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76)
시절인연
인우재에 있는 화장실은 자연에 가깝다. 통을 땅에 묻어 사용하는, 재래식이다. 통이 차면 차가 와서 통을 비워야 하는, 이른바 푸세식이다. 화장실은 통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벽은 더욱 그렇다. 목제를 켜고 남은 죽대기로 벽을 둘렀다. 숭숭 바람이 통하고 햇빛도 통한다. 아랫집을 짓기 전까지만 해도 화장실에 앉아 앞산을 바라보는 호사를 누렸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는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인우재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죽대기 사이로 바깥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화장실 바로 옆에는 여물통이 있다. 쇠죽을 담아두던 낡은 통을 그곳에 두고 이것저것 눈에 띄는 대로 담아두었다. 동네 집을 헐며 나온 기와, 인우재를 오르내리며 만난 사기그릇 조각들, 버리기에는 아깝고 따로 보관하기에는 어색한 것들을 여물통에다 담아 두었던 것이다.
여물통 안에는 손잡이가 깨진 황토색 찻잔이 있었는데, 따뜻한 햇볕과 온도 때문인지 거미 한 마리가 찻잔 위에 올라가 있었다. 개미 아닐까 싶은, 작고 까만 거미였다. 화장실에 앉아 구멍 난 벽 사이로 깨진 찻잔에 올라앉은 거미를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서로 만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것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만나고 있는 기가 막힌 만남, 이런 걸 시절인연이라 하지요, 한 수 가르쳐 주듯 잠시 뒤 거미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렇지 않은 만남이 어디 따로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지는 만남은 당연한 것이라고는 없는, 오직 신비와 신비만이 가득한 만남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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