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140)
언양 석남사, 마음의 결을 빗는 산책길
옆 마을에 사는 벗님이 우리 마을에 왔습니다. 그냥 같이 길을 걸으려고 온 것입니다. 걷다가 배가 고프면 눈에 띄는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되고, 또 걷다가 쉬고 싶으면 조용한 찻집에 앉아서 차를 마셔도 되는, 걸어도 걷지 않아도 좋을 다정한 산책길입니다.
예정했던 태화강변길은 오늘따라 늦봄과 초여름 사이의 햇살이 더워 몸에 땀이 배일 거 같아서, 걷기로 정한 곳이 언양 석남사로 가는 숲길입니다. 누구 하나 숨 가쁘게 걷지 않아도 되는 길. 서로의 말소리가 들릴 만큼의 빈 하늘을 사이에 두고 얼마든지 자유로이 걸어도 좋을 넉넉한 산책길입니다.
소나무의 새순이 싱그러운 산길, 아침 골목길에 본 냉이꽃이 우리보다 먼저 와 기다리는 산길, 여기서도 제비꽃이 꽃 중엔 작은 산길, 외진 응달에도 이끼가 푸른 산길, 높이 뻗은 연두빛 새순 사이로 듬성듬성 보이는 하늘을 머리 위에 이고 걸어도 무겁지 않은 산책길입니다.
새순마다 살이 올라 언뜻언뜻 더운 햇살을 가려주는 석남사의 숲 속 길은 한 여름에 걸어도 등에 땀이 배이지 않는 길입니다. 절로 오르는 오솔길을 따라서 우리는 오르고, 계곡물은 자꾸만 내려갑니다.
오르는 길이라도 숨이 가슴 위로 차오르지 않도록 조율하는 느리고 느긋한 발걸음입니다. 걸음마다 몸에 붙어 있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숨길마다 몸에 숨어 있는 긴장을 풀어놓기에 좋은 석남사 숲길입니다.
혼자서 사색하기에 그리고 둘이서 말을 나누기에도 좋은 숲길을 걸으며 마음의 결을 빗습니다. 한결같은 소나무가, 살랑이는 연두빛 새순이, 별스럽지 않은 산바람이, 오래된 계곡물 소리가 마음의 결을 자꾸만 빗어줍니다.
자연의 손길이 아무리 슬고 빗어도 마음의 결은 상하지 않기에. 문득 이런 자연을 빚어 놓은 손길이 궁금해집니다. 계곡의 물이 돌을 슬며 쉼없이 흘러 순한 돌로 빗듯이, 산은 제 모난 마음의 결을 자꾸만 순하게 빗어줍니다.
산길을 걷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란, 두 다리를 움직여 걸어가는 거룩한 일입니다. 걸음마다 뜬 눈으로 햇살을 비추듯 자연의 벗들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일.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제가 해 줄 수 있는 일도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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