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502)
조율
글을 통해 음악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도사님이 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면 음악이 새롭게 다가온다. 오늘 아침에 대한 글도 그랬다. 나는 사라 오트라는 피아니스트를 모른다. 하지만 전도사님의 글을 읽고는 사라 요트가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들었다. 눈여겨 지켜보며 귀담아 들었다.
전도사님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가 충분히 느껴졌다. 사라 오트는 자신이 협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솔리스트라고 다른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배경쯤으로 여기지 않았다. 지휘자와 다른 연주자들의 지휘와 연주에 집중했고, 자신은 그 중의 일부라는 사실을 겸손함과 따뜻함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저 젊고 재능 있는 연주자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첼리스트 자크린느 뒤 프레가 걸렸던 다발성 경화증이란 몹쓸 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전도사님의 글을 통해 알게 된 몰랐던 사실 앞에 그의 연주와 연주하는 태도가 아름다운 만큼 마음이 아팠다. 마침 요 며칠 자크린느 뒤 프레의 첼로 연주를 귀 기울여 듣고 중이어서 더욱 그랬다.
사라 오트의 연주에 비하면 지극히 사소한 부분이지만 연주를 대하며 내게 새로웠던 장면이 있었다. 대부분의 연주 영상은 같은 장면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단원들이 연주할 준비를 갖추고 있으면 지휘자와 솔리스트가 박수를 받으며 입장하는 모습부터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소개한 영상은 달랐다. 지휘자와 솔리스트가 입장하기 전 오보에 주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음을 불었고, 그 음에 목관악기들이 음을 맞춘 뒤 현악기들이 음을 맞췄다. 바이올린은 따로 악장이 한 번 더 음을 연주하여 조율을 했다. 조율하는 모습까지를 영상에 담은 것이 특이했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 순간이라 여겼던 바로 그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었다.
자기가 연주할 악기를 조율도 하지 않은 채 들고 와 함께 연주를 한다면 그 연주는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삼척동자도 짐작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어쩌면 은밀한 상황이 있다. 악기를 정확하게 조율하되 각자가 따로 악기를 조율하는 경우이다.
적어도 오케스트라 단원이라면 자신이 연주할 악기의 전문가이니 자기 악기를 조율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각자 자신의 악기를 아무리 정확하게 조율을 했다 할지라도 그 상태로 모여 연주를 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다. 소음도 그런 소음이 없을 것이다.
악기가 다양할수록 모든 악기는 같은 음에 소리를 맞춰야 한다. 오보에가 내는 A음(라)에 내가 가진 악기의 음을 맞춰야 한다. 그렇게 할 때만 비로소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
내가 옳다는 생각으로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이 얼마나 많은가. 내 악기를 틀림없이 조율했다는 이유로 나머지를 무시할 때, 그 때 만들어지는 것은 세상 괴롭고 민망하기 그지없는 소음이다. 귀 기울여야 할 음을 무시한 채 내 악기만을 조율하면 커지는 것은 소음뿐이다. 정확하면 정확할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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