, 꽃잎 진 자리마다 연둣빛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연분홍빛이 털어낸 빈 하늘을 노란 유채꽃이 채우기 시작하였습니다. 민들레, 제비꽃, 꽃마리, 튤립, 철쭉, 유채꽃, 수수꽃다리 4월의 꽃들이 아무리 채워도 푸른 하늘 품은 여전히 넉넉하기만 합니다. 



제 자신도 한동안 바다에 잠겨 있다가 어디서 힘이 났는지, 헤엄을 치듯 미세한 몸짓이나마 파동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4월의 강변에 피어나는 꽃들과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이었습니다.


책꽂이에 꽂혀 있으면서도 펼친 적 없던 <수필>을 수수꽃다리 꽃잎처럼 펼치었습니다. 초점을 잃었던 제 두 눈이 서서히 글줄을 비추기 시작하였습니다. 깊은 바닷 속으로 곧은 햇살을 비추듯 점점 더 깊이 비추려 하였습니다. 


인공호흡을 하듯 멈춘 숨에 푸른 숨을 불어 넣으려, 글줄을 따라서 한걸음 한걸음 좁다란 산책길을 따라서 천천히 걸었습니다. 닫혀져 있던 무거운 가슴으로 푸른 하늘이 봄햇살이 들어옴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짐과 따스함입니다.


문득 4월의 차가운 바다가, 이 생의 마지막 숨에게는, 이 땅에 맨 처음 생명을 잉태한 자궁의 평온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붉은 아침해처럼 떠올랐습니다. 살아 있는 자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 깊은 바닷 속 마지막 숨을, 그 곱디 고운 청춘들의 마지막 숨을 거둔 바로 그 순간 만큼은, 깊고 푸른 바다가 자애로운 엄마의 품이었기를. 


살아 있기에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수많은 이들의 따스한 가슴에 피운 노란 리본이 노란 유채꽃과 무엇이 다를까 싶은 그런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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