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124)
단단한 흙밭에 호미질을 하다가
이웃에 두 평 남짓 화단이 있습니다. 시멘트와 벽돌로 담을 두르고 마사토를 쏟아 부워서 만든 작은 공간입니다. 로즈마리, 라벤더, 페퍼민트, 애플민트 등 각종 허브 모종을 한 뼘 남짓 간격을 두고 심은 곳입니다. 그리고 화단의 가장 먼 둘레에는 꽃을 볼 작은 묘목 대여섯 그루를 심었습니다. 이렇게 작년 여름에 만들어 두고는 하늘만 믿는 천수답처럼 알아서 크겠지 하고 무심히 겨울을 지났습니다.
문제는 애초에 쏟아 부은 마사토의 높이가 울타리보다 높다는 점입니다. 비가 뜸하다 싶은 날 호수로 마른 흙밭에 물을 주면, 흙으로 스며 드는 양보다 밖으로 흘러 내리는 양이 많아 보였습니다. 입이 짧은 딸아이를 볼 때면 애가 타는 마음 같습니다. 때때로 교만으로 높아지려는 제 마음에도 가운데가 움푹 낮아져 눈물이 고이는 자리를 내고 또 내려 합니다. 교만함은 이득보다는 손해를 보는 경우의 수가 더 많음을 이제는 경험으로 아는 나이가 됐는가 싶어 가슴께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갑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는데, 줄기는 말라 보이고 겨우 가지 끝에 피운 잎도 야위어 보입니다. 안되겠다 싶어서 점심밥을 먹고 난 후 호미와 모종삽과 고무장갑을 챙겨서 친정 엄마하고 일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밖으로 돌던 몸이 집 안에 머물게 되면서 보이기 시작하는 소소한 집안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집니다. 다들 집에 머물면서 뭘하고 있을까 하고요.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들 그런 마음이신지 더러 전화가 걸려 오기도 하고, 전화를 걸고 싶은 얼굴들을 달처럼 별처럼 떠올려 보기도 하면서 하루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화단 중간에 쪼그리고 앉아서 허옇게 마른 흙을 호미로 푹푹 팠더니, 속에 부드러운 흙이 울컥 토하듯 숨을 쉽니다. 가운데 높은 흙을 퍼 담아 옮겨서 낮은 가장자리에 둑처럼 쌓았습니다. 새로운 울타리를 두르 듯 흙을 쌓아서 둑을 만들었습니다. 어릴 적 모래 놀이터에 앉아서 하염없이 쌓고 허물고 또 쌓던 모래 언덕처럼 모래 터널처럼 모래 물길처럼.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허무시는 손길을 따라서 한없이 낮아지려는 마음으로 낮은 숨을 쉽니다. 한 점까지 낮아진 숨에 고요함이 머물면 한 순간 세상은 맑고 평온하게 보입니다.
이제는 물을 주면 밖으로 흘러 넘치지 않고 뿌리가 물을 머금도록 묘목을 중심으로 사이 사이 낮게 골을 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밭에 일꾼 지렁이가 하는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흙을 먹고서 흙을 길게 토해 내며 흙에 숨구멍을 내는 지렁이의 삶. 제가 쪼그리고 앉아서 호미질로 하고 있는 일이 지렁이가 하는 일들이 아닌가 하고요. 지렁이와 벌레 작은 생명들이 살지 않는 흙이란 이렇게 척박하고 단단해져 숨 조차 쉴 수 없구나.
봄비가 내린 후 강변에 아이들 새끼손가락 굵기만한 지렁이가 보이면 몇 마리 데려다가 풀어 놓자고 웃으며 얘기했습니다. 비가 그친 후 강변을 산책하다 보면 지렁이가 종종 눈에 띕니다. 징그럽기보다는 언젠가부터 지렁이가 고맙고 소중하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한결 넉넉해졌습니다. 우리집 마당에 저절로 자란 페퍼민트와 돌나물과 수국과 꽈리를 몇 뿌리 뽑아다가 한 뼘 간격을 두고 빈 곳에 옮겨 심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르고 단단한 가슴엔 스며들지 못하는 은혜를 생각하면서, 눈 앞에 보이고 만져지는 단단한 흙에 호미질을 하는 일은, 마음을 벼르는 일 못지 않게 개운한 일이 됩니다. 날이 갈수록 마음과 몸이 하는 일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마음을 지키라는 말씀이 해처럼 빛납니다.
더러 말씀을 들을 때면 양심에 폭폭 찔립니다. 단단한 가슴에 호미질을 하듯 진리의 말씀은 호미날 같습니다. 그렇게 폭폭 찔리고 움푹 패이고 부끄러운 듯 마침내 부드러워진 마음의 골마다 꽃씨를 심자고 했습니다. 온라인 동영상으로 듣는 주일 말씀이 또한 날이 선 호미날처럼 쟁기날처럼 그리고 뿌려지는 꽃씨 같습니다. 무심히 단단해지려는 제 마음밭을 일구시는 보이지 않는 손길을 떠올리며, 고마움에 그리움에 봄비처럼 눈물이 내립니다. 낮아진 마음밭에 눈물이 빗물처럼 고이다가 넘쳐 흘러 좁은 물길이 나면 세상으로 흘러가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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