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10)
한국교회와 샤머니즘(2)
지금까지 좀 지루하게 무당을 중심으로 그들이 행하는 샤머니즘이라는 종교 행위의 핵심 구조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자, 그렇다면 지금은 우리의 본디 주제였던 한국교회와 샤머니즘과의 관계에 대해서 되짚어 볼 시간이다. 특히 부정적 의미로 종종 언급되던 한국교회의 샤머니즘화에 대하여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보자. 여기서 우리는 이미 기복이라는 열쇠말 하나를 찾아내고 있었다.
“한국교회의 기복적 특징은 한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을 이루는 샤머니즘으로부터 연원한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편하게 내리는 결론일 것이다. 샤머니즘이 가지는 기복행위가 교회에 영향을 주어서 교회의 본질을 훼손해 버렸다는 어떻게 보면 면피성 진단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좀 꼼꼼히 새겨야 할 부분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한국인의 기층적 종교심성’이라는 개념이다. 종교학자로서 나는 도대체 이러한 거대담론, 혹은 이념적 정의가 왜 이토록 반성 없이 사용되는지 무척 의아하다. 한국인 모두가 그 심리적 뿌리에 무교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이념적 선언’이지 검증적 언어는 아니다. 솔직히 이런 유의 정의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매우 세심하고 조심스런 접근과 관찰, 그리고 연구가 필요할 텐데 우리는 쉽게 커피숍에서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공공의 영역에서 너무도 쉽게 공시한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한국에 수없이 많은 외래 종교들이 들어왔지만(불교, 유교, 기독교) 끝끝내 그들 종교와 습합하여 살아남은 것이 바로 샤머니즘이라고까지 당당하게 진단하기까지 한다.
과연 그럴까? 그분들께 묻고 싶은 것은, ‘그렇다면 현 우리 옆에서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무교라는 종교 현상이 과연 저 옛날 이 한반도에 있었을 것이라 여겨지는 미지의 그 어떤 샤머니즘의 직계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이다. 한국의 무교라고 하는 것이 앞서도 밝혔듯이 지극히 개인적 종교생활 구조를 보이고 있는데, 태고의 전통을 잇고 있는 후손이라는 과감한 발언이 나오는 토대는 과연 무엇인지 나는 묻고 싶다. 일단 이 문제는 그냥 짚고 넘어가자. 게다가 예서 진지한 토의를 하기에 이 문제가 갖고 있는 예민함은 우리 논의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가.
다시 우리 문제로 돌아와 과연 무교는 기복적이고 그것은 또한 부정적인가,라는 문제에 좀 더 매달려 보자. 한국 사회에 만연된 샤머니즘 행위는 끊임없이 과잉기복, 혹은 잉여기복을 조장하고 있는가? 정말로 무교의 종사자들, 무당, 백수, 심방 등은 끊임없이 넘쳐나는 기복을 자신의 의뢰자들에게 강요하고, 또 그로 인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반인륜적 파렴치한들인가? 그들의 기복행위는 한국교회의 신앙 행태를 변화시킬 정도의 부정적인 요소를 참으로 지니고 있는가?
이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보다 무교를 객관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종교학자들과 인류학자들, 그리고 민속학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기존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던 무교의 신앙이 ‘기복적이다’라는 생각을 실제로 무교 신앙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살펴보게 되면, 그 판단은 전혀 다른 결과와 해석을 기다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무교에서 말하는 기복은 문제를 가진 이의 해결을 기원하는 것이지, 분에 넘치고 도를 지나치는 ‘재물의 축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종교의례로서 굿을 하거나, 공수를 받고, 또 점술행위를 하는 의뢰인 대부분은 다만 그들이 처한 실존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일단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는 것에 전념하지, 그것을 넘어서는 축재에는 큰 관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기에 기복을 개인주의적 축재나 그 이상을 넘어서는 이기적 행위의 연장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시도는 기실 무교적 신앙행태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 편견이 만들어낸 ‘작위적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런 편견적이고 단견적 시각으로부터 해방된다면, 우리는 사회 속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무교라는 한 종교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기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부 한국교회에서 보이는 기복 신앙의 원흉처럼 인식되던 샤머니즘에 대한 시각은 어느 정도 교정되어야 할 성질의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말썽을 일으키는 무당이나 의뢰인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특수 상황 말고 샤머니즘, 혹은 무교라고 하는 종교현상의 일반적 구조를 놓고만 이야기 해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역시 부정적 현상은 일부 교회에서도 반복되는 일이지 않는가.)
상황이 이 정도에 이르면 이제 우리는 한국교회가 보여주는 틀어진 신앙의 문제점에 대한 진단을 새롭게 내릴 필요가 있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극히 부정적이고, 억압과 해체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던 샤머니즘에 대한 한국교회의 정형화된 시각도 어느 정도 교정되어야 할 단계에 왔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한국교회에서 나타나는 왜곡된 신앙행태의 문제점에 대한 뚜렷한 진단을 손쉽게 내리기는 곤란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보여준 무교적 기복주의라는 진단은 기존의 샤머니즘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성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왜곡현상만을 가지고 언급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나 정확한 진단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외형적 모습만을 가지고 그것의 본질을 쉽게 재단해서도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솔직히 한국교회는 편한 마음으로 샤머니즘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 혹은 희생타로 이용해 왔음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앞서 언급한 <뉴욕 타임즈>의 기사에 좀 더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개화되고, 문명화되고, 심지어 정보화에도 앞서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 오히려 샤머니즘이 더욱 성행하고 있다는 이 엄연한 현실. 이것이 우리 사회와 한국교회에 웅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문제 앞에 오히려 한국의 샤머니즘은 한국 교회로서는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타산지석의 대상으로 삼아야할 것이 되고 있다.
<뉴욕 타임즈>의 기사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양 순임이라는 60세 먹은 한 무당은 한 달에 3일 정도 밖에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의뢰인이 넘쳐나고, 또 이전과 달리 굿과 무업도 숨길필요 없이 떳떳하게 드러내놓고 한다고 한다. 하나의 소략한 사례이긴 하지만, 이 말은 여전히 많은 수의 한국인들이 무당과 샤머니즘을 통해서 그들의 종교적 욕구, 혹은 삶의 문제를 해결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무엇이 이러한 현실을 가져오게 하는 것일까?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부정적 손가락질을 해대며 극복과 폄하의 대상으로 삼는 샤머니즘이 다른 한쪽에서는 오히려 많은 이들의 관심과 의뢰받는 중요한 주체가 되고 있는 것일까?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진지한 숙고와 반성이 자리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한국교회의 샤머니즘 이해는 여전히 작위적이고, 편파적이고 혹은 오해의 영역에 있다 할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샤머니즘이 보이는 부정적 장면이 아니라 긍정의 그림들이다. 그것들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이해의 자세가 문제를 푸는 고갱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서 잠시라도 문제 해결의 길을 제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무당들의 지속적 영성훈련에 집중하시라. 실상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도 그 연원은 무속인들의 치성致誠에 기인한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매순간 신령과의 교감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의 경주를 다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명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찾아오는 의뢰인에 대한 철저한 공감대 형성에도 최선을 다한다. 심지어 사이코드라마의 역할극처럼 그들은 종교의례 속에 의뢰인들과 동화되어 그들이 가지고 온 문제를 풀고 조화를 꾀하는 행위도 마다치 않는다. 그것은 그들 마음속에 의뢰인에 대한 기본적 동류의식이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히려 현대 한국인들은 한국교회보다 무당들에게서 더 예민한 종교적 영성과 자신들에 대한 공감대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이 지속적으로 그들을 샤머니즘의 마당으로 불러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현장 가운데에서 여전히 한국교회는 샤머니즘은 나쁘고 버려야 할 그 무엇으로 쉽게 진단내리며 정작 샤머니즘의 부정적 그림만을 닮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해와 오해의 갈림길에서 이제 결심을 내려야 할 주체는 바로 한국교회라 할 것이다.
이길용/종교학,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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