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142)
권정생 <강아지똥>은 한국 자주 독립의 국보입니다
독립, 나라가 스스로 서는 일, 한국은 8·15 해방으로 독립을 맞이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나 스스로 서지 못하였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애통하게 여긴 바, 스스로 독립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945년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미국이 일본을 굴복시키기 위해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한 것이 한국의 해방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 후로 77년 생인 저의 개인 성장기에 비추어 보아도 한국은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후, 흔들리고 넘어지면서도 스스로 바로 서기 위하여 부단이 걸어오고 있는 지금도 순례의 길 위에 있습니다.
제가 살던 부산, 옆집에는 장난감이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본 동화책 전집의 색색깔 그림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전집은 30여 년 뒤인 우리집 큰 아이의 책장에도 꽂혀 있게 된 여전히 동화책의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이 하나도 바뀌지 않은 디즈니 시리즈입니다. 백설공주와 신데렐라와 아기코끼리 밤비의 그림들은 예전 모습 그대로입니다.
1980년 대 일요일 아침과 평일 저녁에 텔레비젼을 틀면 나오던 만화영화 주제곡은 아직도 부를 수 있습니다. 아톰, 마징가Z, 들장미 소녀 캔디, 은하철도 999, 미래 소년 코난, 메칸더V, 개구리 왕눈이, 바람돌이, 빨강 머리 앤, 플란더스의 개가 일본의 만화인 줄은 한참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동생들은 피카츄, 토토로, 헬로 키티를 좋아하더니 스무살이 넘어서도 추억합니다.
제 어린 시절의 동화, 동요가 온통 미국과 유럽과 일본의 번안·번역본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한글로 쓰여졌지만, 정신적으로 토착화 된 문화가 아니었습니다. 한국의 산과 들과 흙보다는 파랑새를 쫓던 먼 나라의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긴 시절이 있었습니다. 텔레비젼에 나오는 예능들은 일본을 따라가기에 급급했습니다. 해방 이후 불과 20여 년 전까지의 체험들입니다. 문화 식민지 시절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똥>이 제1회 기독교 아동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1969년에 출판이 되었습니다. 비로소 한국의 동화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안동의 외진 시골 마을 조탑리까지 권정생 선생님을 찾아가신 이오덕 선생님이 계십니다. 허름한 양복에 낡은 가죽 가방을 한 쪽 어깨에 매시고, 기차와 버스를 갈아 타면서 산길과 들길을 투박하게 걸어서 다니시던 이오덕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본 듯 독립 투사의 모습처럼 그려집니다. 해방은 되었으나 사상과 정신적으로 스스로 서지 못하는 나라의 설움이 그를 움직이게 하였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이오덕 선생님은 그의 장남에게 권정생 선생님을 소개하기를. "안동에 가면 국보가 있다." 법정스님은 그의 저서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화 작가는 권정생이다." 권정생이라는 이름자처럼 한 사람의 바른 삶이 씨앗이 되어서 얼마나 많은 바른 일들을 하였는지, 그를 통한 은혜가 마르지 않는 샘물입니다. 권정생은 어둔 세상, 어둔 가슴에 별이 된 이름입니다.
<강아지똥>은 한국의 동화 출판업계의 베스트셀러 1위입니다. 2위, 3위가 외국의 번역·번안본인 것입니다. 막대한 외화가 외국으로 흘러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우리의 산과 들과 흙 뭍은 가난한 어머니와 아버지를 부끄럽다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큰 잘못입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세련된 서양식 옷차림과 신식 건물과 세련된 옷차림의 등장인물들을 우월하다 그린 사람은 분명 정신적으로 독립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한국에 <강아지똥>이 없었다면, 권정생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해집니다. 권정생 선생님이 적으신 글은 낙서 한 장이라도 보물처럼 여겨 세상의 빛을 보게 하신 이오덕 선생님은 교사들의 스승입니다. 탄광 마을의 교사 임길택 선생님은 모든 우는 아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임길택 선생님은 저의 좋은 벗인 시노래 가수 박경하님의 5학년 담임 선생님이셨다고 합니다. 탄가루에 하늘마저 아프던 어린 시절에 임길택 선생님의 시 수업이 희망이셨다고 얘기합니다. 오늘날 시노래의 뿌리가 되어주신 임길택 선생님의 삶과 동화와 동시는 지금도 마르지 않는 샘물입니다.
감사하게도 작곡가 백창우 선생님이 국보 같은 세 분의 시와 글에 곡을 입혀 <노래 상자>를 만드셨습니다. 권정생 <바보처럼 착하게 서 있는 우리 집>, 이오덕 <노래처럼 살고 싶어>, 임길택 <나무 꼭대기 까치네 집>. 저 역시 자녀들을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내 놓고, 혼자서 집안 일을 하며 권정생 선생님의 <바보처럼 착하게 서 있는 우리 집>을 들으며 맑고 따스한 눈물을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지인 두 분께 선물을 해드린 후 정작 제가 갖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인터넷으로 사려다가 박경하 선생님과 함께 헤이리 예술 마을에 있는 백창우 선생님의 <개똥이네>에 가게 되는 날 같이 사기로 언약하였습니다.
저희 집에 두 자녀의 태교로 들었던 클래식과 서양의 영향을 받은 동요와 가곡들이 전부인 줄 알았다면, 저 또한 지금껏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지금보다 더 헤매었을 것을 생각하면 아찔해집니다. 작곡가 백창우 선생님이 곡을 입히고, 굴렁쇠 아이들이 노래를 하여 발굴한 아름다운 한국말의 동요와 동시들이 한보따리가 됩니다. 백창우 작곡의 <예쁘지 않은 곳은 없다>, <딱지 따먹기>, <맨날 맨날 우리만 자래>, <또랑물>, <꽃밭>, <우리반 여름이>를 외울 정도로 들으며 두 자녀의 유년기를 지나올 수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암흑기에도 한글을 지키는 일은 한국의 얼, 정신을 지키는 일이 되었습니다. 외솔 최현배 선생님의 <한글은 목숨>, 일제강점기에 윤동주 시인이 한글로 시와 글을 적는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은 자주 독립의 의미가 됩니다. 법정스님은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 태어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한국의 자연과 한글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저에게 한국의 산과 들, 자연과 한글은 다석 류영모 선생님이 얘기하신 참나, 얼나, 성령, 제 안의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길과 지도가 됩니다. 어릴적 귀에 익은 말 중에서 어린 아이들을 부르기를 '얼라'라고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의 한글은 캐면 캘수록 빛나는 보물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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